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다운 ‘아트 신(scenes)’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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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05, 2024

글 고성연 ㅣ 사진 고성연 ㅣ 이미지 제공_Fubon Art Museum

새롭게 꿈틀거리는 현대미술 풍경 속 2, 3세대 동력

지구촌 어디를 가든 문화 예술에 초점을 맞춘 채 ‘도시 산책’을 하다 보면 자괴감이 들 때가 더러 있다. ‘타지인이 몇 차례 둘러본다고 해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아무리 작은 나라, 작은 도시여도 마찬가지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 정치 경제사의 굴곡, 문화 예술적 토대와 트렌드를 어찌 단시일에 꿰뚫을 수 있겠는가. 면적은 한반도의 6분의 1인데도 유난히 높고 푸르른 산을 많이 거느린 작은 섬나라 ‘타이완(Taiwan)’ 역시 그러하다. 처음에는 그저 수수해 보이고 맛난 먹거리가 꽤 많은 ‘내 친구의 나라’였는데, 알면 알수록 새로운 매력이 보이고, 젠체하지 않는 태도와 외양, 허세 깃든 낭비를 줄이고 내실을 다지는 문화, 자유롭고 진보적인 정신을 추구하는 지적 토양에 갈수록 더 호감을 품게 된다. 그래도 도시의 속살을 조금은 들여다본 듯한 이 시점에서 한층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대만 문화 예술계의 흐름을 짚어본다.


세상에는 첫눈에 경탄을 금치 못하거나 심지어 살짝 기가 죽을 것만 같은 화려함을 지닌 도시가 있고, 메트로폴리스는 대개 그런 위용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비하면 타이베이는 건물들이 높지 않고 도시 전체의 채도가 낮아서인지 차분함이 느껴지는 도시다. 대만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는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높다지만 규모 자체가 3백만 명도 되지 않으므로 서울과 비할 바는 아니다. 그래도 도심의 상업 지구에는 눈요기가 되어주는 고층 건물들이 몰려 있는데, 바로 이 도시의 상징적인 랜드마크인 타이베이 101이 자리하고 있기도 한 금융 지구 신이(Xinyi)구다. 지난 5월 초 타이베이 당다이 페어가 막을 올리는 주간에 맞춰, 이 지구에는 새로운 문화 예술 플랫폼으로 중요하게 자리매김할 것으로 여겨지는 사립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스페인 작가 하우메 플렌사의 커다란 조각을 야외 광장에 두고 있는 푸본 아트 뮤지엄(Fubon Art Museum)이다. 10,000m2 면적의 5층짜리 흰색 건축물은 세계적인 건축 거장인 렌초 피아노(Renzo Piano)가 이끄는 RPBW가 맡아 일찌감치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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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인상주의 전시와 수려한 소장품전으로 대중 앞에 나서다
금융 기업인 푸본 그룹은 28년에 걸쳐 ‘예술이 삶이고, 삶이 예술’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푸본 아트 재단을 운영해왔다. 그룹의 2세대 경영자인 차이밍싱(Richard Tsai)과 그의 부인이자 푸본 아트 뮤지엄 관장인 매기 웽(Maggie Ueng)은 대만의 내로라하는 컬렉터 부부다. 예술에 대한 그들의 열정이 결국 미술관 설립으로 이어졌고, 많은 이들의 궁금증 속에서 개관전을 선보였는데, 미국 LACMA와의 협업으로 꾸린 기획전 <True Nature: Rodin and the Age of Impressionism>과 6인의 작가를 소개한 재단 소장품 전시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과 모네, 르누아르 같은 인상주의 작가들의 조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산유(Sanyu), 왕후와칭(Wang Huaiqing), 폴 치앙(Paul Chiang), 자우키(Zao Wou-Ki), 윤지(Yun Gee), 수샤오바이(Su Xiaobai) 등 아시아 거장들의 수작을 선보인 소장품전이 더 눈길을 끈다. “이제 남쪽에는 치메이 뮤지엄(기업가가 지역 주민들을 위한 미술관을 지은 대표적인 예인 타이난의 미술관), 북쪽에는 푸본이 있다”는 표현을 스스로 하는 만큼 앞으로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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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문화화’가 사회ㆍ문화적 흐름이 되어버린 작금의 시대에 창의적인 기업의 아트 스페이스를 목격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이도 경쟁이 되어버린 마당에 그 흐름을 이끄는 주체들은 단지 즐거운 일만이 아니라 내공과 자존심이 걸린 승부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팬데믹 전 타이베이를 찾았을 때 경쾌하게 체험한 공간이 있는데, 커다란 눈사람 모양의 조각이 입구가 있는 야외 공간에 공공 미술처럼 버티고 있는 주트 아트 뮤지엄이다. 부동산 개발업체인 주트 랜드 디벨로프먼트(Jut Land Development)의 창립 30주년, 그리고 예술과 건축을 위한 재단인 JFAA의 설립 10주년을 기념해 회사 헤드쿼터 건물 옆에 2016년 문을 연 작은 미술관이다. 건축가는 아오키 준(Jun Aoki). ‘미래의 미술관’이라는 제목의 개관전을 한 이래 크게 ‘미래(future)’, ‘도시 건축(urban architecture)’, 그리고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의 세 축으로 전시를 꾸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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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일터와 일상적인 삶의 곁으로!
