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ing everyday catastrop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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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 2020

글 고성연

마치 종말론이 팽배한 세기말 같은 분위기다. 소비 심리가 위축되고 증시도 주저앉았다. 사실 밀레니엄을 앞두고서는 뒤숭숭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새로운 세기에 대한 설렘도 공존했다. 그런데 21세기는 초반부터 ‘9·11 테러’를 맞이했고, 그 뒤로도 온갖 재해와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 올해는 ‘코로나19’ 탓에 분위기가 움츠러들었다. 마침 미술 시장도 하향세를 타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아트 바젤과 UBS가 발간하는 미술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미술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5%가 줄어들었다. 대부분의 문화 예술 행사가 취소되거나 연기된 올 상반기 성적이 좋기를 기대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팔리는’ 예술만 있는 건 아니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고 ‘치유’를 도와주기도 하는 예술의 힘을 기억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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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 타이베이에서 열린 아트 페어를 보러 갔을 때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시내에 있는 한 미술관을 찾았다. 화려한 외양이나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지는 않지만, 흔히 난해하다고 여겨지는 현대미술을 진중하면서도 대중에게 흥미롭게 소개할 줄 아는, 그래서 참 좋아하는 타이베이 현대미술관(MOCA Taipei). 날씨가 꽤 우중충한 날이었는데, 마침 진행 중인 전시 제목도 스산함을 풍겼다. <Co/Inspiration in Catastrophes>. 설명을 들어보니 이 전시를 기획한 주요 계기는 대만에서 1999년 가을에 일어난 대지진 발발 20주기, 반세기 만의 대홍수(2009) 발생 10년을 맞이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불과 1년 전 터진 고속열차 탈선 사고의 아픔을 되새기면서 예술적인 치유의 힘을 모아보고자 함이었다고. 물론 전시 콘텐츠는 대만에 국한하지 않았다. ‘이동의 시대’, ‘초연결의 시대’로 불리는 오늘날 한 마을에서 비롯된 사건, 사고라도 쉽사리 국경을 넘어 연쇄적인 파장을 일으킬 수 있거니와 어차피 재난이란 인종이나 국적을 가리지 않는 법이니까. 난민, 전쟁 같은 인류사의 비극을 다룰 때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아이웨이웨이(Ai Weiwei)를 비롯한 여러 글로벌 아티스트들이 인재(人災)든, 천재(天災)든 각종 참사를 소재로 삼은 작품을 선보였다. 이 전시를 보고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발 ‘코로나 악재’ 소식이 들려왔고, 이는 꽤 빠르게 지구촌을 강타했다. 사실 재난을 소재로 한 전시 자체가 ‘뉴스’는 아닐 것이다. 이미 우리는 온갖 재난에 둘러싸인 ‘위험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재난을 ‘경고’하고, 그로 인한 ‘상처’를 보듬고자 한 최근 전시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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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비극을 숙고해볼 수 있는 현대미술 전시들
지난달 막을 내린 MOCA 타이베이의 전시는 미술관 앞마당에서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설치 작품으로 시작된다. 언뜻 평범한 고기잡이배처럼 보이는 두 척의 소형 어선이 거리를 두고 놓여 있는데, 하나는 2011년 봄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대만의 한 해안가 마을로 떠밀려온 돛단배이고, 또 하나는 홍콩의 일명 ‘소환법(범죄인 인도법 개정안)’ 반대 시위를 상징하듯 색색의 메모지가 잔뜩 붙어 있는 작은 배다. 전자는 무자비한 자연의 파괴력을 보여주는 천재, 후자는 인간이 야기한 비극인 인재로 의미심장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면 일본, 중국 등 아시아는 물론이고 남미, 중동, 유럽 등 여러 지역에서 발발했던, 혹은 아직도 누군가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있는 각종 재난의 축소판이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중국의 망명 작가 아이웨이웨이는 국제적인 난민 문제를 다룬 작품 5점을 선보였는데, 이 중에는 ‘오디세이(Odyssey)’처럼 시리아 난민을 상징적으로 다룬 디지털 프린트 작품도 있고, 글로벌 이주민들이 겪는 위험한 여정과 고통을 엮은 ‘휴먼 플로(Human Flow)’, ‘이도메니(Idomeni)’ 등의 영상 작품도 있다. 일본의 젊은 아티스트 그룹 침↑폼(Chim↑Pom)의 경우에는 지진이나 원전 사고 같은 처참한 재해, 그리고 도쿄올림픽으로 인한 도시 개발의 이면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다뤄왔는데, 이들의 대표작 ‘슈퍼 쥐’도 이번에 전시됐다. 자본주의의 욕망 속에서 엄청난 크기로 자란 돌연변이 쥐를 애니메이션 캐릭터 피카츄처럼 보이도록 칠한 작품이다. 타이베이에서는 ‘디스토피아’적인 도시 풍경을 예술 작품으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전시가 진행 중인데, 2016년 문을 연 복합 문화 공간 저트 아트 뮤지엄(Jut Art Museum)의 기획전 <Paradise Lost ? Gazing at Contemporary Urban Civilization and Its Metaphor>다. 존 밀턴의 대서사시 <실락원>에서 제목을 딴 이 전시는 인간의 야망이 빚어낸 문명의 변화무쌍한 면면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조명한다(오는 4월 5일까지). 건축과 예술을 담는 것으로 유명한 이 공간은 전시장 입구에 놓인 검은 색조의 송전탑처럼 생긴 설치물부터 관람객의 눈길을 잡아끄는데, 일본 아티스트 이와사키 다카히로(Takahiro Iwasaki)의 ‘The Out of Disorder(Collapse)’라는 작품이다. 일본인들에게 처절한 충격을 안겨준 2011년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소재로 오늘날 우리가 의존하는 에너지 공급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담담하게 강조한다. 가공할 만한 첨단 기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여러모로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류의 미래상을 그려본 전시도 있다. 싱가포르의 아트사이언스 뮤지엄(ArtScience Museum)에서 열리고 있는 <2219: Futures Imagined>. 도시의 랜드마크이기도 한 마리나 베이 샌즈에 자리한 이 미술관은 이름처럼 미래 지향적인 콘텐츠로 잘 알려져 있다. 2백 년 뒤 세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제목으로 차용한 이번 전시는 마치 연극의 1~5막처럼 서로 다른 소주제의 공간을 따라 ‘체험’할 수 있는 여정을 특유의 ‘디지털 센스’를 살려 짜임새 있게 만들었다. 지구온난화 등 기후변화의 파장으로 식량을 생산하는 공간까지 ‘실내’에 두는 미래의 집 안 풍경을 담은 작품 등 볼거리도, 생각할 거리도 많은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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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탓하든 우리 모두의 참사!
