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상공화국>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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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05, 2016

에디터 고성연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들여다보는 글로벌 미술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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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행성에서 도시화의 물결은 멈출 줄을 모른다. 이 현상이 어떤 장단점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지난 20세기가 ‘초대국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도시의 세기’라는 주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재능을 집약한 도시라는 엄청난 창조물이 ‘속도’와 ‘효율’을 강조하는 시대에서도 부디 의미 있게 진화하기를, 창의적인 에너지가 끊임없이 도시의 토양을 메마르지 않게 적셔주기를 바라고, 또 그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정체성을 유지하고 다듬으면서도 바깥 세상과 폭넓고 지속적인 소통과 교류를 꾀해야 함은 물론이다. 결코 녹록지 않은 작업이다. 너도나도 ‘창조 도시’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글로벌 차원의 창조 허브라 할 만한 도시가 그다지 많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빛, 생명, 물질-광주작가전>, 그리고 인간의 신체를 매개로 다양한 자기 언어로 해석하며 예상 못한 신체의 비밀을 폭로하는 <0상공화국-국제작가전>. 올해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은 이렇게 2개의 전시로 나뉘어 펼쳐지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두 가지 역사적 의미도 부여할 수 있다. 첫째는, 역사상 처음으로 비영리 국제기구인 유네스코가 (재)광주비엔날레, (사)한국미술협회 광주광역시지회, 광주국제아트페어와 협력했다는 사실이다. 죽음과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 추구와 지속적 교류를 통한 소통, 치유, 화해의 상징이 되기 위한 차원에서 이뤄진 뜻깊은 협력이다. 두 번째는, 진정한 ‘벽’ 허물기다. 이번 국제전 작가들 가운데 10여 명의 프랑스와 한국 작가는 ‘한불 수교 1백30주년’을 계기로 초대됐다. 하지만 이 전시는 한국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 흥겨움과 고상함, 감성과 이성, 나와 너의 교류를 위해 여러모로 경계를 부순다. 국제기구인 유네스코와 광주비엔날레, 대중과 예술가 사이, 외국 갤러리와 한국 갤러리 사이의 벽을 무너뜨린다.

대우주적 지역성, 소우주적 신체성

먼저 <빛, 생명, 물질-광주작가전>은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광주에서 활동하는 작가의 작품으로 구성돼 있다. 사실, 광주는 역사적으로 깊은 어둠을 잘 아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기에, 빛과 생명에 대한 이들의 감성은 남달리 예민하고 깊이가 있다. 광주 작가 25명이 ‘물질(회화, 조각, 미디어 아트 등)’을 사용해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빛’을 발산하면서 ‘생명’을 감싼다. ‘광주 작가전’은 가장 근원적이며 포괄적인 주제인 ‘빛, 생명, 물질’에 천착하면서 ‘마크로코슴(대우주)’을 노래한다. “우주적으로 사고하고 지구적으로 행동하라”라는 백남준의 우주 오페라를 상기시킨다. 더욱이 올해는 이미 세 번의 우주 오페라 ‘위성중계 미디어 아트 작품’을 지휘한 백남준의 서거 1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백남준 작가가 국제적인 미술 향연인 비엔날레를 개최하기 위한 장소로 광주를 먼저 생각하고 그 산파 역할을 한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제1회 광주비엔날레는 1995년에 개최).