재단을 이끄는 CEO이자 주트 그룹의 부회장인 애런 리(Aaron Lee)는 그룹의 2대 경영자이지만 현대미술과 건축에 대한 투자는 1세대인 문화 예술 애호가다. 미술관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으나 타이베이 당다이 페어 덕분에 바로 옆 건물인 회사 내부의 컬렉션과 영감 만발한 시설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로비부터 레피크 아나돌(Refik Anadol)의 설치 작품이 빛을 발하는 이 일터는 층마다 작은 감탄사를 내뱉게 하거나 미소를 짓게 하는 앙증맞은 구성으로 기업 문화를 궁금하게 할 정도로 호응을 이끌어냈다. 예컨대 MVRDV가 인테리어를 맡은 240m2 규모의 강연 홀은 천장이며 바닥이며 초록색 카펫으로 뒤덮여 있는데, 대만의 녹음 짙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알렉산드라 케아요글로우(Alexandra Kehayoglou)의 커미션 작품이란다. 창의적인 부동산 개발업체답게 회사 내에 다국적 작가들와 협업해 완성한 작품(대부분 ‘커미션’ 작품)과 센스 있는 오브제가 여기저기 눈에 띄는 디자인 회사, 도서관, 요가실, 휴게실 등이 자리한다. 현재 타이베이 외곽에 또 다른 미술관을 준비 중이라는 애런 리는 “앞으로 10년에 걸쳐 공간의 제약을 뚫고 작은 미술관을 20개 정도 짓는 게 목표”라며 수집가들의 소장품에 보금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사업 포트폴리오로 구상하는 계획을 내비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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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파운데이션(Hong Foundation),묵묵하게 기관 역할을 하다
아직도 대만이 계엄령에 갇혀 있을 시절인 1971년 설립된 재단인 홍 파운데이션. 무려 반세기가 넘도록 교육과 문화 예술에 초점을 둔 다양한 활동을 해온 이 재단은 파나소닉 타이완이 된 가전 회사인 궈지파이(Guojipai, 國際牌) 집안이 후원한다. 현재 그룹 창립자의 3대손 며느리인 건축가 그레이스 층(Grace Cheung)이 재단을 이끌고 있는데, 지원 사업의 결이 비상업 예술을 주로 다루는 공공 기관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다. 2014년부터는 직접 후원을 하거나 커미션 프로젝트를 통한 대만 작가 양성 등 동시대 미술계에 보탬이 될 만한 영향력 있는 프로그램에 초점을 맞춰오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창의력 넘치는 작가에게 1백만 대만달러를 상금으로 제공하는 퉁충 프라이즈(Tung Chung Prize)의 제정이다. 그래서 전시 자체도 권위 있는 비상업 공간으로 주로 이뤄진다(재단의 독자적인 전시 공간도 새롭게 지을 예정이다). 예컨대 현재 홍 파운데이션이 진행하는 전시 중 하나인 <Ghost in the Sea>도 광주비엔날레에 국가 파빌리온으로 참여했던 대만 동시대문화실험장(C-LAB)의 공간에서 펼쳐지고 있다. 올해는 타이베이 당다이의 파트너로도 참여했는데, 상업적인 아트 페어에서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름의 ‘벽’을 세운 방을 만들어 전시했다. 해커 출신의 작가 청셴위(Cheng Hsien-Yu)의 ‘Credit Makes You Free’ 라는 작품인데, 신용카드를 기계에 넣으면 예술가들을 위한 ‘아티스트 피’(fee)’가 높아지는 재미난 발상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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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싱 아트 플레이스(Winsing Art Place), 문화 예술 서적의 보고이자 전시 공간
