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 개봉 예정작인 <파이널 포트레이트>는 위대한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피카소가 질투했던’이라는 수식어를 동원한다. 피카소가 자코메티를 높이 평가한 건 사실이겠지만, 사실 그의 진정한 라이벌이라고 할 만한 아티스트는 앙리 마티스였다. 둘은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예술가로서 성장해나갔다. 실제로 피카소는 “내 그림의 뼈대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마티스다. 그는 나의 영원한 멘토이자 라이벌이다”라고 했다고. 마티스 역시 피카소를 늘 주시했다. 이 같은 경쟁 관계는 반드시 대등한 방식으로 이뤄지지도 않고 단 두 명의 감정만 반영되기보다는 훨씬 더 복잡다단하게 전개되기 마련이지만, 결과적으로 예술혼에 긍정적 추동력이 된 경우도 많다.
해마다 여름이면 ‘모객’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는 건 비단 영화관만이 아니다. 지구촌 곳곳의 내로라하는 미술관들도 정성 들여 마련한 ‘블록버스터 전시’로 관람객의 발길을 유혹한다. 그중 한 전시로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에서 얼마 전에 막을 내린 <All Too Human>을 통해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적으로 받은 작가들이 있었는데, 20세기 영국 현대미술의 두 거목 루치안 프로이트(Lucien Freud)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다. 나이 차가 10년 넘게 나는 두 작가는 20세기 중반 런던에서 만나 오랫동안 교분을 쌓았다. 전쟁 직후 런던 소호(Soho)의 바와 클럽을 누비며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는 ‘절친’ 관계였던 둘은 미학적 일관성은 별로 없었지만, 여러 면에서 복잡하고 미묘한 경쟁의식을 느끼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 서로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는데, 테이트 브리튼의 <All Too Human> 전시에 소개된 작품 중에도 프랜시스 베이컨이 특유의 그로테스크함을 담은 루치안 프로이트의 초상이 있다. 1965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전시 이래 무려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흐른 후 대중 앞에 다시 공개됐다는 이 작품 이미지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프로이트와 베이컨의 관계를 다룬 흥미로운 책의 일화를 비롯해 비슷한 맥락으로 얽힐 수 있는 서너 가지 단상이 뇌리를 잇따라 스쳤다. 친구인 듯, 경쟁자인 듯 아티스트로서의 삶에서 서로 뚜렷하게, 혹은 은근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예술사에 의미 있는 자취를 남긴 거장들의 라이벌 구도가 그 공통분모였다. 먼저 20세기 중반의 런던으로 가보자.
프랜시스 베이컨과 루치안 프로이트는 ‘캐릭터’는 사뭇 달랐지만 베를린과 런던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2011년 타계한 루치안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대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로, 베를린에서 태어났지만 나치를 피해 1933년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건너간다. 1909년생인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일랜드 더블린 태생이지만 어릴 적부터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닫고는 여장 등 ‘기행’으로 비칠 만한 행보를 일삼다가 부유한 농장주로 엄격한 성향이던 아버지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10대 중반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는 삼촌 집으로 쫓겨났다. 그러다가 1929년 런던으로 향한다. 처음에는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다가 화가로 전향한 그는 예술성에 있어 늘 자기비판적이었고 자주 자신의 그림을 파기해버렸지만, 1944년 세폭화 ‘십자가 아래 인물들을 위한 세 습작’으로 일찌감치 화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1940년대 중반 루치안 프로이트를 런던에서 만난 그는 술과 미식, 도박을 함께 즐기면서 일상을 공유했다. 하지만 둘의 성향은 매우 달랐다고 한다. 베이컨은 사교적이고 카리스마 강한 인물이라 항상 주위에 사람이 넘쳐났고, 우아한 외모의 소유자였던 프로이트는 내성적인 편이었지만 여성 편력이 대단했다. 둘 다 인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작업 방식이 판이했다. 프로이트가 모델이 괴로움을 호소할 정도로 느리고 꼼꼼하게 그림을 그린 데 반해 베이컨은 번뜩이는 직관력으로 아주 빨리 작업을 해치웠다. 프로이트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일찍 스타로 부상한 베이컨을 좋아하고 존경했고, 그의 과감한 예술적 면모와 매력적인 성격 등을 상당히 부러워하기도 했다. 1952년 베이컨의 작은 초상을 그렸는데, 이 작품이 1988년 베를린 전시에서 도난당했을 때 매우 실망해 2001년 런던에서 열린 자신의 회고전에서 선보일 수 있도록 ‘부디 도로 돌려달라’는 내용의 포스터까지 내걸었다. 퓰리처상에 빛나는 저술가 세바스천 스미(Sebastian Smee)가 쓴 <The Art of Rivalry>라는 책을 보면 프로이트가 한 말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베이컨)의 작품은 내게 감명을 줬지만 그의 성격은 내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세바스천 스미는 프로이트가 베이컨의 영향으로 그림을 중단하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성숙한 스타일을 구축하고 세계적인 거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진단한다.
