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23-24 Winter SPECIAL] A Glimpse into Vienna’s Art Scene_도시 자체로 ‘문화예술 특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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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3, 2024

글 고성연

도시 자체로 ‘문화예술 특별구’


세계적인 명소 빈 국립 오페라 극장(Wiener Staatsoper)의 무대를 장식하는 대형 커튼에 설치된 독일의 신표현주의 거장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작업 ‘Solaris’.이 작업은 ‘Museum in Progress’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공연 무대를 전시 공간으로 바꾸는 ‘Safety Curtain’ 프로젝트로 선보였다. 안젤름 키퍼는 26번째 프로젝트 참여 작가로 오는 6월 말까지 공연 전후와 인터미션에 짥게 그의 회화 ‘New Angel’이 설치된 이 작업을 볼 수 있다. Anselm Kiefer, Solaris (für Stanislaw Lem), 2023, Eiserner Vorhang, Museum in Progress, Wiener Staatsoper, 2023/2024, © Museum in Progress(www.mip.at)





우리가 때로는 도시를 다시 찾아야 하는 이유

● 여행을 하다 보면 도시도 사람 같다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이 있다. 처음부터 사랑에 빠질 듯 단번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나를 무시하거나 타박하지 않는데도 어쩐지 마음이 안 가기도 하고, 초면에는 별 끌림이 없지만 갈수록 호감이 들기도 하고, 첫인상은 좋았는데 자꾸 보면 아뿔싸 싶은 안타까운 반전 사례도 있다. 물론 애초에도 아니다 싶었는데 아무리 마음을 고쳐먹으려 애써도 영 마음에 들지 않고 나랑은 인연이 아닌 걸로 스스로 귀결짓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람도 그렇듯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에 대해서도 한두 번에 속단을 내리는 건 지양해야 한다.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나는지에 따라, 혹은 운이 좋거나 나쁜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그저 나의 지식과 이해가 부족해서 갖게 되는 인상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저도 모르게 ‘렌즈’를 끼고 바라보는 편향이 생길 수 있다는 얘기다.

●●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 영어로 비엔나(Vienna)라 불리는 이 도시는 필자에게 편견의 메커니즘이 작동했던 대상이다. 인간이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이미 ‘경험’해봤기에 더 고정된 이미지를 가졌던 것 같다. 학창 시절, 한여름의 배낭여행을 거친 지 수년이 지난 뒤 겨울 내내 인턴십을 하면서 수개월 체류한 적이 있어서다. 처음엔 문화 예술적 토양이 남다른 매혹의 도시로 다가왔지만 겨울의 싸늘함과 더불어 사회 전반에 흐르는 보수성이 느껴졌고, 그 이미지는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당시에도 위로를 받고 흥미를 느낀 건 전공과는 무관한 ‘예술’이었다. 휴일이면 클림트의 회화를 보러 다니고, 학생표로 콘서트홀을 방문하기도 하고, 가끔은 그 유명한 ‘자허 토르테’를 먹으며 초콜릿 스펀지케이크와 살구잼의 기막힌 조화를 음미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자연과 생명에 사랑이 지극했고 그 철학을 몸소 실천하며 살았던 괴짜 예술가 훈데르트바서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이 시기의 소득이었다.

●●● 꽤 오랜 세월이 흘러 비엔나를 다시 방문했을 때, 과거의 영광에 기대 사는 20세기의 도시로 바라봤던 나의 ‘필터’는 확증 편향의 소산이었던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수성은 여전히 흐르지만 다분히 현대적인 문화와 사회적 요소가 맞물려 돌아가고, 나름의 다양성을 향한 행보가 담긴 ‘달리 보이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층 다채롭고 건강해진 식문화, 시민들이 주거지에서 양봉을 하고 식물을 키우는 일상의 ‘루프톱 가든’을 비롯해 푸르름 짙어진 도시 풍경, 편리한 교통 인프라. 그리고 놀라울 정도의 수준을 자랑하는 동시대 미술도 눈을 사로잡았다.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에서는 마크 로스코의 초기작까지 아우르는 야무진 기획전을, 이 도시의 황금기를 수놓은 분리파의 전당 제체시온(Secession)에서는 피터 도이그 같은 걸출한 동시대 예술가의 최신작 전시를 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올겨울, 그 기억을 안은 채 오로지 ‘미술 탐방’으로 이 도시를 또다시 찾았다.