반면 세계 곳곳에서 온 35명의 ‘국제전’ 작가들은 그들의 ‘0상’을 마음껏 펼치며 ‘인간의 신체’라는 ‘미크로코슴(소우주)’을 다루고 있다. ‘신체’라는 주제를 선정한 것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주제를 통해 작가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다르게 표현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작가들의 신체 표현을 보면서, 그동안 몰랐던 또 다른 신체 단면을 알려주겠다는 의도다. 요제프 보이스, 니키 드 생팔, 자크 빌르그레, 아르망, 펑정지에, 오마키 신지, 모리무라 야스마사, 다니엘 퍼먼, 방혜자, 권순철, 서용선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35명의 작가가 그들 고유의 국적을 초월해 0상공화국 국민으로서 참여한다. 전시 제목 ‘0상공화국’은 무엇을 의미할까? ‘0상’은 일반적인 의미의 ‘공상(空想)’이기도 하며, 조어적 의미로 ‘공간’이나 비움(空, vide)에 대한 이미지(像, image)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모든 편견이나 선입견을 유보하고, 0(zero)에서부터 다시 생각해보자는 의미다. 이는 현대 예술 사조 중 하나인 ‘다다(Dada)’의 정신을 되새겨보자는 것이기도 하다. 올해는 무한한 ‘0상’의 자유를 예술과 삶에 도입한 다다이즘 탄생 1백 주년을 맞는 해다. 다다이스트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죽음, 폭력, 등이 만연한 것을 보면서, 당시까지의 모든 사상, 전통, 문화, 예술을 그 근본부터 철저히 재고해보자는 취지에서 1916년 취리히에서 다다 선언을 했다. 1세기가 지난 현재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고, 끔찍한 테러가 여기저기에서 발생하고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다다이스트처럼 지금까지 우리가 가졌던 이념, 이에 따라 취한 행동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이 다시금 요청된다.

3개의 미사일 혹은 남근?
이제 전시장을 함께 돌아보자. 국제전 전시장 입구에는 왕두가 직접 광주에 와서 만든 미사일이 먼저 관람객을 맞는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신문 10종류와 한국에서 출간된 패션 잡지 다섯 권을 사용해 ‘미사일’을 만들었다. 신문으로 만든 미사일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속담을 연상시킨다. 인간의 사건·사고를 전하는 신문이나, 유행을 다룬 패션 잡지는 재질적으로 ‘신체’와 관련된다. 또 미사일의 형태는 프로이트식으로 보면 일종의 ‘남근(phallus)’이다. 왕두의 미사일(남근) 2개는 정확하게 또 다른 거대한 남근을 겨냥하고 있다. 바로 한홍수 작가의 ‘지젝에 따른 신체 없는 기관(OwB selon Z)’이다. 캔버스에는 꽃분홍색 거대한 남근이 가득 차 있다(실제는 허리를 180도로 접은 상체를 그린 모습인데, 멀리서 보면 남근처럼 보인다). 프로이트의 시각으로 본다면, 왕두와 한홍수는 두 종류의 상반된 남근을 보여준다. 왕두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남근인 ‘미사일’을 보여준다면, 한홍수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남근인 ‘몸’을 보여준다. 이는 프로이트의 말대로, ‘전쟁과 죽음의 욕망을 에로스적인 욕망으로 제어’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왕두의 파괴적인 남근은 작게 표현됐고, 한홍수의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남근은 이를 압도하기 위해 크게 표현됐다.
또 다른 의미의 세 번째 미사일이 있다. 한국에서 채 한 살이 되기 전에 프랑스로 입양된 여류 작가 다프네 난 르 세르장의 ‘사드(SHAAD : Sad High Altitude Area Defense)’가 그것이다. 한국에 대한 그의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감동적이다. 영어 이니셜로 ‘사드(THAAD :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의 동음이의어 언어 유희로 작품 ‘사드’는 시작된다. 고래 싸움에서 한국을 보호하고 싶은 작가의 애정 어린 손이 드리워 있다. 작품 배경이 되는 지도는 일제의 폭압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독일 지도로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돼 있다. 일제나 외국의 정치적 외교적 침략에서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작가는 손으로 한반도를 감싸고 있다. 이처럼 한국뿐만 아니라 전쟁과 폭력의 위험 아래 있는 모든 나라와 희생자들에게, 작가의 손을 드리워 보호하고 치유하려는 마음은 예술의 가장 근본적이며 숭고한 본질이기도 하다.