20세기 중반을 수놓은 런더너들의 우정이 한 사람의 선망 어린 경쟁의식에 무게중심이 더 기운 경우라면, 이보다 살짝 앞선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서로 상당한 영향을 주고받은 세기의 라이벌 구도가 있었다. 바로 20세기 현대미술사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다. 스페인 출신이지만 파리를 위시해 주로 프랑스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피카소와 프랑스 출신인 마티스는 역시 열 살 이상 나이 차가 나는 데다 친한 친구 사이도 아니었지만 업계 동료로서 서로를 견제하면서 예술적인 영감을 주고받았고, 이것이 둘에게 성장의 자양분이 됐다고 평가된다. 그 첫 계기는 20세기 초 파리 문화 예술계의 허브 역할을 톡톡히 했던 스타인 남매였다. 당시 안목 높은 컬렉터이자 예술가들의 친구였던 거트루드 스타인과 리오 스타인의 파리 집은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는데, 피카소와 마티스 역시 단골손님이었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두 아티스트가 서로에 대해 의례적인 찬사는 하지만 은근히 후하지 않은, 묘한 경쟁 관계에 있음을 알아차렸다고. 아프리카 나무 조각을 스타인 남매의 집에 들고 온 마티스를 보고 피카소가 전율을 느끼고는 영감을 받았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또 마리 테레즈(피카소의 연인 중 한 명이었던 뮤즈)를 그린 ‘꿈’(1932) 같은 작품은 이국적인 벽지 무늬와 원색 범벅의 색조 등 마티스적인 요소를 너무나 강하게 담고 있어 선배 화가에 대한 ‘승리 선언’을 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냐는 평가도 있다. 이에 마티스는 잠든 마리 테레즈에 대한 피카소의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 ‘꿈’(1935)에 차용하되 선보다 색채를 강조하는 식으로 다름의 미학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실 베이컨과 프로이트 못지않게 이 둘 역시 사뭇 다른 캐릭터였다. 피카소는 강팍하고, 독선적이고, 고집스러운 성격인 데 반해 마티스는 호감형에 예의 바른 신사형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 ‘삶의 기쁨’보다 더 큰 화판에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린 걸 보고 마티스는 자제력을 잃고 화를 냈다는 후문도 있다. 이렇듯 둘은 경쟁의식도 있었지만 갈수록 서로를 인정하고 나중에는 그림도 주고받을 정도로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사진작가 겸 화가였던 브라사이의 말을 인용하자면 “둘은 서로의 작업을 견제하는 경쟁자이자 무기를 함께 든 형제였다”고.
비슷한 시기에 남프랑스의 한 마을에서는 질투심과 선망 속에서 싹튼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 그 주인공은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듣는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와 아일린 그레이(Eileen Gray). 아일린 그레이는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 디자이너로 20세기 가구 경매 최고가 기록을 갖고 있는 의자 등 세기의 디자인을 남기며 건축사에서도 의미 있는 결실을 맺은 인물이다. 그녀는 연하의 남자 친구였던 장 바도비치(Jean Badovici)를 위해 프랑스 코트다쥐르 지역에 자리 잡은 평온하고 수려한 분위기의 마을인 로크브륀-카프-마르탱(Roquebrune-Cap-Martin)에 장방형의 새하얀 빌라를 지었다. 1929년 완공된 이 빌라는 둘의 이름을 조합해 ‘E-1027’이라 명명되었다. 건축 잡지의 편집장이던 장 바도비치가 자신의 잡지에 소개하면서 나름 업계의 주목을 받게 된 이 빌라는 그의 친구이자 아일린 그레이와도 친분이 있었던 르 코르뷔지에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았다. 지중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 빌라는 흥미롭게도 르 코르뷔지에의 근대 건축 5 요소를 잘 반영해냈고, 실내 공간은 아일린 그레이의 디자인 솜씨가 여실히 발휘돼 간결하면서도 실용적이면서도 세련된 멋이 깃들어 있었다. 오늘날에도 스테디셀러인 사이드 테이블 ‘E-1027’이라든지 비벤덤 암 체어(Bibendum Arm Chair) 같은 디자인 가구와 센스 있는 소품으로 채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아일린 그레이는 1931년 장 바도비치와 헤어지면서 이곳을 떠났고, 이 마을에 자주 들렀던 르 코르뷔지에는 E-1027 빌라에 묵으면서 ‘사고’를 쳤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갈망이 강했던 것인지, 아일린 그레이의 허락도 없이 새하얀 벽에 7점 정도의 프레스코화를 그려 넣은 것이다. 