클림트에 못지않은 사랑을 받는 에곤 실레의 작품을 다수 소장한 레오폴트 뮤지엄(MQ 부지 내에 있다)에서 진행 중인 독일 가브리엘레 뮌터 전시. 한때 칸딘스키의 연인이자 예술적 동지, 지원자였지만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생태주의 미학을 몸소 실천했던 비엔나의 예술가 훈데르트바서의 창조 여정이 담긴 미술관 쿤스트 하우스 빈. 이 건물 옥상 정원에서는 양봉업자가 일하는 광경도 볼 수 있다.


비엔나의 빛나는 황금기였던 ‘세기말’의 혁신을 주도했던 구스타프 클림트는 젊은 동료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미술가연합’이라는 조직을 결성해 당시 제도권의 틀에 박힌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변화를 추구한 ‘분리’의 움직임을 꾀했다. 그래서 ‘빈 분리파’ 라고 불렸는데, 그들의 전당이던 공간이 ‘분리’라는 뜻을 지닌 제체시온(Secesssion)이다. 제체시온 운동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분리파 회원이자 건축의 대가 오토 바그너의 제자 요제프 마리아 오브리히(Joseph Maria Obrich)가 설계했고, 클림트의 프레스코 벽화 ‘베토벤 프리즈(Beethoven Frieze)’가 영구 전시돼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에 자리한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은 유럽 최고 수준의 미술관으로 꼽힌다. 벨라스케스, 루벤스, 렘브란트, 티치아노 등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을 말해주는 듯한 눈부신 컬렉션을 자랑하며 빼어난 수준의 근현대미술 기획전 역시 활발히 열리는, 시대를 관통하는 미술의 보고다. 현재는 태피스트리 작업을 매개로 르네상스 시대의 미학과 권력, 노사 관계 등을 다양하게 살필 수 있는 기획전<Raphael: Gold & Silk> 가 진행 중이다. 오는 1월 14일까지. Photo by 고성연


#세상의 시선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예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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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의 거리 풍경과 더불어 시민들의 생각을 바꾼 ‘스트리트 아트’


● 6백 년 넘도록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중추였으며 지금도 수도인 비엔나. 합스부르크 왕가가 남긴 찬란한 문화 예술 유산과 살기 좋은 도시 순위권에 늘 드는 균형 잡힌 인프라를 지녔기에 비엔나 시민들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21세기 들어 문화 허브로 부상한 베를린과 은근한 경쟁을 하면서도 그 콧대는 잘 꺾이지 않는다. “여기가 지루하다고 베를린에 가는데, 베를린에 가면 역시 살기에는 최고라면서 비엔나로 돌아온다니까”라거나, “우리가 도시 크기는 작아도 미술관 숫자는 베를린보다 많잖아”라는 등의 자찬을 들으면 그저 미소 지을 수밖에. 하지만 20세기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상처를 많이 받은 나라 중 하나가 오스트리아인 만큼, 다른 면모도 있다. 소위 ‘어르신’ 세대는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고 그러한 성향이 특유의 보수성과 얽혀 더 완고하게 나타나기도 했지만, 젊은 세대를 위시해 지금의 분위기는 다르다. 세계대전의 아픔을 스스로 상기하는 희생자들의 길거리 사진전이라든가 건물의 표정을 개성 있게 바꿔놓는 스트리트 아트 등으로 알 수 있는 변화다.