0상의 꽃씨를 담은 신체
오마키 신지의 4개가 한 연작인 작품 ‘에코-크리스털화(Echoes Crystallization)’는 멀리서 보면 무언가가 반짝이는 하얀 추상화처럼 보인다.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면, 하얀 캔버스에 반짝이고 투명한 크리스털 가루로 마치 레이스로 수놓은 것처럼 꽃이 구상적으로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관람객은 그림으로 가까이 다가가다가 전시장 바닥에 반사된 꽃의 그림자를 밟게 된다. 희귀종인 이 꽃은 관람객의 발자국에 밟혀 사라진다. 아름다움과 호기심에 이끌려 다가갔다가 의도치 않게 생태를 파괴한다는 뜻을 담은, 의식 있는 일본 작가 오마키 신지의 작품이다. 이처럼 작품에서는 직접 신체가 재현되지 않으나, 관람객의 발자국이 작품의 주요 구성 요소가 됨으로써 작품이 전시장에서 완성된다는 현대미술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펑정지에의 ‘중국 여인 초상화 연작 B(Chinese Portrait B Series No.19)’에는 젊고 섹시하고 아름다운 중국 여성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여성의 외사시(外斜視) 눈동자는 관람객이 오래 바라보는 것조차 불편하게 만든다. 펑정지에 작품에 등장하는 이 완벽할 뻔한 여성은 이처럼 항상 외사시로 두 면을 본다. 예술과 자본, 고상함과 천박함, 고전(민속 예술과 언어)과 현대(대중 예술과 광고), 영혼과 육체, 이성과 감성, 삶과 죽음, 내면과 외면, 청색과 홍색 등 양쪽을 동시에 보려고 하다 보니, 펑정지에 그림 속 인물들의 눈은 자연스레 외사시가 된다. 이 고의적인 어색함과 불편함을 강조하는 펑정지에의 ‘외사시의 미학’은 사실 우리 현대인의 모습이다. 전시장에는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요제프 보이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굵고 낮게 울리며, 생전에 선보인 그의 퍼포먼스를 떠오르게 한다. 이외에도 한국의 산하를 닮거나 오래된 고목을 닮은 듯한 얼굴을 그린 권순철, 메디컬 스캐너를 이용해 사람 엄지 속에 디지털적인 산수화를 펼쳐놓은 그자비에 루케치, 울퉁불퉁한 물고기 얼굴로 사람을 형상화한 모로코 출신의 작가 사디 아피피, 인간의 제스처를 프랑스식 우아함으로 형상화한 알랭 클레몽, 알록달록 원색을 사용해 여성 신체의 경쾌함과 즐거움을 재현한 니키 드 생팔 등 모두 신체를 통해 작가들의 독특한 0상을 풀어나간다. 아예 주저앉아 명상하듯 오랫동안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들도 있다.
예술이 담당해야 할 본연의 역할을 되찾으려는 예술가들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미술을 둘러싼 지나친 상업화 풍토는 전 세계 예술가들과 예술 관계자들이 가장 심각하게 우려하는 문제 중 하나다. 예술이 본래의 역할을 되찾아야 한다고 모두 우려하지만, 출구 없는 방처럼 막막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많은 작가들이 지구상 여기저기에서 곤궁에 처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들의 이런 숭고한 의지를 모으고, 점점 더 상업화 양상을 띠어가는 미술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하자는 맥락에서, 올해 예외적으로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서는 작품을 판매하고 수익금의 일부를 유네스코에 기부한다. 작가들의 전적인 자유의사로 이뤄지는 이 기부는 광주미협이 모아 유네스코 본부에 작가들의 이름으로 전달한다. 0상의 씨앗과 같은 이 기부금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치유하거나, 그들의 교육이나 예술을 위해 쓰일 것이다. 그 덕분에 아름답고 진실한 0상의 꽃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활짝 피어나기를 바란다. 글 심은록(광주국제아트페어,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국제 파트 큐레이터)
‘빛 고을’ 광주는 이미 찬란한 역사를 지닌 예향의 도시지만, 20년 넘게 꾸려온 광주비엔날레를 중심으로 갈수록 풍부한 콘텐츠를 쌓아가고 있다. 올해 11회 광주비엔날레를 맞이한 이 도시에서는 오는 11월 6일까지 37개국 1백1명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인데, 같은 기간에 곳곳에서 다채로운 문화 예술 행사가 열려 아트 애호가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특히 탈아시아적인 축제에 걸맞게 지역만의 정체성이 드러나면서도 ‘글로벌한’ 면모가 눈에 들어오는 행사가 흥미롭다. 그중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펼쳐지는 광주비엔날레 특별전(8월 24일~11월 6일)의 국외 작가전인 <0상공화국>을 기획한 심은록 큐레이터가 직접 작품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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