심지어 발가벗은 여자들을 묘사하며 성적인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그림이었다(아일린 그레이는 레즈비언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떤 장식적인 그림도 달거나 벽에 그려 넣기를 원치 않았던 그레이는 분노했고, 자신이 존경해마지 않던 르 코르뷔지에와의 연을 끊었다. 안타깝게도 이 빌라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망가진 채 경매에 나왔는데,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의 품에 안길 뻔하다가 르 코르뷔지에와 같은 스위스 출신의 재력가 여성의 손에 넘어간다. 르 코르뷔지에가 경매계의 끈을 활용해 ‘작업’을 했다는 후문이 있는데, 어쨌거나 그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빌라의 관리자 역할을 맡게 된다. 르 코르뷔지에가 여름마다 찾으면서 여생을 보냈던 4평짜리 오두막도 바로 이 빌라 근처에 있다. 물론 아일린 그레이가 건축물 2점을 남긴 데 비해(디자이너로서도 생애 후반부에야 재평가되면서 진가를 인정받는다), 르 코르뷔지에는 진정한 건축계 거목으로 우뚝 섰지만, 적어도 남프랑스 빌라만 놓고 봤을 때는 그레이가 선망의 대상이었음이 분명하다.
동시대의 미국으로 건너가면 사랑과 우정을 둘러싼 복잡다단한 대립 구도는 추상표현주의 화가들 사이에서도 흥미진진하게 펼쳐졌다. 역시 오늘날 경매에서 뉴스를 쏟아내는 작가인 잭슨 폴록(Jackson Pollock)과 빌럼 더 코닝(Willem de Kooning)이 그 주인공들이다. 네덜란드 로테르담 태생(1904)인 더 코닝은 1926년 미국에 밀입국해 한동안 페인트공으로 생계를 잇기도 했지만, 화가로 성공해 90세 넘도록 장수했다.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잭슨 폴록은 대조적으로 무명 화가에서 물감을 쏟으면서 그리는 ‘드리핑 페인팅’으로 일약 스타로 발돋움하지만 알코올 의존증과 정신분열증으로 고생했고, 차 사고로 40대에 요절한 비운의 화가다. 폴록과 더 코닝은 친한 친구였지만 둘 사이에는 복잡한 경쟁 의식과 사랑이 끼어 있었다. 그 중심에는 폴록이 마지막에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연인 루스 클리그먼(Ruth Kligman)이 있었다. 슬럼프에 빠져 있던 잭슨 폴록에게 위안을 준 미술학도 루스 클리그먼은 폴록을 사망에 이르게 한 차 사고 때 동승했는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런데 폴록이 사망한 후 1년쯤 지났을까. 루스 클리그먼은 자신에게 위로의 손길을 보냈던 더 코닝의 연인이 됐고, 이 관계는 7년가량 지속됐다. 폴록은 죽은 이후에도 미국 회화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인정됐다(그가 사망한 1956년 이듬해에 뉴욕 MoMA에서 회고전이 열렸고,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시회가 세계 곳곳에서 개최되고 있다). <The Art of Rivalry>의 내용을 보면 클리그먼은 나중에 비망록을 집필했는데, 폴록과 함께한 시간을 추억하는 내용이었다. 생전에 폴록의 재능에 강한 경쟁심과 질투를 느꼈다고 익히 알려진 더 코닝은 친구가 사망한 직후 “나는 잭슨이 무덤 속에 있는 걸 봤다. 그는 죽었고, 끝났다. 내가 넘버 원이다”라고 말한 뒤 정원에 가서 눈물을 쏟았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더 코닝은 여러 면에서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서 갈수록 예술가로서 빛을 발했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세계 현대미술계의 거목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부터 고갱-고흐, 마네-드가 등 시대를 불문하고 예술사에는 숱한 친구-라이벌 구도가 펼쳐져왔다. 이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미술만이 아니라 장르를 불문하고 언제나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풍경일 것이다. 특히 인간에게는 자기와 비슷한 점이 있는 사람들은 비슷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경향 때문에 가까운 이들을 부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심리학자들도 주장하듯이(또 역사에서 증명되어왔듯이) 질투는 삶의 추동력이 될 수도 있다. <질투의 민낯>의 저자 지그리트 엥겔브레히트의 말을 인용하자면 질투가 불가피하다면 상대방을 동경하고 축하해주면서 부러움을 발전의 원동력을 삼는 선망적 질투, 다시 말해 ‘하얀 질투’를 목표로 삼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