아트부산&디자인 2020
온라인 뷰잉룸(11월 6~20일)도 함께 꾸려지기는 했지만 모처럼의 오프라인 아트 페어에 다각도로 관심이 쏠리면서 VIP 프리뷰 첫날(5일)에만 4천 명이 넘게 몰리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때마침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을 내세운 부산비엔날레, 부산시립미술관의 기획전 등이 겹치는 바람에 온통 ‘아트’로 달아오른 부산. 자주 가도 늘 기분 좋아지는 이 항구도시를 늦가을에 다시금 찾았다.
올해로 9회를 맞이한 아트부산은 행사명까지 ‘아트부산 & 디자인’으로 바꾸면서 여러모로 업그레이드를 꿈꿨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돌발 악재를 만나 계획을 급히 수정해야 했다. 행사 날짜를 바꾸고(5월 말에서 11월 초) 예년에 비해 규모를 키우기는커녕 절반 이하로 대폭 줄였다(지난해 국내외 1백64개 갤러리 → 70개 갤러리). 대신 ‘프리미엄’을 지향했다. VIP 프리뷰도 하루짜리가 아니라 기간 내내 일정 시간대에 진행해 쾌적한 관람 환경을 꾀했다. 그 결과, 현장 반응이나 부스 판매 등 전반적인 성과가 자못 ‘긍정적’이다. 부산을 대표하는 조현화랑은 김종학 작가의 작은 꽃그림 20점을 부스에 내걸었는데, 오픈하자 바로 ‘완판’을 기록하면서 기분 좋은 시작을 알렸다. 이렇듯 막을 올리자마자 작품 판매가 줄줄이 이어지면서 쾌재를 부른 갤러리가 여럿 있다. 애초에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적절한 노선 변경으로 작지만 내실 있는 페어라는 평가를 얻은 것.
오프라인 행사에 대한 목마름, 그리고 지난해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는 유럽 화랑이 참가해 거둔 실적이 나쁘지 않은 덕분이었을까? 명단이 대폭 축소된 와중에도 글로벌 아트 페어를 다녀봤다면 꽤 익숙하게 느껴질 이름들이 아트부산 & 디자인 2020 현장에서도 눈에 띄었다. 작년에 이어 쾨니히 갤러리(Ko··nig Galerie), 페레스 프로젝트(Peres Projects) 같은 독일 갤러리가 부스를 차렸고, 오스트리아의 갤러리 타데우스 로팍, 뉴욕 기반의 글래드스톤 갤러리 등 명성 높은 화랑이 새롭게 합류했다. 독일 신표현주의 회화의 거장으로 거꾸로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유명한 게오르그 바셀리츠(Georg Baselitz)의 대작을 내건 갤러리 타데우스 로팍은 안토니 곰리, 알렉스 카츠 등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작가를 비롯해 올리버 비어 같은 떠오르는 작가도 함께 선보였는데, 단연 무게감이 돋보였다. 지난해 도나 후앙카(Donna Huanca)의 인상적인 회화 등으로 인기를 끈 베를린 기반의 화랑 페레스 프로젝트는 올해도 SNS에서 뜨거운 반응을 보인 부스를 꾸몄다.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앉아 있는 파란색 대형 조각(오스틴 리 작가)을 비롯해 내년 광주비엔날레에서도 소개될 아르헨티나의 애드 미놀리티 등 참신한 여성 작가의 작품들을 내놓았다. 이 밖에도 리먼 머핀, 탕 컨템퍼러리 등 제법 ‘글로벌 아트 페어’ 분위기가 나는 해외 갤러리의 라인업과 더불어 국제갤러리, 가나아트, 갤러리현대, PKM갤러리 등 대다수 국내 메이저 화랑은 물론 밀레니얼 세대의 감각을 엿볼 수 있는 기획전 <아트 악센트>, 아트 토이 등 국내 컬렉터들의 문화를 보여주는 <보통의 컬렉터>전 등으로 전반적인 짜임새가 다양한 편이었다.
사실 아트부산 & 디자인 2020 전시 공간의 구성은 마냥 빼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일단 장소의 한계로 작년처럼 곳곳에 놓였던 설치 작품이나 역동적인 퍼포먼스로 인해 미술 장터의 건조함을 달래주던 공간의 미학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그나마 이배 작가의 대형 작품(조현화랑)이 갤러리 설치 프로젝트 ‘엑스페리먼트’의 일환으로 부스가 아닌 통로에 존재감 있게 전시됐고, 또 다른 부산 화랑인 갤러리 604는 자체적으로 부스를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현대미술가 가와마타 다다시의 작품으로만 채웠는데, 특히 대형 캔버스에 담긴 8점을 하나처럼 붙여 한 벽을 길게 메운 방식이 눈길을 끌었다. 공식 행사명에 ‘디자인’이 추가됐음에도 정작 그 이름에 어울리는 디자인 부문 콘텐츠는 빈약한 편이었다는 점도 아쉽다. 하지만 올해는 워낙 어려운 여건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아트와 디자인’을 키워드로 삼은 페어는 내년을 기대해볼 법하다.
아트 페어 하나만으로 부산이 아시아 지역을 대표하는 ‘아트 도시’로 발돋움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홍콩의 아트 바젤처럼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만한 아트 페어의 몫도 중요하기는 하다. 그저 매년 결이 비슷비슷한 갤러리들의 미술 장터가 지속되면 관람객은 싫증 내기 마련이다. 따라서 골목마다 사연이 묻어 있는 구도심,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예술 마을 등 도시의 고유 인프라를 활용해 ‘지역 축제’처럼 거듭나야 비로소 브랜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긍정적인 요소는 부산의 아트 신이 한층 풍부해지고 미술 소비나 감상에 대한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호평받았던 부산비엔날레의 주요 거점인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벡스코 전시장 옆에 자리한 부산시립미술관 등을 중심으로 매력적인 동시대 미술을 선사하고 있다. 올가을만 해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중국 동시대 미술의 대표 작가(주진스, 쑹동, 류웨이)를 접할 수 있는 기획전 <상흔을 넘어>, 그리고 비디오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 개인전이 열려 아트 페어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욱 강하게 이끌었다. 아니면, 반대로 빌 비올라를 보러 갔다가 아트 페어에 들러 그림 한 점을 살 수도 있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