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23-24 Winter SPECIAL]나와 너, 그들의 이야기… 우리의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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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3, 2024

글 고성연

흔히 ‘미술 장터’로 일컬어지는 아트 페어나 각종 문화 예술 축제, 비엔날레와 트리엔날레처럼 2~3년 마다 치러지는 국제 미술제를 찾노라면 ‘산책’이라는 단어를 관성적으로 쓰게 된다. ‘비엔날레 산책’이니 ‘미술 산책’이니 하면서 말이다(필자 역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날 지역을 대표하는 대형 아트 페어나 미술제는 도저히 구두를 신을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동선이 복잡다단하며, 당연히 볼거리도 많다. 더구나 직업상 마음 닿는 대로 ‘산책하듯’ 노닐 수는 없다는 강박이 작용하는 경우라면 하루 2만~3만 보 정도는 우습게 소화하게 된다. 나름 골라서 본다고 해도 결국 그렇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타이베이 비엔날레는 내심 반가웠다. 타이베이 시립 미술관(TFAM) 한 곳에서만 열리는 비엔날레라니. 물론 그것이 방문 이유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단기간의 여정에서는 여기저기 이동하는 데 시간을 소요하는 대신 보다 집중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구도가 장점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다행히도 타이베이 비엔날레는 먼 길을 떠난 보람을 느낄 만한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짧은 여정이지만 이를 계기로 비엔날레가 여전히 ‘발품’과 ‘사유’와 ‘공감’의 의미를 전해줄 수 있는 ‘존재의 이유’를 생각해본다.
타이베이 비엔날레(Taipei Biennial) 2023_<Smal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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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반세기 역사를 지닌 비엔날레와 타이베이라는 도시
세계화 흐름에 맞물려 1990년대에는 미술계에서도 지구촌 여기저기 새로운 비엔날레가 많이 생겨났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 역시 그 대열에 합류했고, 이 도시를 대표하는 최초의 현대미술관인 타이베이 시립 미술관(TFAM)이 비엔날레 성격의 국제전을 꾸준히 연 선두 주자였다. 그러다가 TFAM은 1998년 현재의 타이베이 비엔날레(Taipei Biennial, 이하 TB)를 선보인 이래 2년 간격으로 치러왔다. 늘 짝수 해에 열리던 이 비엔날레는 팬데믹이 발발하면서 많은 글로벌 행사가 맞닥뜨린 운명처럼 ‘홀짝’이 바뀌어 지난해(2023년) 늦가을 제13회를 개최하게 됐다. TB 2023에 초청받은(또 다른 참여 작가는 양유연이다) 우리나라의 김범 작가가 1998년 당시 참가했고, 이번에 다시 현장을 직접 찾았으니 25년만이다. 오는 3월 24일까지 3개월 넘는 여정을 펼쳐가는 TB 2023의 전시 제목은 ‘스몰 월드(Small World)’. ‘스몰’이라는 단어는 타이베이라는 도시와도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데, 중의적 표현으로 글로벌 팬데믹을 계기로 서로가 한층 가까워졌다는, 그리고 반대로 격리의 위협으로 사회가 더 작은 단위로 쪼개졌다는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다. 서로가 밀착적으로 연결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떨어질 수도 없는 ‘유예된 상태’, 다시 말해 가능성과 위협이 공존하는 딜레마의 세상이랄까.
