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with_ 구마 겐고(Kengo Kuma)
1986년 귀국해 자신의 스튜디오를 낸 그는 당시 호황에 힘입어 일도 많이 맡았을 뿐만 아니라, 늘 좋아했던 글쓰기에도 매진해 책을 내기도 했다(지금도 그는 웬만한 글쟁이 못지않은 왕성한 저술가다). <열 가지 스타일의 집>이라는 책인데, 여기에는 건축계 스타 선배인 안도 다다오를 비판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그런 당돌한 저격(?)이 허용되었다는 것이 다소 놀랍다고 하자, 그는 ‘신중을 기해’ 직접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다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대신 안도의 전매특허인 ‘노출 콘크리트’ 공법에 대한 내용이 있다). 전략적 노림수가 어느 정도 섞였을 듯한 젊은 날의 치기는 그를 업계에서 꽤 유명하게 만들어줬지만 정작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는 이는 적었다고 구마 겐고는 털어놓았다. 그의 설명인즉슨, 안도 다다오는 근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의 추종자로 모더니즘을 신봉했는데, ‘어째서 아시아 사람들이 서구의 조류를 (계속) 추앙해야 하느냐’는 생각에서 그의 방식과 태도를 비판했다(안도는 자신의 개 이름을 ‘르 코르뷔지에’라고 짓기도 했다)는 것이다. 자연에 맞서지 않고 부드럽게 호응하는 작고, 약하고, 느린 그의 건축 언어와는 판이한 그의 포스트모던 건축물인 ‘M2’(1991)도 그 같은 비판적 시각을 반영한 작품이라고.
‘우리는 이제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구마 겐고의 신념은 이윽고 일본에 닥친 극심한 경기 침체의 여파로 ‘행동’으로 옮겨지게 됐다. 불황의 바람이 어찌나 거셌는지 아직은 젊은 건축가였던 그의 스튜디오가 도쿄에서 맡은 프로젝트가 다 취소되면서 사실상 ‘제로(0)’가 됐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구마 겐고가 자신의 커리어에서 2기(1992~2000)로 분류하는 ‘일이 없어 심심한 시기’가 도래한다. 하지만 그는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내가 다시 태어난 10년’, ‘재생의 10년’이라고 부른다. 눈을 ‘지방’으로 돌려 현지의 자연적인 재료를 다뤄보고 지역 기술자들과의 공동 작업에서 큰 배움과 깨달음을 얻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공업화 이후의 새로운 방법, 새로운 디자인의 토대를 ‘지방’에서 찬찬히 발견하고 쌓을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일본의 어떤 마을에 가더라도 최고 수준의 숙련된 기술을 지닌 장인을 만날 수 있어요. (그가 ‘애정’하는) 나무와 돌, 종이를 비롯해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요. 정말 많이 배웠죠.” 실제로 이 시기를 겪으면서 진행한 몇몇 프로젝트는 나중에 그에게 큰 보상으로 돌아왔다. 쌀 창고를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돌 미술관’(2000)과 삼나무 루버를 활용한 ‘바토 히로시게’(2000), 그리고 중국 만리장성 옆에 완성한 ‘대나무집’(Great Bamboo Wall)(2002)도 그 대표적인 사례다. 지방에서의 작업을 계기로 해외에서도 ‘러브콜’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작지만 개성적인 지방의 프로젝트와 세계화라는, 언뜻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사건이 20세기, 21세기로 세기가 바뀌는 사이에 서로 공명하고 공진했다.”(<구마 겐고, 나의 모든 일>에서 발췌)
그리하여 2000년대 구마 겐고의 프로젝트들을 보면 ‘작은’ 건축이라고 부르기에는 ‘판’이 눈에 띄게 커졌다. 그가 커리어 여정의 3기(2001~2015)라 부르는 시기로 다양한 규모의 미술관이나 공공 상업 프로젝트를 두루 맡았다. 구마 겐고 스튜디오(KKAA)가 오랫동안 자리해온 도쿄 아오야마 인근의 녹음 짙은 정원이 아름다운 네즈 미술관을 비롯해 워터/글라스 하우스, 마르세유 현대미술 센터, 유스하라 나무다리 박물관 등이 이에 해당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작음’과 ‘약함’은 그저 건축의 규모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있고, 한 사람이 어렵지 않게 만질 수 있다는 유연성 차원의 개념이다. ‘자연적인 소재와 함께하는 투명성(transparency)과 유연성(fluidity)’을 자신의 건축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꼽는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때로는 고층 건물을 설계하기 위해 산업적 재료도 써야 하죠. 