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05, 2025
글 고성연(카오 야이, 방콕 현지 취재)
Exclusive Interview with 마리사 찌아라와논(Marisa Chearavanont)
태국 방콕에는 대중에 선보인 지 겨우 1년 남짓 된 ‘새내기 공간’이지만 지구촌을 누비는 아트 피플 사이에서 입소문으로, SNS 포스팅으로 빈번히 회자되는 독특한 아트 센터가 있다. 역동성을 논하자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듯한 이 활기 넘치는 메가 시티에서도 그 기운이 남다른 차이나타운에 자리한 방콕 쿤스트할레(Bangkok Kunsthalle). 한눈에 봐도 화마에 휩싸인 흔적이 역력한 커다란 브루탈리즘 건축물을 보금자리로 작년 1월 문을 연 이 공간은 현대미술 전시와 강연, 퍼포먼스, 영화 상영 등 다채로운 활동이 펼쳐지는 전천후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실 ‘탈(脫) 화이트 큐브’를 외치는 한 축의 흐름 속에서 재생 건축을 내세운 전시 공간이라면 그다지 새로울 게 없겠지만, 방콕 쿤스트할레의 경우엔 거의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을 지닌 채 묘한 오라를 뿜어내면서 비범한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모양새다. 그 배경에는 한국계 태국인 자선사업가이자 문화 예술 후원자 마리사 찌아라와논(Marisa Chearavanont)이 2023년 말 설립한 비영리 기관 카오 야이 아트(Khao Yai Art)가 버티고 있기에 세간의 이목을 더 끌었는지도 모르겠다. 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CP그룹 회장의 아내이자 CP그룹 특별 고문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한 그녀가 사업, 교육, 음식, 문화 예술 등의 영역을 아우르며 4개 재단을 이끄는 의미 있는 행보를 보여온 인물이어서다. 그리고 다시 1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난 2월 초 마리사 찌아라와논은 예술가들의 또 다른 성지가 될 법한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태국 동북부의 국립공원 인근에 터를 잡은 ‘카오 야이 아트 포레스트(Khao Yai Art Forest)’라는 ‘예술의 숲’ 조성 프로젝트다. 방콕과 카오 야이를 오가는 여정 속에서 마리사 찌아라와논을 만났다.
태국의 아트 신을 변모시키는 인생 프로젝트
“저는 결혼한 이래 30년에 걸쳐 마치 커리어 중 하나처럼 ‘프로 맘’으로 지냈어요. 태국에서 살다가 (4명의 자녀를 키우면서) 홍콩으로 건너가 21년간 지냈고 다시 태국에 온 지 8년이 되었죠. 막내까지 대학에 보내고 나서 오롯이 저만의 개인적인 여정에 집중하는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꾸리려고 합니다.” 태국에서 이름 앞에 붙는 존칭을 곁들여 ‘쿤(Khun) 마리사’로 통하는 마리사 찌아라와논(Marisa Chearavanont) 이사장은 “전격적인 아트 컬렉터로서 지낼 시간은 없었지만 그런 바쁜 삶 속에서도 늘 예술을 사랑해왔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그녀가 자녀 교육과 내조에 열성이면서 사업 감각도 겸비한, 가녀린 인상이지만 은근한 에너지를 지닌 인물로 평가한다. 언뜻 ‘배경’만 생각하면 화려한 사교계 활동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홍콩에서 20년 넘게 지냈어도 자신의 개인사를 별로 드러내지 않는 ‘로키(low-key)’ 유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인생의 장을 새롭게 열게 한 두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방콕-카오 야이 여정에 참가한 다국적 기자들은 예술 콘텐츠만큼이나 베일에 감춰진 듯한 그녀의 면면을 궁금해하기도 했다. 마리사 이사장은 태국 국적이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1982년 뉴욕으로 떠난, 당시에는 드문 여성 유학생(한국 이름 강수형)이었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랐지만 한국에서만 지내기엔 왠지 답답하게 느껴졌고, 당연히 외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해 유학 준비를 했다”는 그녀는 경영을 공부하며 같은 뉴욕대(NYU)를 다녔던 남편 수파킷(Soopakij) 찌아라와논(현재 CP그룹 회장)을 만나 결혼했다. 