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18/19 WINTER SPECIAL]_비움과 채움, 치유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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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2, 2019

글 고성연

Park Seo-Bo in Hong Kong
비움과 채움, 치유의 미학

아들의 체념 어린 연필질에서 발견한 비움의 미학을 자신만의 예술혼이 담긴 묘법(描法, ecriture) 시리즈로 구현해낸 박서보. 단색화의 선구자 대열에 어김없이 꼽히는 그는 올해 만 여든여덞. 이제 아흔을 눈앞에 둔 노장은 예술 한류에도 동참하고 있다. 세계적인 갤러리 화이트 큐브(White Cube)와 런던에서 이미 한 차례 전시를 가진 적이 있는 그는 갤러리의 소속 작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화이트 큐브 작가로서는 첫 개인전이 최근 홍콩에서 열렸는데, 작가의 출발점부터 깊이 탐색하며 인연의 서막을 기념하듯이 그의 초기작인 ‘연필 묘법’ 작품들을 선보였다. 비움과 채움이 교차하는 그 현장에 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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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가 총총걸음으로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물결을 지켜보노라면 서울보다도, 도쿄보다도 번잡하다는 생각이 드는 홍콩의 센트럴 지구. 땅값이 워낙 비싼 탓에 내로라하는 글로벌 갤러리들도 단독 건물이 아니라 고층 빌딩에 터를 잡고 있다. 그중 영국을 대표하는 화이트 큐브(White Cube) 갤러리는 크림색 외벽에 높다란 천장이 우아함을 뿜어내는 중국농업은행 건물 1층에 자리하는데, 갈색 틀의 유리 문 안에 발을 들여놓으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특히 2018년 연말, 화이트 큐브를 수놓은 박서보 전시는 그런 느낌을 더욱 북돋는다. 새하얀 벽에 띄엄띄엄 여유 있게 걸려 있는 그의 작품들 사이를 거닐다 보면 마치 완전히 다른 시공간에 와 있는 듯, 은근한 평온함이 살며시 몸을 감싼다. 이 공간에서는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된다. 단색화 특유의 질감이, 잔잔한 리듬감이 느껴지는 제스처가 절로 주의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박서보 작품은 정말로 직접 와서 봐야 합니다. 이곳 미술계 종사자들도 박서보 작품을 경매에 출품된 한두 점만 본 게 다인 경우가 많아요. 요즘 사람들은 심지어 휴대폰으로 그림을 보고 말잖아요. 하지만 실제로 전시장에 와보면 커다란 차이가 있죠.” 화이트 큐브 홍콩을 이끄는 아시아 총괄 디렉터인 로라 저우(Laura Zhou) 역시 전시가 선사하는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실 밖에 나가보면 홍콩인의 삶은 매우 바쁘게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 전시장에 일단 들어오면 금세 속도를 늦추게 되지요. 그리고 에너지가 코어(core)로 집중된달까, 그런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바쁜 현대인에게 꼭 와서 감상하라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박서보의 이번 개인전은 그의 묘법(描法, ecriture) 시리즈의 초기작(1967~76년 작품)을 모아놓은 전시다. 이미 두 해 전 런던에서 개인전을 연 적은 있지만, 화이트 큐브 소속으로서는 첫 전시이기에 작가의 시작점부터 조명하고 싶었다고 한다. “희소성 있는 초기작을 모아 전시하는 일은 상당히 품이 드는 작업이었어요. 하지만 작가를 소개할 때 깊이에 중점을 두는 게 저희 일인 만큼, 박서보라는 작가가 아티스트로서 어떻게 작업을 시작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아갔는지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박서보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지난 수년 동안 세계 미술 시장에서 놀라울 정도로 큰 주목을 받고 시장 가치가 솟아오른 단색화에 대해서는 ‘거품론’, ‘이론적 토대의 부재’ 같은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화이트 큐브 소속이 된 단색화의 대표 주자 박서보에 대해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로라 저우 디렉터는 단색화를 논하는 건 이제 시작 단계일 뿐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러나 예술사 차원에서 볼 때 분명히 가치가 있는 시대의 새로운 움직임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단색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를 재건하려는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서구의 미니멀리즘에 영향을 받고 명상 등 동양철학에 뿌리를 둔 아시아 작가들이 문화적 재건에 대해 생각하고, ‘문화적 독립’을 위해 자신들만의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 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며 자신이 미술사학자나 이론가는 아니지만 “이 같은 움직임은 당시 일본과 대만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아시아적인 맥락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훗날 ‘단색화’라는 이름 자체를 어떻게 다룰지 모르겠지만, 그 정체성은 ‘모노크롬(monochrome)’이라는 색채나 단색조 스타일에 있는 게 아니라 정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박서보를 비롯한 이 대열의 작가를 이해해야 한다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쩌면 정신적 공감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조니, 스타일이니 하는 것보다 그저 지긋이 작품을 마주하고 에너지를 느끼고, 그 과정에서 작은 안식과 깨달음을 얻기도 하는 것. 아마도 이런 것이 예술 감상의 본질이 아닐까. 실제로 박서보의 홍콩 전시를 찾은 한 관람객이 작품 하나하나를 깊이 응시하면서 2시간가량 머물다 떠난 경우도 있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비우려 하다가 채우고, 채우려 하다 비우는 것. 작품을 만드는 이에게든, 감상하는 이에게든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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