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하우스, 와인과 교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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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01, 2017

글 이소영(<사진 미술에 중독되다>, <서울, 그 카페 좋더라> 저자)

패션 하우스와 국제적 대기업이 소유한 와이너리들. 모기업의 자존심을 걸고 인수한 만큼 와이너리 역시 훌륭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와이너리가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 있다는 것도 특징. 럭셔리 패션 하우스와 대기업이 보르도를 편애하는 이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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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하우스 샤넬, 케어링 그룹, LVMH의 특별한 공통점을 아는지? 바로 프랑스 보르도에 와이너리를 소유했다는 것이다. 구찌를 소유한 케어링 그룹은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를, 루이 비통을 소유한 LVMH는 샤토 슈발 블랑(Cha^teau Cheval Blanc)을 가지고 있다. 샤넬은 샤토 로잔-세글라(Cha^teau Rauzan-Se´gla)와 샤토 가농(Cha^teau Canon)을 소유하고 있는데, 모두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우아한 와이너리다. 샤넬 소유 와이너리의 와인메이커 니콜라 오드베르(Nicolas Audebert)는 2015년 여름을 시작으로 보르도 마고의 샤토 로잔-세글라와 생테밀리옹의 샤토 가농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와인을 만드는 데 샤넬과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고 말한다. “두 와이너리는 샤넬과 동일한 철학과 가치를 추구하며, 완벽한 품질을 지향합니다. 당장 내일 출시할 제품을 빠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품질 좋은 제품을 만드는 샤넬처럼 와인 역시 시간과 투자가 필요하지요.” 샤넬을 상징하는 N°5 오 드 퍼퓸과 핸드백이 트렌드에 흔들리지 않고 오랫동안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이 두 와이너리는 1백 년 전부터 사용한 방식 그대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해외 출장을 자주 가는 니콜라 오드베르는 와인 애호가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다. 와인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농학자이자 와인 양조학자이며 와인메이커로서 탄탄한 경력을 갖춘 니콜라 오드베르는 LVMH의 모엣 샹동(Moe··t&Chandon)과 뵈브 클리코 퐁사르댕(Veuve Clicquot Ponsardin)에서 샴페인 커리어를 쌓기도 했다. 패션 하우스와 오랜 인연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LVMH는 샹파뉴 지역에 많은 샴페인 하우스를 거느린 회사로 출발했기에, 보르도에 샤토 슈발 블랑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 특별하다. 샤토 슈발 블랑은 보르도 생테밀리옹 북서쪽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바로 인근에 샤토 페트뤼스가 있을 정도로 명당이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Pritzker)상 수상자인 크리스티앙 드 포르장파르크(Christian de Portzamparc)가 와이너리를 디자인했는데, 콘크리트로 만든 부드러운 곡선의 셀러가 인상적이다. LVMH는 달콤한 스위트 와인의 최고봉 샤토 디켐(Cha^teau d’Yquem)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샤토 디켐은 보르도 소테른에 위치하며, 잘 숙성된 빈티지는 트러플 향기가 나는 매력적인 와인이다.

