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 플랫폼으로 쌓아가는 창조적 부(富)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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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 2025

글·인터뷰 고성연

방콕의 새 랜드마크 딥 방콕의 등장을 앞두고

어느 메트로폴리스든 하나의 색으로 말하기 힘들지만, 태국의 심장인 수도 방콕은 ‘무지갯빛’이라는 표현이 절로 나오는 도시다. 휘황찬란한 불교 사원들의 자태와 더불어 곳곳에서 ‘사람 냄새’ 나는 복작복작한 거리 풍경, 그리고 삐죽빼죽 치솟은 고층 건물들이 그리는 대조미가 묘한 앙상블을 이뤄내고, 자동차 행렬 속에 바이크가 무법자처럼 지배하는 러시아워에 걸리면 눈을 질끈 감아야 할 정도로 혼란스럽지만 ‘툭툭’으로 불리는 삼륜차의 형형색색 대열이 눈에 띄는 야경을 접하면 흥이 절로 돋고, 환상적인 미식으로 오감을 달래면 이내 모든 게 용서되어버린달까. 이렇듯 몹시도 역동적인 매력을 품고 있지만 동시대의 문화 예술을 담는 그릇인 ‘플랫폼’을 생각하면 아쉬운 감이 들었던 방콕에 눈여겨볼 만한 변화를 자아내는 참신한 공간들이 들어서고 있다. 특히 오는 연말께면 ‘방콕 최초의 글로벌 현대미술관’을 표방하는 딥 방콕(Dib Bangkok)이 대중에게 공개될 예정인데, 이 신선한 흐름을 이끌고 있는 인물을 지난 9월 초 ‘키아프×프리즈(Kiaf×Frieze)’ 서울 기간에 만나봤다. 예술경영지원센터(KAMS)가 키아프, 프리즈와 함께 기획한 토크 프로그램에 키아프 초청으로 참여한 딥 방콕 설립자 푸랏 (창) 오사타누그라(Purat (Chang) Osathanugrah, b.1993)가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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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졌다시피 ‘시장’만 놓고 봤을 때 팬데믹은 미술계에 악재가 아니었다. 물론 코로나19의 장막이 드리운 초반에는 대다수 행사가 취소되거나 연기되면서 급격히 얼어붙는 듯싶었지만 하늘길에만 제약이 드리웠을 뿐 소비 심리가 살아나면서 점차 ‘순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2년 차인 2021년부터는 도시나 지역마다 온도 차는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갈수록 열기를 띠면서 아트 페어들은 쾌재를 불렀다. 엔데믹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2022년 글로벌 미술계는 그동안 바깥으로는 마음껏 배출하지 못했던 에너지를 분출했다. 당시 초여름 독일 카셀에서 5년마다 열리는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행사인 도쿠멘타를 비롯해 베니스 비엔날레(아트), ‘원조 도시’인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아트 바젤(ABB) 등 다시금 맞이한 축제의 들뜬 분위기가 여실히 묻어난 현장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2022년은 플랫폼의 확장과 등장이 두드러진 해이기도 하다.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 3대 아트 페어로 꼽혔던 피악(FIAC)을 대체한 아트 바젤 파리(ABP)가 가을에 선보였다. 팬데믹 기간에는 아시아에서도 활기찬 변화의 기운이 꿈틀거렸다. 서울에는 키아프와 프리즈가 손을 잡고 9월 초 많은 이들을 들뜨게 하는 강력한 아트 페어 주간이 생겼고, 가을이 조금 익어갈 무렵이면 도쿄와 교토에서도 각각 아트 위크 도쿄(AWT), 아트 컬래버레이션 교토(ACK) 같은 행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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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기운이 싹트는 방콕의 아트 신