한국에서는 집안의 혼사로 화제가 된 적이 있고(2022년 그녀의 장남이 백범 김구 선생의 증손녀와 결혼했다) ‘길거리 식당’에서 탄생한 태국의 유명 미슐랭 셰프 제파이와 농심의 협업을 도모하는 등 물밑에서 ‘가교’ 역할도 했지만 글로벌 무대에서는 자선이나 후원으로 은은하게 자취를 남겼던 그녀가 이제 자신의 문화 예술 프로젝트를 내걸고 ‘소통’에 나선 것이다. “‘엄마’라는 존재는 DNA가 달라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이제는 온전히 저 자신으로서 사회에 그동안 받은 것들을 돌려주고 싶은데, 한국인으로 태어나 이렇게 태국에 머무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카오 야이 아트 포레스트 (Khao Yai Art Forest)
평평한 논밭에 사뿐히 앉은 거미 조각 ‘마망’
어째서 ‘숲’이었을까? 누구나 떠올릴 만한 궁금증에 대해 그녀는 팬데믹으로 얻은 ‘치유로서의 깨달음’이 그 계기였다고 설명했다. 울창한 국립공원이 광활하게 펼쳐진 카오 야이에 CP그룹의 연수원과 가족 별장도 있기에 코로나19 기간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는데, 답답한 가운데 자연이 선사하는 치유로 견딜 수 있었다는 얘기다. “가상의 환경이 팽배한 시대에 우리는 서로 소외된 채 공허한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잖아요. 그 때문에 흙을 만지고, 밟아야 하고, 자연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카오 야이에서 작가들이 자연에서 받은 영감을 재료로 삼은 작업을 세상과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이런 배경에서, 지난해 1월 먼저 방콕 쿤스트할레(Bangkok Kunsthalle)를 선보이기는 했지만 마리사 찌아라와논은 ‘예술의 숲’ 부지를 사들인 건 4년 전쯤이라고 한다. ‘아트 숲’ 부지는 사실 ‘사연 있는 땅’이다. 1970년대 큰 홍수가 나면서 살 곳을 잃은 이주민이 정착하면서 벌목이 횡행하는 바람에 곳곳에서 오랫동안 방치된 황폐한 모양새가 눈에 띄는, 건조해서 작물을 경작하기도 까다로운 땅이어서다. 하지만 그녀는 “이 창을 발견한 건 축복”이라면서 예술을 매개체로 땅을 보듬으면서 모두가 ‘치유’받을 수 있는 터전이 되기를 희망했다(그래서 ‘식림’에 전격 나서고 있기도 하다). 모성애를 바탕으로 한 강인한 수호천사로서의 상징성을 지닌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의 거미 조각 ‘마망(Maman)’이 카오 야이 아트 포레스트의 개막에 맞춰 등장한 모습이 자연스러운 그림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연두색 바탕에 황토빛이 깃든 논밭 위에 8개의 다리를 단단히 뻗은 마망의 모습은 또 다른 감동을 준다. 향후 이 숲은 마리사 이사장이 재단 활동을 통해 쌓아온 식문화, 교육, 그리고 자연 친화적 숙박까지 아우르는 플랫폼으로 진화할 예정이다.
“진정한 삶의 지혜는 일상의 기적을 보는 데 있다”_펄 벅
자연과 호흡하며 대지를 지키는 수호천사들
흔히 상상하는 “예쁜 숲은 (아직) 아니다”라는 경고(?)를 미리 들었지만, 실제로 카오 야이 아트 포레스트(Khao Yai Art Forest)는 녹음이 눈부시도록 짙고 창창하게 드리워져 있거나 시원한 그늘이 많은 울칭한 숲의 정석은 아니었다. 커다란 원형 탁자에 둘러앉아 흙을 직접 만지며 놀이처럼 즐기는 간단한 세션으로 자연과 교감하고는 숲의 이모저모를 볼 수 있는 곳곳에 흩어진 여러 작가의 작품(현재 7개 작업이 있다)과 만나는 ‘예술 산책’에 나섰다. 아무리 뜨거운 태양을 품고 있는 태국 땅이라지만 엄연히 겨울인데도 땀방울이 송송 맺힐 정도로 ‘끈기’과 ‘체력’을 요했다. 그래도 정작 하나하나의 작품을 마주하면 절로 샘솟는 즐거움으로 보상이 되어버린다. 