우리나라에서도 ‘재난’이라는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운 기획전이 지난해 개최된 적이 있다.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작년 여름에 진행된 <재난>이라는 전시다. 인류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그래서 ‘일상의 일부가 재난이 되어버린’ 듯한 현실에 대한 공감과 피로감, 그리고 낮섦이 혼재된 다양한 감정의 양태를 다각도로 조명하고자 했다. 고영미, 노순택, 민유정, 박경진, 송진희, 이보람, 장우진, 조경란, 하태범 등 한국 작가들이 참여했는데, 아픈 현실이지만 은유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한 잔혹 동화 같은 작품부터 카메라 렌즈를 통해 사회적 갈등을 날카롭게 포착해낸 다큐멘터리 사진,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재난의 이미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망각하며, 안도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을 비판적으로 담아낸 삽화 등 작가마다 다르게 이해하고 반응하고 표현하는 서로 다른 개성의 조합이 흥미롭다. 이어 지난해 가을부터 지난 2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MMCA)에서 열린 <MMCA 현대차 시리즈 2019: 박찬경 – 모임 Gathering>에서도 ‘재난 이후’를 얘기하는 작품이 돋보인다. 피폭 현장인 마을을 촬영한 작가의 사진과 방사능을 ‘가시화’한 일본 작가의 작품을 교대로 보여주면서 재난의 종합적인 이미지를 느끼게 하는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를 비롯해 ‘석가모니의 열반’이라는 종교적 사건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라는 재난을 하나로 묶어 우리가 관습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를 뒤집어보도록 유도하는 영화 ‘늦게 온 보살’ 등이 있다. 물론 작가들이 그저 재난의 참담함이나 슬픔 같은 비극적 정서만을 부각하는 건 아니다. ‘재건’에 대한 희망도 얘기한다. 일본 도쿄 롯폰기 힐스에 있는 문화 예술계 명소인 모리 미술관(Mori Art Museum)에서는 2018년 가을부터 지난해 초까지 개관 15주년을 기념해 <Catastrophe and the Power of Art>라는 제법 규모 큰 기획전이 펼쳐졌는데, 이름이 말해주듯 이 전시의 주제는 대재앙, 재해, 재난을 딛고 치유와 성장으로 이끄는 ‘예술의 힘’이었다. 이 글에서 앞서 언급한 침↑폼과 아이웨이웨이를 비롯해 일본 건축 거장 반 시게루(Shigeru Ban), 모나 하툼(Mona Hatoum),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 lix Gonza´lez-Torres), 아이작 줄리엔(Isaac Julien) 등 쟁쟁한 동시대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반전과 평화를 함께 외쳤던 남편 존 레넌이 작고한 뒤에도 예술가로 꾸준히 활동해온 오노 요코(Yoko Ono)는 1969년 반전 시위를 연상시키는 ‘War is Over’라는 문구를 써넣은 패널, 부활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담은 메시지를 완성해가는 관객 참여형 작품 등으로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회복 탄력성의 미학
인간의 회복 능력은 때때로 놀랍다. 재난 같은 큰 시련을 겪고, 또 견뎌낸 뒤 그 상흔이 아물기까지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모두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경이로운 내면의 힘이다. 역사적으로 전염병이나 전쟁, 기근 같은 위기에도 늘 그것을 자양분 삼아 창조적인 꽃을 피워낸 예술도 우리의 회복과 치유를 도와줄 수 있다. ‘회복 탄력성’을 높이려면 사회적 관계 맺기가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소통과 공감 능력,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자아 확장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재난 속에서 서로에게 ‘경고장’을 날리며 ‘남 탓’을 하고 ‘내 잇속’을 차릴 기회를 엿보기보다는 냉정하게 현실의 곤경에 맞서되, 서로를 믿고 보듬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멀리 프랑스에서는 몰입형 디지털 체험이 가능한 대형 전시가 곧 등장할 예정이다. 화산 대폭발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고대 로마의 도시 폼페이를 3D 기술로 구현해낸 <폼페이(Pompe´ i)>가 이달 말 파리 그랑 팔레에서 막을 올린다.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 장면은 물론 화려하기 그지없었던 유적과 거리를 ‘구경’할 수 있는 디지털 체험이다. 부디 지구촌 곳곳에서 보다 많은 이들이 이 전시를 무사하게 보러 갈 수 있는 환경을 되도록 빨리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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