필자는 이전에는 타이베이 비엔날레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비엔날레 과잉’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어느 순간 TFAM 현장이 궁금해졌다. 아마도 타이베이의 ‘아트 신’에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데다 지난해 봄 아트 바젤 홍콩 기간에 TB 2023의 공동 감독인 프레야 추(Freya Chou)를 만나 얘기를 나누다 생긴 호기심도 보태졌던 것 같다. 타이베이라는 도시 자체, 그리고 문화 예술을 둘러싼 콘텐츠를 보면 대개 규모가 방대하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내실을 갖춘 데다 진중하되 개방적이라는 인상을 받아온 터였다. ‘브랜딩’ 관점에서 비엔날레의 인지도는 도시 자체의 인상과 매력도에 영향을 받기도, 또 주기도 하지 않는가. 16세기 초 포르투갈 항해자들과의 인연으로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포모사(Formosa)’라는 별칭을 얻은 대만은 근현대사 궤적을 볼 때 한국과 많이 닮았다. 19세기 말부터 이어진 전쟁과 식민지화, 가파른 경제성장, 민주화의 시련 등의 역사를 볼 때 그렇다. 그런데 대만은 사회·문화적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성을 지니고 있고, 2017년 동성혼이 합법화된 최초의 아시아 국가라는 이력이 있을 만큼 진보적이기도 하다. 해커 출신의 30대 장관(디지털 담당)으로 유명세를 단단히 탔던 오드리 탕을 임용한 나라 아니던가(그러나 대만 현지인을 만나면 정치인은 다분히 관료적이고, 정치판 역시 엉망이라고 거의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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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시선과 풀어내는 방식
어쨌든 간에 필자가 타이베이에서 접해온 대만의 현대미술도 꽤 파격적(?)이라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컬렉터들의 성향은 보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적어도 ‘시장’이 아닌 미술관의 풍경은 색다르고 진취적인 인상이 주를 이룬다. TFAM은 두말할 것 없고, 기억에 남는 사례로는 타이베이의 또 다른 현대미술관 MOCA 타이베이에서 2017년 열린 <Atemschaukel>이라는 작은 전시가 있다. 프랑스 비평가 기 소르망(Guy Sorman)의 제안으로 당시 관장이 직접 기획한 전시로 아픈 역사 속 개인과 사회의 트라우마를 다룬 2인전이었는데, 중국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의 미망인으로 베를린으로 망명한 아티스트 류샤(Liu Xia)와 대만 여성 작가 차이하이루(Tsai Hai-Ru)가 참여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인 두 작가는 각자의 상흔을 작업으로 승화하려는 치유의 예술을 보여줬는데, 뭔가 애달프지만 위로가 되는 아름다움으로 지금도 기억된다. 당시 MOCA 타이베이에서 진행하던 다른 기획전들도 인상 깊었는데, 음악을 매개체로 ‘시간’과 ‘기억’에 대해 생각하면서 우리네 삶을 곱씹어보는 전시, 그리고 ‘소리’가 지니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함의를 탐색하는 전시였다. MOCA 타이베이는 아시아 지역의 주요 미술관으로는 최초로 대대적인 퀴어 아트 전시 <Spectrosynthesis–Asian LGBTQ Issues and Art Now>로 화제가 된 미술관이기도 하다. 팬데믹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2021년 봄 광주비엔날레에 참가한 대만 파빌리온도 뇌리에 남는데, 주최 기관인 대만 동시대문화실험장(C-LAB)의 초청으로 8개 그룹에서 14명의 예술가가 참여한 전시로 앞서 언급한 대로 비슷한 운명의 질곡을 거친 대만과 한국의 근현대사를 소재로 몸·서사, 언어·의식, 가요·가사 등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해 눈길을 끌었다.
단순한 ‘연결 고리’를 만들어보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TB 2023은 타이베이의 미술 생태계에서 그동안 접해온 다양한 결의 조각을 마치 콜라주한 것처럼, 하지만 보다 역동적이고 다문화적인 ‘판’을 크게 펼쳐놓은 듯했다. 동시대 비엔날레의 단골 소재인 이주, 난민, 생태, 환경, 노동 등의 이슈도 다루었지만 우리가 직면한 일상의 딜레마를 보다 세세히 마주하면서 나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라 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더 나아가 편견을 깬다면 우리 모두의 화두가 될 수 있는 주제에 다가간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컨대 고도의 ‘테크’로 지배당하는 사회에서의 혼란이라든지 성 소수자를 비롯해 여러 의미에서의 소수자 문제 같은 것들이다. 아무래도 3명의 큐레이터가 공동으로 전시 기획을 총괄하다 보니 더 폭넓고 다채로운 면면이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다수의 국제전과 전시를 기획해온 프레야 추,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에디터이자 작가 브라이언 쿠안 우드(Brian Kuan Wood), 연구자이자 큐레이터 림 샤디드(Reem Shadid)가 그들이다. 3인 체제에서 다루는 콘텐츠의 반경이 넓어서일지는 몰라도, 그것이 대조든 유사든 전시 작품 간 서로 소통하는 ‘합’의 요소가 부족하다는 인상도 받았다(물론 개별 작품은 출중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굳이 구미 지역의 미술계 블루칩 작가, 그러니까 소위 스타 작가를 거의 내세우지 않고 다양한 작가를 소개한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여겨졌다(사실 미술계를 떠나면 ‘스타’라는 명패는 대중 사이에서는 대부분 힘과 의미를 잃지 않는가). 