4년 전 타이베이 당다이 아트 페어를 찾았을 때 문화 예술 공간 탐방에 나섰다가 찾은 작은 보석 같은 공간이 있다. 요즘 티나 켕, 타오 아트 같은 대만의 주요 갤러리들이 들어서 있는 네이후 지구에 자리한 윈싱 아트 플레이스(Winsing Art Place). 직전 해인 2019년 여름 문을 연 이 비영리 문화 예술 플랫폼은 깔끔하고 우아한 전시장과 함께 카페, 서점 등이 들어서 있는 2층짜리 아담한 공간으로 단번에 눈을 사로잡았다. 부동산 개발업체인 윈싱 디벨로프먼트 컴퍼니 회장의 딸로 현대미술 애호가인 제니 여(Jenny Yeh)가 운영하는 곳으로 개관전으로 더그 에이킨(Doug Aitken), 두 번째 전시로 양혜규 개인전을 열었고, 2020년 당시에는 베트남계 덴마크 작가인 자인 보(Danh Vo⁻) 개인전을 진행 중이었다. 올해 당다이 페어 기간에는 멕시코 현대미술 거장 가브리엘 오로스코(Gabriel Orozco)의 조각, 설치, 회화 등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개인전이 소규모로 열리고 있었다. 제니 여는 현대미술 수집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시점인 2018년 윈싱 아츠 재단(Winsing Arts Foundation)을 설립했는데, 미술과 건축, 환경, 등의 균형 잡힌 발전을 도모하고 사람들과 땅, 개인과 개인 사이의 연결을 촉진하자는 목표를 그 중심에 뒀다. 타이베이를 대표하는 시립 미술관 TFAM 부지의 공원에 ‘숨겨진 보석’처럼 자리한, 유리 패널로 지은 아름다운 DH 카페도 이 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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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 포에버 재단(Live Forever Foundation), 비즈니스와 예술을 결합한 창의적인 시도
메세나든 긴 안목에서의 브랜딩 투자든 ‘랜드마크’가 되는 아트 스페이스는 도시에 부가가치를 더해주기 마련이다. 대중의 입장에서는 공공이나 사립이냐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간’과 ‘콘텐츠’ 자체가 직접적으로 와닿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타이중에 있는 리브 포에버 재단은 지난해 처음 소개를 받았을 때는 사진만 보고는 숲속 깊숙이 자리한 외딴 공간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2012년 설립된 이 재단은 타이중 시내에 자리한 복합적인 성격의 공간을 품고 있는데, 이 역시 부동산 개발업체가 주로 동시대 대만 작가들을 후원하는 곳이다. 숲속에 들어앉아 있지는 않지만 나무에 둘러싸인 청신한 재단 건물의 자태는 지속 가능한 생태와 문화 예술을 지지한다는 사명에 걸맞은 듯 보였다. 생태적인 데 초점을 맞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탐구하고 대만 지역의 문화와 지리를 깊이 파고드는 전시를 꾸려오며 외부 큐레이터들과도 활발한 협업을 벌인다. 마침 필자가 방문했을 때 작가이자 큐레이터가 이끄는 플랫폼인 비수(Bsu´t)와 공동으로 기획한 그룹전 <Space in Between>이 열리고 있었는데, 현실의 물질적인 측면을 관찰하고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한 물질성과 상호작용을 시도하는 5인의 작업 세계가 크지 않은 공간에서도 효율적인 구성과 미학으로 다가왔다. 안뜰을 지나면 전시장 건너편에 미팅 룸이 잇따라 있길래 궁금했는데, 재미나게도 회사의 후계자인 재단의 디렉터가 본업을 겸하는 사업장이었다. 간판도 따로 없는 고요한 분위기의 공간이라 “저기엔 어떤 작품이 걸려 있냐”고 물어보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전시를 보지 않아도 부동산 미팅이라도 하고픈 이 멋진 공간의 커피와 디저트 맛도 거의 ‘예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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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Slowly But Surely! 타이베이 아트 주간 2024  보러 가기
02. 대만다운 ‘아트 신(scenes)’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새롭게 꿈틀거리는 현대미술 풍경 속 2, 3세대 동력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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