●● 스트리트 아트는 ‘거리의 미술관’이라고도 하지만 반달리즘 성격의 낙서 행위로 보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한다. 비엔나에서도 그런 굴곡을 거쳤지만 이제는 ‘비둘기’ 사인으로 허용하는 등의 체계를 갖추게 됐고, 다뉴브 강가를 비롯해 도시 곳곳에서 접할 수 있다. 그 정점에는 2014년부터 매년 여름 열리는 ‘칼레 리브레(Calle Libre)’가 있는데, 중부 유럽 최대 규모인 스트리트 아트 축제다. 창립자 야코프 카트너(Jakob Kattner)는 남미 지역에서 공부를 하다가 스트리트 아트에 관심을 갖게 됐고, 스페인어로 ‘자유로운 거리’라는 뜻의 이 축제를 열게 됐다. 올해 탄생 10주년을 맞이한 칼레 리브레는 지금까지 13개 구, 70개 넘는 벽을 다국적 아티스트들의 ‘캔버스’ 삼아 거리 풍경을 바꿨다. 마리아힐프(Mariahilf)나 노이바우(Neubau) 같은 정갈한 동네에 저마다의 감성과 사회, 문화적 메시지를 담은 담벼락 아트를 접하는 건 경쾌한 흥미를 선사하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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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Q goes Green, 환경을 생각하는 문화 예술 지구


● 인구 2백만 명도 채 되지 않지만 녹지가 절반가량이나 되는 비엔나(도시권 면적은 서울시의 3분의 2 정도인 415km²)는 공원, 정원, 숲 등이 많아 걸어 다니기에 좋아 모두를 위한 ‘산책로’ 그 자체다. 흔히 ‘MQ’라 불리는 비엔나의 ‘아트 허브’ 역할을 하는 무제움스크바르티어(MuseumsQuartier) 역시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원래 황실 마구간이던 MQ 부지는 역대급 문화 예술 프로젝트의 추진으로 지난 2001년 복합 공간으로 거듭났는데, 미술품 수집가 루돌프 레오폴트의 이름이 새겨진 석회암 파사드가 눈에 띄는 레오폴트를 비롯해 회색빛 현대미술관 무모크(Mumok), 어린이 미술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창의성의 보고인 Q21 등 다양한 전시 공간이 모여 있고, 교육 시설과 아티스트 레지던스도 갖추고 있다(한국 작가들도 참여한 적이 있다). 또 안뜰에는 누구나 쉬어 갈 수 있는 야외 광장을 두었는데, 이 덕분에 MQ는 ‘비엔나의 거실’이라는 애칭으로 통하기도 한다.

●● 필자는 예전에 MQ를 찾았을 때 야외 광장에 비치된 긴 의자에 앉아서 햇볕을 쏘이며 휴식을 취하거나 독서를 하는 이들, 인기 K-팝 걸 그룹 트와이스의 노래를 틀어놓고 댄스 연습을 하는 소녀들 등 ‘거실’의 다양한 면면을 본 적이 있다. 이번 겨울에 갔을 때는 쌀쌀한 날씨 탓에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밑동을 그물로 싼 나무 설치물이 여기저기 놓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색다른 풍경은 MQ가 추진하고 있는 친환경 전략을 반영한 결과물 중 하나다. MQ를 이끌고 있는 베티나 라이들(Bettina Leidl) 디렉터는 ‘MQ goes Green’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환경을 주제로 한 아트 프로젝트는 물론 단지 자체의 ‘녹색화’, 자원 절감형 운영을 해나가며 2030년까지 MQ 전체를 ‘기후 중립(climate neutral)’에 들어맞는 문화 지구로 변모시키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비엔나의 거실’을 다시 거닐다 보니 봄과 여름이면 더 짙은 녹음과 화사한 자연의 색채로 뒤덮일 MQ의 풍경이 머리에 떠오른다.



