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거리를 달리는 ‘삼륜차 주법’의 미학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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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01, 2024

글 고성연 l Photo by 고성연 l 이미지 제공_KKAA

interview with_ 구마 겐고(Kengo Kuma)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도시’가 몇몇 천재의 기획이 아닌 복잡다단한 유기체이듯 건축도 ‘스타키텍트(starchitect)’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건축 설계사, 구조 공학자, 엔지니어, 건설 관리자, 실내 디자이너와 장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이고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현시대의 스타 건축가를 가리켜 상업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셀럽’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그렇지만 ‘사업가’로 바라볼 때 대중을 경탄하게 만드는 스텍터클과 ‘도시의 기억’으로 남는 공공적 이미지를 구현하는 일은 많은 이들이 열망할 만하다. 빼어난 상징 자본을 무기로 큰 보수를 누리면서도 의뢰인의 요구와 창조성 사이에서 크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브랜드 건축가’는 극히 소수겠지만 말이다. 국가 차원의 건축 강국이기도 한 모국 일본의 무대를 넘어 점점 더 많은 글로벌 도시의 매력적인 프로젝트를 접수 중인 건축가 구마 겐고(Kengo Kuma).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적 가치를 세계에 심고 싶다는 그의 포부를 직접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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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생태계에 걸쳐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언젠가부터 ‘일본’이라고 하면 절로 떠오르는 키워드 중 하나는 ‘건축’이다. 외국인 친구들이 요즘 ‘한국’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흔히 ‘K-팝’을 연상하는 것처럼. 그런데 건축은 개개인이 저마다의 활동을 자유롭게 펼치는 각개전투 느낌보다는 왠지 모르게 ‘국가 대항전’ 같은 이미지를 동반하곤 한다. 공공이든 민간이든 규모가 큰 프로젝트가 흔한 데다 설계 공모전을 통해 건축 스튜디오를 선정하는 경우가 많고, 물리적으로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 수상자를 볼 때 국적에도 시선이 가기 마련인데, 1979년부터 해마다 발표해온 긴 목록에서 일본은 유독 눈길을 잡아끈다. 무려 여덟 차례에 걸쳐 9명의 건축가가 프리츠커상을 꿰찬 덕에 ‘최다 수상국’의 명예를 누리고 있다. 1954년생인 구마 겐고(Kengo Kuma)는 아직 그 대열에 오르지는 않았지만(수상자는 1930~40년대 출생이 많다) 세계 곳곳에서 활발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오늘날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건축가 브랜드’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일본 문화와 건축에 대한 무지를 각성하면서 맞은 중대한 전환점
도쿄와 요코하마 사이 지역에서 태어나고 목조 가옥에서 자란 구마 겐고는 스스로를 어느 도시에도 완벽히 속하지 않는 ‘경계에 있는’ 존재라 여겼다고 한다. 늘 전철을 타고 두 도시를 오가며 성장한 그는 일본 경제 부흥기의 정점을 상징했던 1964년 도쿄 하계 올림픽을 목도했고 그 뒤로도 주말이면 국립 요요기 경기장으로 수영을 하러 가곤 했다. 바로 일본 최초로 프리츠커상(1987)을 받은 단게 겐조(Kenzo⁻ Tange, 1913~2005)가 설계한 경기장이다. 당시 올림픽의 잔상, 그리고 수영장의 위용과 설계 미학에 한껏 매료된 ‘소년’ 구마는 단게 겐조와 같은 건축가를 꿈꾸었는데, 반세기가 훌쩍 넘게 흘러 막대한 사명을 낚아챈다. 2021년 도쿄에서 다시 열린 하계 올림픽의 신 국립 경기장 설계를 맡게 된 것이다. 이는 어린 시절 품었던 원대한 꿈을 이뤄낸 건축학도의 경이로운 서사로, 구마 겐고 자신이 직접 쓴 책에도 등장하는, 어찌 보면 지나치게 드라마 같아서 좀 식상하게 들릴 법도 한 대목이다.
하지만 그는 낭만적인 스토리텔링에만 매몰된 유형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수적인 일본 사회나 건축계에서 당연시되는 틀을 깨는 사고를 좋아하고 선배 건축가들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하는 맹랑함을 표출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계통의 학교를 나와 도쿄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그는 1985년 미국으로 떠나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연구원으로 지냈는데,이때는 스스로의 각성을 겪었다. “전통적인 일본 건축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뉴욕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하나같이 그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제가 모국의 역사나 전통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닫고는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친구들을 제 아파트에 초대해 캐주얼하게나마 ‘다도(tea ceremony)’를 했어요.” 꽤 인기 있는 아지트였겠다고 하자 그는 웃으며 “심지어 캘리포니아에 사는 한 목수를 통해 일본식 다다미 두 세트를 아주 어렵게 구해 작은 티 하우스를 만들었죠”라고 말했다. 그 다다미 하나가 공간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고, 자신이나 친구들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구마 겐고는 뉴욕 생활을 마치면서 다다미 세트를 선물로 주고 떠났는데, 시그램 빌딩 작업으로 유명한 조명 디자인의 대가인 에디슨 프라이스(Edison Price)가 그 수혜자였다고. “건축계의 흥미진진한 ‘진짜’ 얘기를 들려주던 분이었는데, 정말이지 다다미를 좋아했어요. 에디슨이 세상을 뜰 때도 다다미와 함께했다는 얘기를 그의 딸에게서 듣고 뭉클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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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기만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작은 프로젝트’의 시기와 스타일의 구축