그렇다면 활발한 행보가 돋보이는 다음 주자는 어디일까? 올 들어 아시아의 문화 예술 생태계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도시를 하나 꼽는다면 단연 방콕이 아닐까 싶다. 특히 공공의 영역보다는 민간 주도의 흥미로운 아트 프로젝트가 활발히 꾸려지고 있어 더 눈길을 끈다. 먼저, 지난해 문을 연 방콕 쿤스트할레(Bangkok Kunsthalle)가 있다. 방콕 도심의 차이나타운에 불에 타버린 유서 깊은 7층짜리 대형 인쇄소 빌딩을 구조에는 거의 손대지 않은 채 독특한 분위기의 ‘아트 스페이스’로 탈바꿈시킨 사례인데, 한눈에 봐도 화마에 휩싸인 흔적이 역력해 누가 봐도 ‘탈(脫)화이트 큐브’적이라는 데 수긍할 만한 이 커다란 브루탈리즘 건축물은 다양한 국적의 아티스트들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면서 전시와 공연을 꾸리고 대담회를 여는 전천후 현대미술 공간으로 거듭났다. ‘과정=치유’가 되는 이 재생 프로젝트를 발동시킨 기관인 카오 야이 아트(Khao Yai Art)의 수장은 한국계 태국인 자선사업가이자 문화 예술 후원자인 마리사 찌아라와논(Marisa Chearavanont)이다. 그녀는 지난 2월 초 태국 동북부의 국립공원 인근에 오랫동안 방치된 땅을 사들여 ‘카오 야이 아트 포레스트’라는 방대한 ‘예술의 숲’ 조성 프로젝트를 역시 ‘치유’ 개념을 바탕으로 선보여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얼마 전 서울에서 마주친 그녀는 “우리의 행보를 글로벌 신에서 참신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운 좋게 방콕과 카오 야이를 방문해 현장을 생생하게 접한 필자는 “이건 시작”이라면서 앞으로 태국의 문화 예술 후원자들이 전개하는 프로젝트가 줄지어 나올 예정이라는 귀띔을 현지 관계자로부터 들었다. 무엇보다 오는 12월 중순께 방콕 도심에 선보일 현대미술관 딥 방콕(Dib Bangkok)이 여러모로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일단 건축과 컬렉션이 있다. 1980년대에 지은 강철 창고를 태국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쿨라팟 얀트라사스트(Kulapat Yantrasast)가 이끄는 WHY 아키텍처가 미니멀하면서도 인상적인 파사드가 특징인 3층짜리 미술관(약 7,600m² 규모)으로 거듭나도록 재설계했다. 소장품은 전 세계 2백 명 이상의 작가를 아우르는 1천여 점에 이르는데, 그중에는 우리나라 대표 작가 이불을 비롯해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알리차 크바데(Alicja Kwade) 등 쟁쟁한 이름도 포함돼 있다.
그리고 어쩌면 더 강력한 요인은 ‘오사타누그라’라는 ‘집안’ 배경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태국 현지에서 ‘레드불’보다 인기 있는 에너지 드링크 ‘M-150’을 생산하는 기업 오솟스파(Osotspa)를 소유하고 있는 데다 사립대인 방콕대학교(Bangkok University)를 운영하고 있기도 한 오사타누그라 가문에서 추진해온 프로젝트인 만큼 관심도가 남다르다. 단지 재계의 유명한 집안이어서만은 아니다. 2년 전 안타깝게도 고인이 되었지만 이 집안의 후계자 펫치 오사타누그라(1954~2023)는 단순한 기업가로서만 활약했던 게 아니라 아니라 전설적인 히트송까지 낸 뮤지션이자 예술을 사랑하는 ‘아티스트’였다. 오랫동안 미술품을 수집하면서 세상에 선사할 ‘예술 공간’을 공들여 준비해오던 그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이제 아들인 푸랏 (창) 오사타누그라(Purat (Chang) Osathanugrah)가 바통을 이어받아 부친의 열망 어린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다. 마침 그가 지난 9월 초 ‘키아프리즈’ 주간에 코엑스에서 열린 ‘특별전 연계 토크: 진열된 마음’ 세션에 패널로 참여하기 위해 서울을 찾았다. 태국에서 이름 앞에 붙는 존칭을 곁들여 ‘쿤(Khun) 창’으로 통하는 그와 글로벌 문화 예술 도시로서의 의미 있는 도약을 꿈꾸는 딥 방콕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를 나눠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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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with
푸랏 (창) 오사타누그라
딥 방콕(Dib Bangkok) 설립자·문화 예술 후원자