#고전부터 컨템퍼러리까지 아우르는 월드 클래스 컬렉션과 기획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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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색채에 빠졌다가 루이즈 부르주아의 창조혼에 경의를_벨베데레

● 날이 맑아도, 흐려도 늘 북적거리는 비엔나 최고의 명소 중 하나가 바로 벨베데레(Belvedere) 궁이다. 1683년 비엔나의 전쟁 영웅(프랑스 사보이 공의 아들이지만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오이겐 공이 만든 여름 궁전으로, 크게 두 건물로 나뉘어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곳은 주로 언덕 위에 있는 상궁이다. 비엔나의 ‘세기말’ 황금기를 빚어낸 대표적인 예술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역작 ‘키스’를 비롯해 작가의 눈부신 작품들이 자리하고 있어서다. 클림트 추종자라면 반짝반짝 빛나는 장식적인 외관 덕분에 ‘금색 양배추 머리’라는 별칭이 붙은 제체시온(분리파 미술관)과 더불어 벨베데레 궁을 필수적으로 찾는다. 상궁 앞에는 프랑스풍 정원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고, 그 아래 하궁이 자리하고 있다(또 동시대 미술을 주로 다루는 벨베데레 21도 별도의 건물에서 운영되고 있다).

●● 상궁은 19세기와 20세기 회화를 주로 보여주고, 하궁은 중세에서 바로크에 이르는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지만 워낙 기획전이 전반적으로많이 열려 고전 명화와 근현대미술, 동시대 미술까지 섭렵할 수 있다. 따라서 벨베데레를 방문하면 하루 종일 머물러도 시간이 모자랄 수 있다. 일정을 짧게 잡아 클림트 작품이 있는 전시실 위주로 보고 오는 경우도 많은데(물론 클림트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초기작을 포함해 작품이 많아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러기에는 ‘발품’과 ‘시간’과 ‘표값’ 모두 아깝다. 오이겐 공의 위세를 느낄 수 있는 대리석 방부터 정원의 조각과 연못 등 건축과 조경 자체도 볼만한 데다 오스카어 코코슈카, 에곤 실레 등 명성 높은 비엔나 출신 거장은 물론 여러 시대를 아우르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다양한 전시를 접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올겨울 최고의 감동은 하궁에서 열리고 있는 ‘거미’ 조각의 작가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seois) 전시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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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걸작부터 동시대의 정수를 품다_알베르티나

● 미술 문외한이어도, 또 미술관 이름은 모르더라도 영화 <비포 선라이즈> 촬영지라고 운을 뗀다면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일 알베르티나(Albertina). 원래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남편 알베르트 공이 살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15세기 궁전이라 일단 인테리어가 우아한 화려함을 내뿜는다. 알베르트 공은 미술품 컬렉팅에 관심이 많았기에 사후에 그의 이름을 따 ‘알베르티나’라는 명칭을 갖게 됐다. 하지만 2003년 건축가 한스 홀라인이 레노베이션을 맡아 현재의 미술관 외관은 현대적 분위기가 스며들어 있다. 외부에서 보면 길 위에까지 날렵하게 뻗어 있는 날개 모양의 구조물이 바로 그것이다. 어쩌면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혁신을 시도하겠다는 비엔나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미술관 전시 공간도 그처럼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현대적인 분위기의 디자인이 교차하면서 매력적인 분위기를 빚어낸다.

●● 비엔나에 1백 개 훌쩍 넘는 미술관이 있다지만, 알베르티나는 아마도 근대 회화의 거장을 사랑하는 미술 애호가라면 가장 선호할 듯한 보석 같은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에서는 마티스, 미로, 르누아르, 클림트 등 주옥같은 이름이 차고 넘친다. 대표 소장품 중 하나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토끼(Der Hase)’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 이들도 많다(실제로 보면 생생한 묘사에 경탄하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작아 놀라기도 한다). 현대미술로 눈을 돌려봐도 수준급 기획력과 실행 능력을 지니고 있다. 지난해 말 방문했을 당시 운 좋게 감상했던 독일 작가 카타리나 그로세(Katharina Grosse)의 개인전이 바로 그러한 예일 것이다.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설치 작업으로 공간 자체를 하나의 예술품으로 탈바꿈시킨 전시다. 동시에 열리고 있던 모네-피카소 전시도 좋았지만, 고트프리트 헬름바인(Gottfried Helmwein) 전시의 괴기스럽고 몽환적인 대조미야말로 알베르티나에서의 경험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비엔나에 신선함을 불어넣는 새 랜드마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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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이 깃든 컬렉션을 바탕으로 한 전시 공간_하이디 호르텐 컬렉션