커다란 2개의 돌로 구성된 프란체스코 아레나(Francesco Arena)의 2024년 작품 ‘GOD’, 불교의 전통을 반영해 스투파(사리탑)를 현대식으로 해석한 태국 작가 우밧사트(Ubatsat)의 작품 ‘Pilgrimage to Eternity’(2024), 산 중턱 언덕 위에 올라가면 탁 트인 전망을 선사하는 영국 대가 리처드 롱의 1988년 작품 ‘마드리드 서클(Madrid Circle)’, 최근 서울 APMA에서 개인전을 열어 한국에서도 더 익숙해진 듀오 엘름그린&드라그셋의 최신작으로, ‘알코올 사랑’으로 사망한 마르틴 키펜베르거의 그림을 내건 빈티지 바 콘셉트의 익살스런 공간을 연출한 ‘K-BAR’(2024), ‘안개 조각’으로 유명한 나카야 후지코(Fujiko Nakaya)의 장소 특정적 설치 작품 ‘Fog Landscape #48435’ 등이 있다. 올해 91세의 노익장을 뽐내는 나카야 후지코는 직접 개막식에 참여했는데, 이 작품의 원조가 되는 ‘안개 작업’을 처음 선보인 곳이 1970년 오사카 엑스포였지만 물방울이 맺힌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다시 전시할 공간을 찾지 못했다는 에피소드도 풀어내 미소를 자아냈다. 혹시라도 이 숲을 찾는다면 ‘야경’을 챙겨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미처 감상하지 못했던 영상 작품 ‘Two Planets’(2008)를 오붓하게 숲에서 감상하는 묘미를 즐긴 뒤 숙소로 향하는데, 그 육중한 거미 조각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밤하늘에 쏟아질 듯 별들이 빛나는 자태 속 적막이라니…. 침묵은 그 어떤 노래보다 더 음악적이라고 한 문구는 바로 이런 순간을 두고 써 내려가지 않았을지.
1 태국 카오 야이 아트 포레스트에 설치된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의 거미 조각 ‘Maman’(1999). © The Easton Foundation/VAGA at ARS, NY. Photo by Andrea Rossetti. 카오 야이의 태국어 버전인 ‘SilaPaa’는 ‘아트+숲’이라는 뜻.
2 비영리 재단인 카오 야이 아트 설립자 마리사 찌아라와논(Marisa Chearavanont) 이사장이 지난 2월 초 열린 개막식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3 예술과 자연과 함께하는 ‘치유’를 지향하는 마리사 찌아라와논. Courtesy Khao Yai Art.
4 Francesco Arena, GOD, 2024, 260×220×620cm, Stones, Khao Yai Art Forest, Courtesy Khao Yai Art. Credit of the artist.
5 마리사 이사장이 저명한 ‘판자(Panza) 컬렉션’ 일부를 인수하면서 소장하게 된 리처드 롱(Richard Long)의 작품 ‘마드리드 서클’(1988).
6 Richard Long, Madrid Circle, 1988, 1160×1160cm, Stones, Khao Yai Art Forest, Courtesy Khao Yai Art.
7 Fujiko Nakaya, Khao Yai Fog Forest, Fog Landscape #48435, 2024, Khao Yai Art Forest.
8 Elmgreen & Dragset, K-BAR, 2024, 395×610×760cm, Mixed Media, Khao Yai Art Forest.
9 Araya Rasdjarmrearnsook, Two Planets Series, 2007, 200×250cm, Video installation, Khao Yai Art Forest.
10 Ubatsat, Pilgrimage to Eternity, 2024, Dimensions Variable, Site-specific Sculpture, Khao Yai Art Forest.
※ 2, 5 Photo by 고성연
※ 6, 10 Courtesy Khao Yai Art, Photo by Krittawat Atthsis and Puttisin Choojesroom.
※ 7~9 Courtesy Khao Yai Art, Photo by Andrea Rossetti.
2 비영리 재단인 카오 야이 아트 설립자 마리사 찌아라와논(Marisa Chearavanont) 이사장이 지난 2월 초 열린 개막식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3 예술과 자연과 함께하는 ‘치유’를 지향하는 마리사 찌아라와논. Courtesy Khao Yai Art.
4 Francesco Arena, GOD, 2024, 260×220×620cm, Stones, Khao Yai Art Forest, Courtesy Khao Yai Art. Credit of the artist.
5 마리사 이사장이 저명한 ‘판자(Panza) 컬렉션’ 일부를 인수하면서 소장하게 된 리처드 롱(Richard Long)의 작품 ‘마드리드 서클’(1988).