하지만 여전히 ‘재료의 질감’을 보여준다는 맥락에서 제 방식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2015년은 단연 그의 커리어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된 해로 꼽힌다(2016년부터 이어지는 4기의 단초가 된다). 당시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신 국립 경기장 프로젝트 공모를 따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 DDP 건축가이기도 한 자하 하디드의 설계가 진행되다가 무산되고 재선정된 사례라 논란이 있었던 프로젝트이긴 하다. 하지만 ‘나무와 풀’을 내세운 자연주의 콘셉트로 친환경성과 전통미를 부각한 구마 겐고표 디자인은 분명 그가 줄곧 추구해온 건축의 미학을 포용하고 있었다. 건축은 ‘형태’가 아니라 인간적인 따스함이 묻어날 수 있는 ‘물질’이라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수긍되는 면모랄까. 그리고 그는 자신의 디자인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책자를 발간해 일본의 목조건축을 ‘위대한 평범’으로 부르는 영민함을 발휘하기도 했다(<전후 일본 건축>). 워낙 미디어의 주목도가 높았던 프로젝트라 그런지 그는 언젠가부터 일반인에게도 얼굴이 알려지는 유명세도 누리며 쉴 새 없이 해외 출장을 다니는 일정을 소화하게 됐다.한국에서도 부산롯데타워, 성수동 오피스 빌딩을 비롯해 대형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으며(KKAA의 서울 사무소도 성수동에 낼 예정이다), 조만간 세곡동에 사운드 뮤지엄인 오디움(Audeum)이 문을 열 예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는 ‘달리는 페이스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형 프로젝트, ‘작은 건축’, 그리고 글쓰기, 이 세 가지를 여전히 같은 베이스로 지속하는 자신만의 ‘삼륜차’ 주법 덕분이란다. 자유로운 실험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작은 프로젝트, 의미와 영향력을 지닌 대규모 건축, 그리고 불순물과 잡음을 제거해주는 글쓰기의 절묘한 조합 덕분에 긴 거리를 달려올 수 있었는데, 자신의 친구이기도 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이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그는 와세다대학이 하루키에게 헌정한 도서관의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맡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3백50명이 넘는 인원을 이끄는 대형 건축 설계 회사의 수장으로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그에게 커리어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전략적인 균형의 미학을 본능적으로 꿰뚫고 있는 그답게 “아시아의 방식과 가치를 구미 지역에 전달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2 M2의 내부 아트리움.
3 일본 47개 지역에서 모은 목재를 사용해 완성한 신 국립 경기장을 창문 너머 배경으로 삼아 자신의 스튜디오이자 회사 KKAA(Kengo Kuma & Associates)의 접견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구마 겐고.
4~6 일본 도치기현 나스의 석재상이 돌로 지은 오래된 쌀 창고를 작은 미술관으로 개장하고 싶다는 요청에 따라 설계한 돌 미술관(Stone Museum). 채석장에서 나오는 아시노석을 사용하고 석재 기술자들을 활용했기에 공사비가 제로였다고 한다. 경박한 ‘화장’을 하듯 콘크리트에 얇은 돌을 붙이는 방식을 부정하고 돌을 작은 막대 모양으로 자른 다음, 틈을 두고 돌을 쌓아 올리는 새로운 공법에 도전했다. 이 프로젝트로 터득한 돌 쌓는 기술 덕분에 나중에 가도카와 무사시노 뮤지엄이라는 대규모 석조 건축물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구마 겐고는 강조한다.
7 일본 도치기현 나스군의 작은 마을 나카가와마치(Nakagawa-machi)에 자리한 바토 히로시게 미술관(Bato Hiroshige Museum of Art)의 안뜰.
8 구마 겐고가 30년 이상 스튜디오를 두고 있을 정도로 ‘애정’하는 동네인 도쿄 아오야마에 자리한 네즈 미술관(Nezu Museum) 내부. 방수 시트를 이용한 톱 라이트가 장지문 같은 효과를 낳는다고.