● 알베르티나 미술관에서 도보로 3~4분 거리에 자리한 1백50년이 훌쩍 넘은 유서 깊은 미색 저택. ‘Heidi Horten Collection’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는 이곳은 한 컬렉터의 소장품을 바탕으로 한 현대적인 아트 스페이스다. 2022년 6월 초 문을 열었는데, 여러모로 화제를 모은 전시 공간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 억만장자인 하이디 호르텐(1941~2022)이 마련한 공간이기도 하고, 당시 81세였던 그녀가 며칠 뒤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 나이에 헬무트 호르텐이라는 거부와 결혼한 그녀는 남편이 사망한 뒤 본격적으로 ‘아트’에 큰 관심과 애정을 쏟게 됐고, 되도록 티 나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기는 했지만 차츰 미술 시장의 큰손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6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독일어를 쓰는 신원을 파악하기 힘든 여성 고객이 무려 2천2백만 달러 규모의 작품을 사들였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 하이디 호르텐의 존재가 드러났을 때 그녀의 소장품 규모 자체는 엄청나게 크지는 않았지만 (현재 기준 7백 점 이상) 그 목록에 있는 작가들의 이름은 입이 떡 벌어질 만했다. 파블로 피카소, 장-미셸 바스키아, 마르크 샤갈, 앤디 워홀, 이브 클랭, 프랜시스 베이컨,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 굵직한 작가들이 포진해 있었고, 경매에서 이슈가 됐던 흥미롭거나 주요한 작품도 보였다. 이미 2018년 레오폴드 뮤지엄에 자신의 소장품 1백70여 점을 전시했던 그녀는 현재 아트 스페스의 부지(2,000㎡)와 건물을 구입해 2019년 자신의 미술관을 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동시대의 세련되고 독창적인 감각을 반영하겠다는 포부로 비엔나의 건축 설계 사무소 더 넥스트 엔터프라이즈(the next ENTERprise)를 발탁해 인상적인 내부 공간을 빚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사망한 뒤에 소장했던 보석들이 경매에 나오면서 호르텐 가문의 재산이 나치 시대에 거둔 그릇된 이익으로 쌓은 것이라는 여론이 확산되기도 했는데, 이 전시 공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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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정수를 담은 새로운 장_알베르티나 모던

● 알베르티나가 근대 명화와 더불어 방대한 드로잉, 그리고 올드 마스터 프린트 작업을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대형 미술관이라면 현대미술을 집중적으로 품어낼 분관으로 2020년 알베르티나 모던(Alberina Modern)이 문을 열었다. 여기서 ‘현대미술’이라 함은 주로 1945년 이후의 작품을 말한다. 알베르티나 본관에서 도보로 10분 내에 다다를 수 있는 알베르티나 모던의 소장품은 에슬과 자블론카(the Essl and Jablonka)라는 2개의 컬렉션을 바탕으로 하는데, 5천여 명 작가의 작품 6만여 점을 보유하고 있다. 그 목록 역시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스타인 같은 팝아트 작가부터 개관전 작가인 마리아 라스니그, 피필로티 리스트, 데이미언 허스트, 안젤름 키퍼 같은 동시대의 주요 작가들로 이루어졌으며, (당연하게도) 현재 오스트리아-독일권에서 활약하고 있는 작가들의 수작을 보는 재미가 있다.