6 Richard Long, Madrid Circle, 1988, 1160×1160cm, Stones, Khao Yai Art Forest, Courtesy Khao Yai Art.
7 Fujiko Nakaya, Khao Yai Fog Forest, Fog Landscape #48435, 2024, Khao Yai Art Forest.
8 Elmgreen & Dragset, K-BAR, 2024, 395×610×760cm, Mixed Media, Khao Yai Art Forest.
9 Araya Rasdjarmrearnsook, Two Planets Series, 2007, 200×250cm, Video installation, Khao Yai Art Forest.
10 Ubatsat, Pilgrimage to Eternity, 2024, Dimensions Variable, Site-specific Sculpture, Khao Yai Art Forest.
※ 2, 5 Photo by 고성연
※ 6, 10 Courtesy Khao Yai Art, Photo by Krittawat Atthsis and Puttisin Choojesroom.
※ 7~9 Courtesy Khao Yai Art, Photo by Andrea Rossetti.
방콕 쿤스트할레(Bangkok Kunsthalle)
날카롭게 치솟은 고층 건물과 럭셔리 호텔이 즐비한 가운데, 바이크와 ‘툭툭’으로 불리는 삼륜차의 형형색색 대열이 묘한 감흥을 일으키는 방콕. 어떤 도시든 짧은 스침만으로 하나의 색으로 예단할 수는 없지만 방콕은 ‘무지갯빛’이라는 표현이 절로 나오는 도시다. 곳곳에 예스러움과 첨단이 공존하고 때로는 섞이면서 세세한 다른 색조로 물들어가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묻어난다. 이 ‘오색찬란한’ 모든 조합의 역동성이 단연 빼어난 차이나타운(야왈랏)에 자리한 방콕 쿤스트할레는 불과 1년여 만에 다국적 방문객을 이끄는 도심의 랜드마크로 부상했다. 이채로운 외관 덕만 보는 단순한 명소가 아니라 현대미술을 아주 유연하게 담아내는 전천후 그릇 역할을 하면서 말이다.
처참히 불타버린 인쇄소의 찬란한 부활
2001년 일어난 몹쓸 화재로 말미암아 골조만 남기고 거의 불타버린 유서 깊은 방콕 차이나타운의 7층짜리 대형 인쇄소 빌딩(Thai Wattana Panich). 마리사 찌아라와논이 거친 듯 꾸밈없는 브루탈리즘 건축 미학이 엿보이는 이 안타까운 건물을 자신의 꿈과 비전을 담을 방콕의 문화 예술 플랫폼으로 염두에 두고 있을 때 사실 그녀의 주위에서는 그리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불에 그을리고 연기가 밴 흔적이 역력한 벽과 기둥만이 남아 ‘흉물’로 여겨지는 신세였다. 그런데 카오 야이 아트 포레스트를 추진하는 마리사 찌아라와논 이사장의 창조적 여정에 동참하려고 멀리 스위스에서 방콕으로 이주한 스테파노 라볼리 판세라(Stephano Rabolli Pansera)는 이 앙상하지만 특유의 오라가 살아 있는 건축물을 보고는 눈빛을 반짝이며 한마디 내뱉었다. “바로 이거네요(That’s it!)”라고. 그렇게 2023년 건물을 매입하고 이듬해 초 바로 방콕 쿤스트할레의 문을 열었다.
방콕과 카오 야이 아트 포레스트를 마리사 이사장과 함께 이끄는 판세라 관장(director)은 이탈리아 태생으로 영국 런던의 건축 명문 AA스쿨을 졸업한 건축가 출신으로 명성 자자한 HdM(서울 도산대로에 있는 아트 센터 ‘송은’을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 스튜디오)을 거쳐 특이하게도 갤러리(하우저앤워스) 경력도 쌓은 흥미로운 커리어의 소유자다(심지어 2013년 앙골라 국가관으로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기도 했다). 스테파노 관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24년 동안 스며든 연기와 빗자국이 선연한’ 이 문화유산에 거의 손대지 않은 채 예술가들이 자유자재로 공간을 활용하도록 허용하는 아트 센터를 의도했기에 이토록 발빠르게 움직일 수 있기도 했다. ‘백지수표’같이 전권을 주는 일종의 ‘카르트 블랑시(carte blanche)’ 전시를 지향하는 방콕 쿤스트할레의 포문을 연 첫 작가는 영상 작업을 주로 하는 프랑스 출신의 미셸 오데르(Michel Auder)였다.