필자는 ‘초행’이라 직접 비교할 수 없었지만, 현지 언론의 반응과 여론을 살펴 짐작해보건대 미술판에서 유명세 있는 스타 큐레이터가 진두 지휘하지 않고 대만과 그 주변 지역들의 작가를 고심해 아우른 자문화적 정체성이 느껴진다는 호평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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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 코어’ 비엔날레 현장에서 누릴 수 있는 순간들
미술관 3개 층에 걸쳐 펼쳐진 전시의 핵심이 되는 매개체가 ‘음악’이라는 점은 앞서 언급한 타이베이 아트 신 특유의 매력과 맞닿는 지점이기도 하거니와, 설명적이기보다는 직관적으로 스며들어 대중, 특히 젊은 세대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는 효과를 내지 않나 싶다(이번 비엔날레 작가 명단에는 50여 명의 다국적 현대미술가와 뮤지션이 올라 있다). “음악, 그리고 음악에 다가가는 여러 방식은 비엔날레에서 다루는 이슈를 생각해보는 데 있어 중요한 관문(portal) 역할을 한다(비엔날레 공동 감독 프레야 추)”는 설명과 함께 감상은 물론 연주, 퍼포먼스, 청음 등의 프로그램을 꾸리는 ‘뮤직 룸(Music Room)’이 비엔날레 전시장에 넓게 터를 잡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공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마치 커다란 쿠션 같은 설치물에 눕거나 앉아 있노라면 작가들이 나와 편한 분위기에서 발표를 하고, 청중과 담소를 나누고,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는데, 주로 ‘뮤직룸’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전시를 볼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아마도 전시장에서 심미적으로 볼 때 가장 인상적인 작품의 하나로 꼽혔을 ‘워터셰드(Watershed)’(2023)라는 커미션 작품을 미술관 아래층에 놓인 뜰에서 선보인 베를린 거주 작가 나탸샤 사드르 하기기안(Natascha Sadr Haghighian)의 세션은 누군가를 보살피는 ‘돌보미’ 역할을 하는 이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DJ와 뮤지션이 나와 색다른 음악과 예술의 세계를 공유하기도 했다. 어쩌면 청중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이는 트랜스젠더 DJ로 명성 자자한 DJ 스프링클스였을 것 같다. 남다른 음악성과 개성으로 탄탄한 팬덤을 거느렸지만 1년에 몇 차례밖에 공연을 하지 않는다는 그(녀)가 비엔날레 작가로 초청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화제였지만, 워낙 달변에다 인생의 중요한 사건과 세계관을 스스럼없이 털어놓는 솔직함이 흥미로웠다. 물론 팬이라면 전시와 별도로 미술관 내에서 DJ 스프링클스가 몸소 펼쳐 보인 심야의 디제잉에 빠져들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에 더 환호했겠지만 말이다(실제로 음악도 좋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최애’의 순간은 80대 후반의 작가 사미아 할라비(Samia Halaby, b.1936)와의 만남을 꼽아야 할 것 같다. 뉴욕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팔레스타인 출신 작가인 그녀의 전시를 두바이에서 우연히 보고는 직접 만나지는 못한 채 현지 필자를 통해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제3국의 도시인 타이베이에서 대면한 것이다. 우아한 서정미 깃든 추상회화도 그리지만, 컴퓨터 작업을 기반으로 한 키네틱 페인팅을 수십 년에 걸쳐 해온 개척자. 놀랄 정도로 사진에서 본 모습 그대로인 그녀는 팔레스타인 작가로 살아온 데 대한 ‘한’을 구구절절 풀어내기보다는(현재의 정세에 분노는 했지만)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는 동시대 뮤지션과 협업하고, 나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저항의 퍼포먼스를 한다는 얘기를 신나게 이어갔다. 그녀가 고령에도 타이베이를 찾은 이유는 다름 아닌 키네틱 페인팅 작업을 활용한 라이브 퍼포먼스를 ‘뮤직룸’에서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세상의 고민 따위는 툴툴 털어버리고 흥겹고도 진지한 행보를 이어가는 80대의 창조혼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비엔날레 현장의 참묘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ART + CULTURE ’23-24 Winter SPE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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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Front Story_타이베이 비엔날레(Taipei Biennial) 2023_<Small World>_나와 너, 그들의 이야기… 우리의 화두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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