●● 마침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에도 ‘오스트리아-독일’을 공통분모로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이 지역권 대표 작가들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미술사 공부를 실제 작품을 앞에 놓고 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기획전이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시그마 폴케, 프란츠 웨스트, 마르타 융비르트, 게오르그 바젤리츠, 카타리나 그로세, 마리아 라스니그, 젤리틴 등의 전시였다. 알베르티나 모던이 몰고 온 또 다른 화젯거리는 2021년 가을 독일 출신의 40대 여성 큐레이터 앙겔라 슈티프(Angela Stief)가 관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었을 것 같다. 럭셔리와 스트리트 패션을 재미나게 섞은 듯한 튀는 패션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할 말을 다 하는 이 개성 넘치는 캐릭터의 관장은 여성 팝 아티스트, 퍼포먼스, 퀴어 문화 등 다양성의 폭을 넓히는 기획을 시도하고 있다. 큐레이터로서 알베르티나의 카타리나 그로세 전시도 진두 지휘했는데, 올해 열리는 <The Beauty of Diversity>라는 기획전도 주목해달라고 필자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차근차근 보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가는 미술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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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경매의 메카_도로테움

● 비엔나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매장 중 하나이자 유럽에서 몇 손가락에 꼽히는 옥션 하우스인 도로테움(Dorotheum)이 있다. 3백 년도 더 거슬러 올라간 1707년 당시 황제였던 요제프 1세가 설립한 도로테움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도로테르가세(Dorotheergasse)에 위치한 비엔나 본사를 필두로 독일,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그리고 파리와 런던, 브뤼셀, 프라하 등 유럽 주요 도시에 지점을 둔 글로벌 경매업체다. 독어권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대형 옥션 하우스가 그렇듯 경매 카테고리가 무척 다양한 편인데, 올드 마스터 회화부터 19세기 회화, 모던, 컨템퍼러리, 앤티크, 아르누보, 보석, 시계, 가방 등을 아우른다. 특별 경매도 정기적으로 열리는데 디자인, 도자기, 유리공예, 사진, 역사적인 과학 기기, 악보, 우표, 동전, 책, 자필 사인 등 범주가 다채롭다. 1백 명 넘는 전문가로 구성된 팀이 세심하게 상담해주기도 한다.

●● 도로테움은 역사가 오래된 만큼 ‘도로테움 궁’이라고 불리는 고풍스러운 건축물을 보금자리로 삼고 있는데, 원래 건물은 1901년 완성되었다. 네오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을 기획한 인물은 비엔나의 명물인 링슈트라세를 설계한 푀르스터(Förster)다. 도로테움은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지만 사실 나치 시대에는 빼앗은 유대인의 재산을 처리하는 역할을 해야 했던 가슴 아픈 역사도 지니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도로테움은 재건에 나섰다. 긴 세월에 걸쳐 명성을 다지며 성장 가도를 달리다 1980년대 입구와 내부를 재단장하는 등 레노베이션을 거쳤다. 2001년 가을 현재의 경영진이 인수하면서 도로테움은 비엔나라는 도시가 경매의 메카로 각광받을 수 있도록 예전에 비해 보다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경매장은 확실히 직접 가봐야 ‘나와의 인연’, 혹은 적어도 인연을 맺고 싶을 만큼 눈을 사로잡는 대상을 만날 수 있는 것 같다. 아르눌프 라이너(Arnulf Rainer)의 감각적인 회화라든지 피로 길라르디(Piero Gilardi)의 존재감 넘치는 설치 작품은 피곤한 와중에도 절로 몰입해 감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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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영글어가는 갤러리 현장