럭셔리 패션 하우스, 보르도를 편애하다
보르도에는 패션 하우스뿐 아니라 대기업이 소유한 명품 와이너리도 많다. AXA 그룹은 샤토 피숑-롱그빌 바롱(Cha^teau Pichon-Longueville), 로실드 은행은 샤토 라피트 로실드(Cha^teau Lafite Rothschild), 부이그 텔레콤은 샤토 몽로즈(Cha^teau Montrose)를 가지고 있다. 크레디 아그리콜 그룹은 샤토 그랑 퓌 뒤카스(Cha^teau Grand Puy Ducasse), 룩셈부르크 왕가는 샤토 오 브리옹(Cha^teau Haut Brion)을 운영 중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보르도 지역을 선택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보르도에서 생산하는 와인은 오래 두고 마시는 와인이다. 프랑스에서는 부르고뉴 와인은 자신의 돈을 주고 사 먹어야 하지만, 보르도 와인은 할아버지가 손주를 위해 사놓은 것을 마신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부르고뉴에도 고가 와인의 대명사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 같은 올드 빈티지 와인이 있지만, 보르도의 오랜 전통을 따라올 수 없음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또 보르도는 부르고뉴에 비해 포도밭 면적이 넓고, 와인메이커가 오픈 마인드인 편이다. 보르도에는 프랑스인뿐 아니라 영국인, 네덜란드인, 일본인도 와이너리를 소유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와이너리를 소유한다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라는 점일 테다. 이는 우리나라 관점에서 보면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기는 하다. 유럽에서는 예로부터 왕족과 귀족계급만이 와이너리를 소유했고, 이러한 전통은 현대까지 계승되어 와이너리를 운영한다는 것은 여전히 명예로운 일로 여겨진다. 저명인사로서 와이너리를 소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소유한 와이너리가 그의 품격을 대변하는 것이다.
케어링 그룹의 샤토 라투르는 수 세기에 걸쳐 사랑받는 프랑스 와인의 5대 샤토(샤토 라투르, 샤토 마고, 샤토 라피트 로실드, 샤토 오 브리옹, 샤토 무통 로실드) 중 하나다. 2012년에는 케어링 그룹의 수장인 프랑수아 피노(Franc¸ois Pinault)가 샤토 라투르의 대표로서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올해의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의 그랑 오피시에(Grand Officier) 부문을 수상했다. 흥미로운 것은 케어링 그룹은 경매 회사 크리스티(Christie’s)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크리스티에서 올드 빈티지 와인도 중요한 경매 품목인데, 모기업이 명품 와이너리를 가지고 있으니 기업 이미지가 상승할 뿐 아니라 비즈니스에도 유리할 수밖에 없다. 패션 하우스의 명품과 보르도 와인은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오랜 시간 변치 않는 가치와 더불어 존경받는 전통을 지녔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와인이 이익이 높은 투자 산업이기 때문에 패션 하우스와 대기업이 와이너리를 소유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조급한 결론이다. 와인업계에서 우스갯소리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와인으로 백만장자가 되는 방법은 먼저 천만장자가 되어 와이너리를 운영해 돈을 날리면 자동으로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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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사교의 꽃이다
프랑스의 외무부 장관이자 샤토 오 브리옹의 주인이던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Charles-Maurice de Talleyrand)은 외교에도 보르도 와인의 매력을 총동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폐하께서 믿으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훈령보다 냄비가 더 필요합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패한 후 유럽 대표들이 오스트리아에 모여 평화조약을 맺었다. 영국 수상, 오스트리아 공작, 러시아 황제 등과 프랑스 외무부 장관 탈레랑이 참석했는데, 그는 1년여의 협약 기간 동안 끊임없이 샤토 오 브리옹을 서브했다. 결국 프랑스에 유리하게 협약이 진행되어, 프랑스가 가장 많은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보르도 5대 샤토 와인으로 여전히 명망을 과시하고 있는 샤토 오 브리옹의 힘일 것이다.
이처럼 좋은 와인은 사교의 꽃이다. 훌륭한 와이너리를 가진 오너 주위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보르도 5대 샤토 와인 중 하나인 샤토 라피트 로실드의 오너인 로실드의 파티도 마찬가지였다. 1868년 제임스 로실드가 인수한 후 샤토 라피트 로실드라는 현재의 이름을 완성했으며, 현 소유주는 가문의 5대손 에리크 드 로실드(Eric de Rothschild) 남작이다. 당시 제임스 로실드가 와이너리를 인수한 후 매일 밤 파티를 열었는데, 파리의 최고 명사들이 이 아름다운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그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패션 하우스의 아트 마케팅과 와이너리 운영은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있다. 현대미술을 중심으로 한 아트 마케팅은 과시적 측면이 강하지만, 와이너리 운영은 비과시적이며 정서적인 부분이 크다. 그 유명한 샤토 무통 로실드의 아트 레이블과 뮤지엄 운영은 대중에게 큰 감동을 주지만, 실제 와인 애호가에게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오히려 로실드 가문에서 샤토 무통 로실드가 오래된 양조장을 뮤지엄으로 개조한 것에 화를 냈다는 뒷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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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에서 경험으로, 상품에서 서비스로
패션 하우스 살바토레 페라가모와 토즈는 이탈리아에 와이너리를 소유하고 있다. 1985년 토스카나에서 사냥을 하던 중,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큰아들이자 최고경영자 페루초 페라가모(Ferruccio Ferragamo)는 일 보로(Il Borro) 지방에 매료되었다. 페라가모는 1993년 제2차 세계대전 때 부분적으로 파손된 중세풍 작은 마을과 본 저택을 포함한 일 보로 지역 전체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일 보로는 1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토스카나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 파치(Pazzi) 가문과 메디치 토르나퀸치&사보이(Medici Tornaquinci&Savoia) 가문이 소유했던 곳이기도 하다. 페라가모 가문은 와이너리 일 보로뿐 아니라 숙박 시설과 뮤지엄, 레스토랑, 스파도 운영한다. 일 보로의 와인은 고가는 아니지만, 이곳에서 경험하는 액티비티는 페라가모 브랜드와 동등하게 우아하다. 와이너리를 구입한 1993년부터 페루초 페라가모와 포도주 양조학자 니콜로 다플리토(Nicolo D’Afflitto)가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와인 저장고 위에는 미술 갤러리를 만들고, 와인에 대한 시각과 문화적 해석에 기초한 예술품을 전시했다.
토즈 그룹의 CEO 스테파노 신치니(Stefano Sincini)가 운영하는 롱고&신치니(Longo & Sincini) 와인 그룹에서도 와인을 만든다. 피아니로시(Pianirossi)는 스테파노 신치니 회장이 1999년 토스카나에 설립한 와이너리다. 연간 3천8백 병만 생산하는 부티크 와인이며, 아직 잠재력이 덜 알려진 몬테풀차노 포도 품종을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프티 베르도 같은 보르도 품종과 함께 블렌딩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www.cavistes.co.kr).
최근 트렌드 분석에 의하면 현대인은 럭셔리 패션 아이템을 소유하는 것보다 감성적 경험을 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핸드백을 구입하는 것보다 와인을 마시는 행위에서 더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패션 하우스가 소유보다 경험으로, 전통 상품에서 서비스업으로 발전 방향이 변하고 있음은 와이너리 소유와 상관관계가 밀접함이 분명해 보인다. 와인은 무엇을 마시느냐보다 누구와 마시는지가 더 중요하다.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함께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마시는 와인을 보면 그의 취향과 사회적 지위까지 가늠할 수 있기도 하다. 와인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추억을 만들며, 또 다른 만남을 기다리게 하는 강한 힘이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사회적 명망을 얻은 CEO는 자신을 상징하는 와인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패션 하우스의 와이너리는 브랜드 정체성과 분리될 수 없기에 더욱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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