1986년 귀국해 자신의 스튜디오를 낸 그는 당시 호황에 힘입어 일도 많이 맡았을 뿐만 아니라, 늘 좋아했던 글쓰기에도 매진해 책을 내기도 했다(지금도 그는 웬만한 글쟁이 못지않은 왕성한 저술가다). <열 가지 스타일의 집>이라는 책인데, 여기에는 건축계 스타 선배인 안도 다다오를 비판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그런 당돌한 저격(?)이 허용되었다는 것이 다소 놀랍다고 하자, 그는 ‘신중을 기해’ 직접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다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대신 안도의 전매특허인 ‘노출 콘크리트’ 공법에 대한 내용이 있다). 전략적 노림수가 어느 정도 섞였을 듯한 젊은 날의 치기는 그를 업계에서 꽤 유명하게 만들어줬지만 정작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는 이는 적었다고 구마 겐고는 털어놓았다. 그의 설명인즉슨, 안도 다다오는 근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의 추종자로 모더니즘을 신봉했는데, ‘어째서 아시아 사람들이 서구의 조류를 (계속) 추앙해야 하느냐’는 생각에서 그의 방식과 태도를 비판했다(안도는 자신의 개 이름을 ‘르 코르뷔지에’라고 짓기도 했다)는 것이다. 자연에 맞서지 않고 부드럽게 호응하는 작고, 약하고, 느린 그의 건축 언어와는 판이한 그의 포스트모던 건축물인 ‘M2’(1991)도 그 같은 비판적 시각을 반영한 작품이라고.

‘우리는 이제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구마 겐고의 신념은 이윽고 일본에 닥친 극심한 경기 침체의 여파로 ‘행동’으로 옮겨지게 됐다. 불황의 바람이 어찌나 거셌는지 아직은 젊은 건축가였던 그의 스튜디오가 도쿄에서 맡은 프로젝트가 다 취소되면서 사실상 ‘제로(0)’가 됐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구마 겐고가 자신의 커리어에서 2기(1992~2000)로 분류하는 ‘일이 없어 심심한 시기’가 도래한다. 하지만 그는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내가 다시 태어난 10년’, ‘재생의 10년’이라고 부른다. 눈을 ‘지방’으로 돌려 현지의 자연적인 재료를 다뤄보고 지역 기술자들과의 공동 작업에서 큰 배움과 깨달음을 얻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공업화 이후의 새로운 방법, 새로운 디자인의 토대를 ‘지방’에서 찬찬히 발견하고 쌓을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일본의 어떤 마을에 가더라도 최고 수준의 숙련된 기술을 지닌 장인을 만날 수 있어요. (그가 ‘애정’하는) 나무와 돌, 종이를 비롯해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요. 정말 많이 배웠죠.” 실제로 이 시기를 겪으면서 진행한 몇몇 프로젝트는 나중에 그에게 큰 보상으로 돌아왔다. 쌀 창고를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돌 미술관’(2000)과 삼나무 루버를 활용한 ‘바토 히로시게’(2000), 그리고 중국 만리장성 옆에 완성한 ‘대나무집’(Great Bamboo Wall)(2002)도 그 대표적인 사례다. 지방에서의 작업을 계기로 해외에서도 ‘러브콜’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작지만 개성적인 지방의 프로젝트와 세계화라는, 언뜻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사건이 20세기, 21세기로 세기가 바뀌는 사이에 서로 공명하고 공진했다.”(<구마 겐고, 나의 모든 일>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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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속도로 꾸준히 달리는 주법의 즐거움