방콕과 카오 야이 아트 포레스트를 마리사 이사장과 함께 이끄는 판세라 관장(director)은 이탈리아 태생으로 영국 런던의 건축 명문 AA스쿨을 졸업한 건축가 출신으로 명성 자자한 HdM(서울 도산대로에 있는 아트 센터 ‘송은’을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 스튜디오)을 거쳐 특이하게도 갤러리(하우저앤워스) 경력도 쌓은 흥미로운 커리어의 소유자다(심지어 2013년 앙골라 국가관으로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기도 했다). 스테파노 관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24년 동안 스며든 연기와 빗자국이 선연한’ 이 문화유산에 거의 손대지 않은 채 예술가들이 자유자재로 공간을 활용하도록 허용하는 아트 센터를 의도했기에 이토록 발빠르게 움직일 수 있기도 했다. ‘백지수표’같이 전권을 주는 일종의 ‘카르트 블랑시(carte blanche)’ 전시를 지향하는 방콕 쿤스트할레의 포문을 연 첫 작가는 영상 작업을 주로 하는 프랑스 출신의 미셸 오데르(Michel Auder)였다.
예술가의 작업, 공간을 치유하고 성장시키다
“건물을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굳이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리사 찌아라와논의 설명처럼 그들은 깨진 유리창이나 쓰레기를 치우고 전원, 수도 등 필수적인 시설을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게 넣었을 뿐 공간 자체는 거의 건드린 게 없다. 있는 그대로 예술가들의 창조적인 손길과 호흡으로 건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자연스럽고 유기적인 ‘치유’ 과정에 다름 아니다. 마리사 이사장이 카오 야이에 자리 잡은 ‘예술의 숲’과 방콕 쿤스트할레가 ‘치유’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고 거듭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사실 필자는 하얀색 입방체의 전시 공간이 주를 이루는 현대미술 생태계에서 ‘탈 화이트 큐브’를 표방하고자 했던 영리한 전략적 노림수가 아닌가 생각도 했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지닌, 그리고 길가의 행인이나 시장의 상인도 스스럼없이 드나드는 자유로움이 흐르는 공간을 웅시하면서 자연스러운 ‘치유’에 대한 지향점에 일치함을 수긍하게 됐다. “모든 건축물엔 영혼이 깃들어야 한다”고 위대한 건축가 루이스 칸도 말하지 않았던가.
평화를 꾸준히 지향해온 전위예술가 오노 요코(Yoko Ono)가 1960년대 런던에서 깨진 도자기들을 관람객들과 함께 수선하는 참여형 전시로 선보였던 ‘멘드 피스(Mend Piece)’가 이곳에서 얼마 전 재현된 사례도 이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또 현재 이 공간을 수놓고 있는 중국계 태국 작가 탕창(Tang Chang, 1934~1990) 전시도 비슷한 맥락에서 마음을 잡아끈다. 작가의 아틀리에에서 잠자고 있던 ‘서체 추상’ 작업을 복원하는 과정을 엿볼 수도 있는 전시인데, 그 작업에 6개월 정도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스테파노 관장은 이 독특한 전시 공간의 정체성을 ‘길들이기(domestication)’를 통한 치유 개념으로도 설명한다. “복원(restoration)은 일방적이지만 길들이기에는 상호작용이 따르잖아요. 어찌 보면 ‘반건축(anti-architecture)’적이기도 하지만, 방콕 쿤스트할레는 이러한 치유의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는 창조의 장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치유’, ‘힐링’이라는 단어를 참으로 쉽게 던지지만, 인류의 문화유산을 끌어안고 보듬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 내면의 회복이란 무엇일까. 로마 콜로세움을 떠올리게 하는 운치를 지닌 루프톱에 올라 차이나타운의 역동적인 풍경을 눈에 담고 있노라니, 여러 단상이 스친다.