● 사실 미술 시장을 얘기하자면 온도가 좀 달라지기는 한다. 비엔나는 명실공히 찬란한 합스부르크의 위용 넘치는 유산을 바탕으로 한 문화 예술의 인프라와 토양을 지니고 있고, 고전과 동시대를 아우르는 풍부하고 수준 높은 미술 컬렉션과 기획력도 갖춘 문화 예술 허브 도시다. 최근에는 한겨울인데도 빈 미술사 박물관 앞에 줄이 똬리를 틀 정도로 많은 방문객이 찾고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엔나가 요즘 ‘핫 데스티네이션(hot destination)이라고 하네요.” 태피스트리 전시를 설명하면서 라파엘의 예술 노동이 어째서 불공정한 계약이었는지 강조하던 한 큐레이터가 한 말이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경매와 함께 아트 페어, 그리고 ‘갤러리 신’이 나란히 시너지를 내면서 떠받쳐줘야 하는 법이다. 경매는 도로테움이라는 큰 산맥이 있기는 하지만 크리스티와 소더비 같은 브랜드 파워를 갖춘 ‘공룡’이 곁에 버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트 페어를 놓고 보더라도 안 그래도 경쟁이 치열한 시장인데, 프리즈와 아트 바젤 같은 ‘메가 브랜드’가 포진한 곳이 런던, 파리, 바젤 등의 유럽 도시이기에 경쟁력을 한층 더 키워야 한다. 반드시 규모만 염두에 둔 출혈경쟁이 아니라 틈새를 개발하거나 동맹을 맺는 현명한 접근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 성장을 위한 페달을 가장 세게 밟아야 하는 생태계는 갤러리 업계다. 그만큼 잠재력이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진부한 말 같지만 실제로 1구에서 4구에 자리한 크고 작은 갤러리를 순회해본 결과, 상당히 흥미로운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아직은 주류 시장에서 ‘이름’이 잘 알려질 정도로 브랜딩되어 있거나 규모가 크지 않지만, 다양한 개성을 지닌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함께 커나가는 데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임하는 모습이 눈에 띄어 반가웠다. 신생 갤러리든, 수십 년 동안 꾸준히 독자적인 여정을 꾸려온 중견 갤러리든 ‘초심’을 유지하면서도 바등바등 조급해하지 않는 태도가 인상적이기도 했다. “이 도시에서 무수하게 벌어지는 전시나 행사 콘텐츠를 보세요. 한결같이 수준이 높은 편이죠.” 오래전에 프랑스에서 이주해 줄곧 전시 공간을 둔 화랑(스타이넥 갤러리)을 꾸려왔다는 한 갤러리스트의 말에 십분 공감하며 미소를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ART + CULTURE ’23-24 Winter SPECIAL]

01. Intro_다양성의 가치  보러 가기
02. Front Story_타이베이 비엔날레(Taipei Biennial) 2023_<Small World>_나와 너, 그들의 이야기… 우리의 화두  보러 가기
03. 가장 사적인 ‘취향 페어링’을 찾아서  보러 가기
04. A Glimpse into Vienna’s Art Scene _도시 자체로 ‘문화예술 특별구’  보러 가기
05. A Glimpse into Vienna’s Art Scene _#세상의 시선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예술  보러 가기
06. A Glimpse into Vienna’s Art Scene _#고전부터 컨템퍼러리까지 아우르는 월드 클래스 컬렉션과 기획전  보러 가기
07. A Glimpse into Vienna’s Art Scene _#비엔나에 신선함을 불어넣는 새 랜드마크들  보러 가기
08. A Glimpse into Vienna’s Art Scene _#차근차근 보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가는 미술 시장 보러 가기
09. Interview with 마뉴엘 솔라노(Manuel Solano)_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한 여정 보러 가기
10. 뉴욕(New York) 리포트_지금 우리 미술을 향한, 세상의 달라진 시선  보러 가기
11. 시드니 아트스페이스(Artspace) 재개관을 맞이하며_Reflections on Art and Diversity  보러 가기
12. 하루키의 텍스트가 기억될,미래의 기념관이자 현재의 도서관  보러 가기
13. 마크 로스코(Mark Rothko)_화폭에 담긴 음률  보러 가기
14. 호시노야 구꽌(HOSHINOYA Guguan)__물, 바람이 만나는 계곡의 휴식  보러 가기
15. Exhibition in Focus  보러 가기
16. Remember the EXHIBITION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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