9 숲속에 자리한 네즈 미술관에서는 깊은 처마 아래를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 오모테산도의 소음에서 벗어나 한적함을 맛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10 미술 전시도 보고, 자연을 벗 삼아 산책을 즐길 수 있는 네즈 미술관은 2009년 문을 연 이래 국내외 관람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Photo by 고성연
11 현대의 목조 기술을 이용한 일본 고치현 유스하라초의 나무다리. 철골과 4개의 집성재를 조합한 중심의 기둥에서 다시 집성재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범위를 넓혀가며 커다란 나무 형상을 만들어냈다. 나무 보호차 다리에 지붕을 얹고 통로 부분은 전시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나무다리 박물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2010년 완공).
12 일본 아이치현 가스가이시에 있는 GC 프로소 뮤지엄 리서치 센터(GC Prostho Museum Research Center). 가느다란 3개의 나무 막대에 홈을 파 한 점으로 연결하는 사방 십자 조립 기법을 사용해 만든 밀라노의 파빌리온을 바탕으로 규모를 한층 키워 완성한, 커다란 가구 같은 건축물(3층 건물 10m). 위로 갈수록 튀어나오는 ‘톱 헤비’ 방식의 외형은 나무의 열화를 막기 위한 것이다(2010년 완공).
13 프로방스 지역에 자리한 방대한 아트 센터이자 와이너리인 샤토 라 코스트 내 구마 겐고의 프로젝트 설치 작업인 ‘Komorebi’. Photo Ⓒ Robin Oggiano
14 지난 2021년 모습을 드러낸 무하카미 하루키 도서관. 공식 명칭은 ‘와세다대학 국제 문학관(早稲田大学 国際文学館)’. 하루키의 40년 글쓰기 이력을 담은 기록 보관소이자 번역을 중심으로 한 세계문학과 다양한 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존 건물을 개축했다. Photo by 고성연
15 구마 겐고는 지극히 평범했던 콘크리트 상자 모양의 와세다대학 4호관의 층을 나누던 내부의 슬래브(slab) 2장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동굴 형상을 한 터널 공간을 만들어 넣었는데, 이는 하루키의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을 갑자기 다른 세계로 끌어내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Photo credit_Kawasumi Co., Ltd./Kenji Kobayashi Photography Office, 이미지 제공_KKAA
16 스코틀랜드 동부의 항구도시 던디(Dundee)의 워터프런트를 나무와 문화 공간으로 재생하는 프로젝트의 핵심으로 건립된 런던 빅토리아 & 앨버트 뮤지엄의 분관 V & A 던디. 2018년 가을 문을 열었다. 외벽은 물속에 건설됐고, 막대 모양의 프리캐스트 콘크리트를 벼랑처럼 무작위로 쌓아 올렸다.
17 도쿄도 시부야구에 있는 메이지 진구 뮤지엄(Meiji Jingu Museum). ‘기적의 숲’으로 불리는 숲과 일체화된 느낌의 설계를 지향했으며, 기준 바닥 면을 낮게 설정하고 처마의 높이를 억제하며 전체를 수평적인 얇은 지붕의 집합체로 디자인했다. 2019년 가을 완공.
18 2020년 봄 문을 연 에이스 호텔 교토. 1920년대 중반 유명 건축가 요시다 데쓰로(Tetsuro Yoshida)가 설계한 옛 교토 중앙전화국 건물에 신축한 동이 나란히 자리한다. KKAA에서 리뉴얼 설계 작업을 총괄했다.
19 에이스 호텔 교토의 안뜰. 메종 키츠네 카페, 르 라보 등이 들어선 복합 건물로 이어지는데, ㅁ 자형 단지 안에 해사한 정원이 있다.
20 지난해 9월 초 문을 연 일본의 글로벌 갤러리 화이트스톤의 서울 지점(Whitestone Gallery Seoul) 건물 외관. 기존 건물을 갤러리로 거듭나게 하면서, 외관은 검은색으로 바꿨다. 지하 1층~지상 4 층(약 700㎡, 2백12평) 규모로 3개의 주요 전시장을 품고 있다. 이미지 제공_화이트스톤 갤러리
21 신원동 작가의 백자 작품이 놓여 있는 화이트스톤 갤러리 서울의 루프톱(개관 당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