평화를 꾸준히 지향해온 전위예술가 오노 요코(Yoko Ono)가 1960년대 런던에서 깨진 도자기들을 관람객들과 함께 수선하는 참여형 전시로 선보였던 ‘멘드 피스(Mend Piece)’가 이곳에서 얼마 전 재현된 사례도 이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또 현재 이 공간을 수놓고 있는 중국계 태국 작가 탕창(Tang Chang, 1934~1990) 전시도 비슷한 맥락에서 마음을 잡아끈다. 작가의 아틀리에에서 잠자고 있던 ‘서체 추상’ 작업을 복원하는 과정을 엿볼 수도 있는 전시인데, 그 작업에 6개월 정도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스테파노 관장은 이 독특한 전시 공간의 정체성을 ‘길들이기(domestication)’를 통한 치유 개념으로도 설명한다. “복원(restoration)은 일방적이지만 길들이기에는 상호작용이 따르잖아요. 어찌 보면 ‘반건축(anti-architecture)’적이기도 하지만, 방콕 쿤스트할레는 이러한 치유의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는 창조의 장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치유’, ‘힐링’이라는 단어를 참으로 쉽게 던지지만, 인류의 문화유산을 끌어안고 보듬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 내면의 회복이란 무엇일까. 로마 콜로세움을 떠올리게 하는 운치를 지닌 루프톱에 올라 차이나타운의 역동적인 풍경을 눈에 담고 있노라니, 여러 단상이 스친다.
1 방콕 쿤스트할레 건물 외관. 도심의 차이나타운에 70년 넘게 터를 지키고 있던 인쇄소 건물을 작가들이 자유롭게 창조적 플랫폼으로 바꿀 수 있는 유동적인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비영리 아트 센터. Photo by Andrea Rossetti, Courtesy of Khao Yai Art
2, 4 방콕 쿤스트할레 건물 외관과 입구.
3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방콕 쿤스트할레의 옥상 위에서 포즈를 취한 마리사 찌아라와논과 스테파노 라볼리 판세라 관장.
5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엠마 맥코믹 굿하트(Emma McCormick Goodhart)의 커다란 네온 작품 ‘glai glaai’. 화마를 입은 과거에서 솟아나는 미래적인 감성이 대조미를 이룬다.
6 태국의 젊은 작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Korakrit Arunanondchai) 의 지난해 전시 설치 모습. 한국에서도 아트선재센터, 국제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선보인 작가다.
7 미국 작가 리처드 노나스(Richard Nonas) 전시 풍경. 2025년 1월 10일~3월 30일.
8 20세기의 저명한 시인이자 미술가였던 중국계 태국 작가 탕창(Tang Chang) 전시 설치 모습. 마리사 이사장의 아들 마크 찌아라와논이 큐레이터로 참여한 전시이기도 하다. 오는 7월 13일까지.
9 지난해 여름 개막해 큰 호평을 받았던 오노 요코(Yoko Ono, b. 1933) 전시 모습.
10 스테파노 라볼리 판세라 관장의 모습. 방콕의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차이나타운의 묘한 아트 센터에 있는 스테파노를 만나라는 조언이 우스갯소리처럼 나올 정도로, 방콕 쿤스트할레는 탄생한 지 약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비상한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Photo by Andrea Rossetti
※ 2~4, 8 Photo by 고성연
※ 1, 5~7, 9, 10 이미지 제공_방콕 쿤스트할레 www.khaoyaiart.com
2, 4 방콕 쿤스트할레 건물 외관과 입구.
3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방콕 쿤스트할레의 옥상 위에서 포즈를 취한 마리사 찌아라와논과 스테파노 라볼리 판세라 관장.
5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엠마 맥코믹 굿하트(Emma McCormick Goodhart)의 커다란 네온 작품 ‘glai glaai’. 화마를 입은 과거에서 솟아나는 미래적인 감성이 대조미를 이룬다.
6 태국의 젊은 작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Korakrit Arunanondchai) 의 지난해 전시 설치 모습. 한국에서도 아트선재센터, 국제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선보인 작가다.
7 미국 작가 리처드 노나스(Richard Nonas) 전시 풍경. 2025년 1월 10일~3월 30일.
8 20세기의 저명한 시인이자 미술가였던 중국계 태국 작가 탕창(Tang Chang) 전시 설치 모습. 마리사 이사장의 아들 마크 찌아라와논이 큐레이터로 참여한 전시이기도 하다. 오는 7월 13일까지.
9 지난해 여름 개막해 큰 호평을 받았던 오노 요코(Yoko Ono, b. 1933) 전시 모습.
10 스테파노 라볼리 판세라 관장의 모습. 방콕의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차이나타운의 묘한 아트 센터에 있는 스테파노를 만나라는 조언이 우스갯소리처럼 나올 정도로, 방콕 쿤스트할레는 탄생한 지 약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비상한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Photo by Andrea Rossetti
※ 2~4, 8 Photo by 고성연
※ 1, 5~7, 9, 10 이미지 제공_방콕 쿤스트할레 www.khaoyai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