그리하여 2000년대 구마 겐고의 프로젝트들을 보면 ‘작은’ 건축이라고 부르기에는 ‘판’이 눈에 띄게 커졌다. 그가 커리어 여정의 3기(2001~2015)라 부르는 시기로 다양한 규모의 미술관이나 공공  상업 프로젝트를 두루 맡았다. 구마 겐고 스튜디오(KKAA)가 오랫동안 자리해온 도쿄 아오야마 인근의 녹음 짙은 정원이 아름다운 네즈 미술관을 비롯해 워터/글라스 하우스, 마르세유 현대미술 센터, 유스하라 나무다리 박물관 등이 이에 해당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작음’과 ‘약함’은 그저 건축의 규모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있고, 한 사람이 어렵지 않게 만질 수 있다는 유연성 차원의 개념이다. ‘자연적인 소재와 함께하는 투명성(transparency)과 유연성(fluidity)’을 자신의 건축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꼽는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때로는 고층 건물을 설계하기 위해 산업적 재료도 써야 하죠. 하지만 여전히 ‘재료의 질감’을 보여준다는 맥락에서 제 방식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2015년은 단연 그의 커리어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된 해로 꼽힌다(2016년부터 이어지는 4기의 단초가 된다). 당시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신 국립 경기장 프로젝트 공모를 따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 DDP 건축가이기도 한 자하 하디드의 설계가 진행되다가 무산되고 재선정된 사례라 논란이 있었던 프로젝트이긴 하다. 하지만 ‘나무와 풀’을 내세운 자연주의 콘셉트로 친환경성과 전통미를 부각한 구마 겐고표 디자인은 분명 그가 줄곧 추구해온 건축의 미학을 포용하고 있었다. 건축은 ‘형태’가 아니라 인간적인 따스함이 묻어날 수 있는 ‘물질’이라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수긍되는 면모랄까. 그리고 그는 자신의 디자인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책자를 발간해 일본의 목조건축을 ‘위대한 평범’으로 부르는 영민함을 발휘하기도 했다(<전후 일본 건축>). 워낙 미디어의 주목도가 높았던 프로젝트라 그런지 그는 언젠가부터 일반인에게도 얼굴이 알려지는 유명세도 누리며 쉴 새 없이 해외 출장을 다니는 일정을 소화하게 됐다.한국에서도 부산롯데타워, 성수동 오피스 빌딩을 비롯해 대형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으며(KKAA의 서울 사무소도 성수동에 낼 예정이다), 조만간 세곡동에 사운드 뮤지엄인 오디움(Audeum)이 문을 열 예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는 ‘달리는 페이스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형 프로젝트, ‘작은 건축’, 그리고 글쓰기, 이 세 가지를 여전히 같은 베이스로 지속하는 자신만의 ‘삼륜차’ 주법 덕분이란다. 자유로운 실험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작은 프로젝트, 의미와 영향력을 지닌 대규모 건축, 그리고 불순물과 잡음을 제거해주는 글쓰기의 절묘한 조합 덕분에 긴 거리를 달려올 수 있었는데, 자신의 친구이기도 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이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그는 와세다대학이 하루키에게 헌정한 도서관의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맡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3백50명이 넘는 인원을 이끄는 대형 건축 설계 회사의 수장으로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그에게 커리어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전략적인 균형의 미학을 본능적으로 꿰뚫고 있는 그답게 “아시아의 방식과 가치를 구미 지역에 전달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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