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대’의 가치를 돌아보다_ 2
사틴은 언젠가 자신의 롤모델인 사라 베르나르에 버금가는 여배우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실제로 사라 베르나르는 벨 에포크 시대가 낳은 불세출의 아티스트로 ‘사회현상’이나 다름없었다. 단순한 스타 여배우를 넘어 당대 최고의 셀럽이자 사교계의 여왕 같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세인의 관심이 집중된 건 당연지사. 이렇듯 화려한 명성 뒤에는 불우한 환경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한 강한 집념과 의지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과 미국에까지 명성을 떨치면서 많은 여성에게 선구자적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그녀와 동시대를 살았던 카미유 클로델,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마리 로랑생, 가브리엘 샤넬처럼 성별을 떠나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어 한 여성들의 치열했던 삶의 여정을 반추해보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한 듯하다. 그런데 사라 베르나르가 전설로 남을 수 있었던 데는 그녀가 벨 에포크를 상징하는 화가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를 스타로 등극시킨 주인공이라는 점도 한몫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세기적인 협업’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보헤미안 시골 소년 무하가 품은 꿈, 그리고 도전
우리에게는 그룹 퀸의 노래로 익숙한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보헤미안(Bohemian)’은 프랑스어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방랑자’ 등의 의미가 있는 단어다. 또 체코공화국 서쪽의 보헤미아 지방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 반대편 모라비아의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 이반치체에서 태어난 알폰스 무하(Alphose Mucha, 1860~1939)는 거의 일생에 거쳐 방랑자처럼 살았다. 유년 시절, 소년 성가대의 일원으로 활동한 경험은 무하의 인생에 훌륭한 기초를 닦아준 듯하다. 당시 상류층에만 허락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성가대에 들어가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그는 타고난 재능이 있어도 노력과 성실을 겸비해야만 예술 소비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근본’을 깨달았다. 이와 동시에 뛰어난 재능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현실 역시 일찍이 맞닥뜨렸다. 야속한 변성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돌아간 고향의 일상은 이미 넓은 세상을 경험한 소년 무하에게는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무하의 마음은 줄곧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도시를 향했다. 모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여행에서 바로크풍 천장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프라하의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대신 비엔나의 한 공방에 일자리를 얻어 무대미술을 접한 그는 야간에 드로잉 수업을 들었다. 비엔나의 다채로운 문화 예술 콘텐츠를 접하며 식견을 넓힌 그는 후원자를 만나 경력을 쌓는 동시에 독일 뮌헨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행운을 누린다. 1887년, 무하는 드디어 당시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모여들던 ‘꿈의 도시’ 파리로 간다. 파리에서의 초반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후원자가 송금을 중단하는 바람에 학업도 포기하고 고달픈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삽화가로 일하게 됐는데, 그림 그리는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특히 그림이라는 공감대로 친해진 동료들과 선한 이웃 덕분에 언젠가는 자신의 예술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겠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 춥고 배고픈 시절, 아틀리에를 같이 쓸 정도로 특별한 친분을 맺은 친구들 중에는 첫 번째 타히티 여행에서 막 돌아온 폴 고갱도 있었다.
스타 탄생으로 이어진 연극 포스터
1894년 말, 30대 중반의 무하에게 삶의 중대한 전환점이 된 사건이 일어난다. 파리의 르메르시에(Lemercier) 인쇄소 담당자는 새해에 무대에 올릴 연극 <지스몽다(Gismonda)>의 포스터 디자인을 급히 교체해달라는 사라 베르나르의 전화를 받고 고심한다. 모든 정규직 직원들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나버린 상황이라 마땅히 일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마침 인쇄소에서 성실히 교정 작업을 하던 무하에게 이 작업을 맡긴다. 그런데 며칠 뒤, 완성된 포스터를 보고 그 기묘한 스타일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당시 대부분의 포스터는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고 인물 묘사는 과감한 생략으로 특징만 드러내는 것이 추세였다. 그런데 무하의 포스터는 완전히 달랐다. 일단 2m를 넘는 거대한 크기부터 색달랐다. 기존 포스터 사이즈를 상하로 나눠 세로로 이어 붙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색상도 그간 포스터에서는 기피하던 금색에 가까운 노란색, 청갈색, 녹색 등을 깔끔하게 조합했다. 동방의 모자이크를 연상시키는 신비한 비잔틴풍의 이색적인 포스터에서 더 놀라운 점은 늘 젊고 아름다운 존재로만 그려졌던,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미 50대에 접어든 사라 베르나르의 모습이었다.