SY_ ‘쿤 마리사’의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계기로 오랜만에 방콕을 방문해 도시의 문화 예술 풍경을 접하고 범상치 않은 에너지를 느꼈습니다. 태국의 심장 같은 도시로서 방콕의 진짜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Chang_ 문화와 창의성 측면에서 방콕과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생각합니다. 방콕은 단순히 세계적인 관광지가 아닙니다. 방콕과 태국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두 문화권인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오래된 문화권의 용광로가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태국의 정체성으로 이어져왔습니다. 한 번도 식민지화되거나 완전히 서구화된 적 없는 태국은 풍부한 음식과 문화로 인기를 끌고 있는 흥미진진한 여행지죠.


SY_ 문화적인 플랫폼 도시로 성장해가는 방콕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Chang_ 방콕은 진정성과 생동감이 흐르는 도시입니다. 치밀한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아주 유기적으로 흘러가죠. 혼란스러운 에너지가 의미를 갖기 시작하고, 그 혼란스러운 에너지가 계획되지 않은 방식으로 하나로 모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현대의 문화 예술적 르네상스를 겪고 있다고 느낍니다. 정말 많은 훌륭한 프로젝트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프리즈 서울에 참여한 SAC 갤러리를 비롯해 방콕 시티시티, 노바 갤러리, 그리고 세계적인 태국 예술가 리크릿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가 주도하는 갤러리 VER, 쿤 마리사의 프로젝트 등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SY_ ‘날것 그대로의’ 또는 ‘자연스럽고 진정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딥(Dib)’이란 이름을 품은 새 미술관은 부친의 꿈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사립인데도 마치 공공의 역할을 하듯 방콕 최초의 현대미술관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네요.
Chang_ 과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희는 태국과 세계를, 그리고 세계와 태국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태국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기관, 일종의 ‘상수’ 역할을 하는 기관을 만들고 싶습니다. 깊은 예술 세계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관객을 양성하고, 예술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저희의 비전은 태국 사람들이 처음으로 국제 미술, 국제적인 서사와 의식을 보기 위해 비행기에 탈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교육적이고 역사적인 측면도 있고요. 하지만 관객을 깊은 수렁에 빠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현대미술을 세대를 초월해 누구나 쉽게 접하고 공감하며 소통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SY_ (그런 배경에서 볼 때) 방대한 컬렉션이 궁금합니다. 균형을 염두에 뒀겠지요?
Chang_ 딥 방콕을 만드는 건 여러 세대가 걸쳐 이뤄진 여정이었으며, 저는 가문의 문화적인 유산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되어 자랑스럽고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컬렉션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30년 넘게 수천 점의 작품을 소장해왔는데, 대부분은 해외 작가이고 일부는 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 격인 격인 몽티엔 분마(Montien Boonma)를 비롯한 태국 작가들의 작품입니다. 저희에게 이 수집의 여정은 더 깊고, 성찰적이고, 사색적이고, 명상적인 무언가를 향한 창문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는 치유의 여정이었죠.


SY_ 학계에도 소속된 만큼(방콕대학교를 이끄는 총장으로서), 미술관과 교육적인 연계 프로그램도 계획하고 있을지요?
Chang_ 그럼요. 제 생각에 많은 아시아 국가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국가적 유산인 예술과 공예, 기법을 창의성과 예술 전반에 접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양의 것을 배우지 않았고, 우리만의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방콕대학교의 사명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우리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갤러리, 기타 기관, 박물관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양 주도의 일원적 모더니즘이 아닌) ‘다원적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중시합니다. 다양한 사상과 현대적 실천이 이제 막 깨어나 수 세기 동안 각자의 문화나 국가의 예술적 실천에 존재해온 것을 활용하고 되살리는 다양한 모더니즘이 있으니까요.


SY_ 사실 현대미술은 흔히 난해하다고 핀잔을 듣기도 하는데, 태국 대중이 도시의 문화 예술적인 변화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합니다.
Chang_ 미술 박사 학위 소지자라면, 이미 깊이 파고들었다는 걸 알면서 (미술관에) 들어갑니다. 마치 예술계의 스쿠버다이버처럼 말이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직 수영을 배우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수영하길 바라지만, 그들을 깊은 수영장에 던져 넣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일반 관람객이 우리 박물관에 와서 “저 작품이 왜 좋은지 알지만, 제 취향은 아니에요”라고 말한다면, 저는 정말 기쁠 거예요. 그렇게 된다면 훨씬 더 많은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에게는 금전적 부를 넘어선 진정한 부(富)입니다. 문화적, 창조적 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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