무하의 포스터 속에서 그녀는 성화(聖) 이미지 같은 숭고함이 깃든 원숙한 여인이었다. 특유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성스러움의 묘한 조화가 돋보였다. 그러나 인쇄소 담당자는 이 포스터의 천재성을 알아보지 못한 채, 다혈질의 대배우가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심미안이 빼어난 사라 베르나르는 이 포스터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신성화하고 있음을 금세 알아차렸다.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선 강렬한 영혼의 울림이 있었다. 그녀는 당장 이 화가를 불러달라고 했고, 긴장된 표정으로 극장에 들어선 무하를 보고는 감동의 탄성을 질렀다고 전해진다. 이 탄성은 곧 무하의 무명 생활이 끝났음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사라 베르나
르는 자신의 연극 포스터는 물론이고 무대의상과 액세서리, 무대 디자인 등을 도맡는 전속 계약을 제안했다. 대중도 무하의 솜씨에 매료됐다. ‘무하표’ 사라의 모습은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졌고, 그렇게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녀가 할리우드가 생기기 전 구미에서 탄생한 최초의 월드 스타가 된 데는 무하의 포스터가 미친 영향도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들은 후원자와 예술가인 동시에 예술가와 뮤즈이기도 한, 바람직한 상생의 관계였던 셈이다.
벨 에포크의 아이콘에서 체코의 국민 화가로
파리의 황금기에 무하의 인기는 대단했다. 광고, 잡지 커버, 달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의뢰’가 쏟아졌다. 무하는 우아한 곡선미를 자랑하는 여성 외에도 꽃, 잎사귀, 나뭇가지, 동물 등 자연의 아름다움에 주목한 모티브를 자주 사용했다. 유기적인 장식성을 강조한 탐미적인 이른바 ‘무하 스타일’은 파리 아르누보의 대명사가 된다. 광고지만 ‘상품’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무하의 광고 포스터는 특기할 만하다. 상품 대신 시선을 잡아끄는 아름다운 여인을 부각하는데, 이로써 ‘이 상품을 쓰는 당신도 멋져 보일 거야’ 또는 ‘이런 멋진 여인도 이 물건을 쓰는 당신에게 매료될 거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의 광고 같은 현대성이 돋보인다. ‘상품의 향연’이 펼쳐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타도 단연 무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훗날 프랑스 최고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그의 또 다른 업적으로 1902년 발간된 <장식 자료집(Document De´coratif)>이 꼽힌다. 자신의 모든 노하우를 담고 그 테크닉까지 상세히 주석을 달아 설명한 이 책은 대중이 보기에도 매혹적이지만 특히 화가, 장인 같은 전문가 집단에는 ‘교과서’의 무게를 지닌 귀중한 자료였다.
벨 에포크 시대가 저물면서 미국에 본격 진출하기로 한 무하는 1906년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진다. 그리고 1910년에는 고국으로 돌아간다. 사실 그에게는 늘 강대국에 짓밟혀온 자신의 조국과 러시아에서 발칸반도에 이르는 넓은 땅에 흩어져 각기 다른 나라를 이루고 사는 슬라브 민족에 기여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에서 활약하는 동시에 슬라브 역사와 인물을 재조명하는 자신만의 ‘프로젝트’에 나머지 인생을 바친다. 슬라브족의 화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그의 역작 ‘슬라브 서사시(The Slave Epic)’도 그 결과물이다. 상업적인 화가의 상징 같았던 무하가 20점에 이르는 연작 ‘슬라브 서사시’(1911~1928)의 완성에 혼을 담아 헌신한 모습에서 한 인간의 예술 여정이 새삼 위대하게 느껴진다. 현재 서울 삼성동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진행 중인 <알폰스 무하展>에서는 세속과 성스러움을 넘나드는 사라 베르나르의 압도적인 자태를 담은 파리 시절 작품은 물론, 슬라브 서사시 등 무하에게 ‘체코 국민 작가’라는 칭호를 안겨준 후기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오는 4월 5일까지). 전시장에서 우리나라 역사와도 겹치는 지점이 있는 슬라브 서사시 같은 작품을 바라보노라면 문득 안토닌 드보르자크(Antoni´n Dvoˇra´k)의 슬라브 무곡이 듣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