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의 도시에서 추구하는 수평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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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03, 2023

글 고성연

홍콩의 새 랜드마크 M+

현대 도시에서 랜드마크로 기능하는 미술관, 특히 동시대 미술을 담는 그릇인 컨템퍼러리 미술관의 존재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소장품이나 기획전 같은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우선 ‘건축’을 둘러싼 화제성을 거머쥐어야 언론과 대중의 눈길을 잡아끌 수 있기에 소위 ‘스타키텍트(starchitect)’로 불리는 스타 건축가들을 동원해 압도적인 건축미를 품은 미술관을 선보이는 전략이 ‘창조 도시’를 향한 여정의 필수 과제처럼 여겨진다(물론 대형 미술관 프로젝트를 따내려는 건축계의 경쟁 역시 치열하다). 소프트 파워를 우아하게 드러낼 수 있는 가시적인 사례 아닌가. 일찍이 ‘예술에 앞서 공간에 도취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작금의 인스타그램 시대에는 이 비판이 더 설득력을 얻게 됐고, ‘공간 창조자’인 건축의 스타성은 더 중시되는 현실이다. 그런데 팬데믹의 급습으로 ‘집콕’을 넘어서는 ‘공간’에의 갈망은 그야말로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미술관은 꽤 괜찮은 해소책이 되기도 한다. 그저 ‘모이는 장소’나 ‘과시하는 배경’만이 아니라 작품과 마주하며 관조하는 공간으로서도 말이다. 긴 공사를 거쳐 팬데믹 기간에 드디어 공개된 홍콩의 미술관 M+를 설계한 HdM의 건축가 피에르 드 뫼롱(Pierre de Meuron)이 소망하듯 ‘좋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면’ 더 바람직할 테고 말이다. ‘뮤지엄, 그 이상(+)’을 품어내고 싶은 M+ 사례를 통해 문화 예술 공간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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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다가갈 수 없다는 이유로 곧잘 핀잔을 받는 현대미술을 선보이는 미술관. 아무래도 ‘관(館)’이라는 단어 탓에 딱딱한 어감을 자아내기에 개인적으로는 ‘예술 공간’이나 ‘아트 스페이스’라는 표현이 더 와닿는다. 그 기저에는 아마도 공간(空間, space)이라는 단어의 매력적인 정체성이 깔려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공간은 사전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을 뜻한다. 그것을 채우는 무언가가 존재하기에 의미를 지닌다는 얘기도 된다. 채움의 역할에는 ‘시간’이 등장한다. 공간이라는 개념에는 ‘시간’이 배제되어 있기에 아무런 정체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건축 세계에서 자주 거론되는 논리다. 반면 장소(場所, place)라는 개념에는 필히 시간이 개입된다. 우리는 흔히 공간과 장소를 혼용하지만, 사실 어떤 공간을 ‘애정’한다면 그건 자신의 시간과 경험, 추억이 스며들어 있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간은 사람들의 시선과 호흡, 발길을 기다리며 뜻깊은 장소가 되기를 원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동시대 미술관이 작품이나 전시에 따라붙는 ‘난해함’이라는 꼬리표를 자주 달면서도 여전히, 아니 팬데믹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놀랄 정도로 더 큰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그저 ‘인스타그래머블’한 건축적 배경 덕분만은 아닐 것이다. 시대를 반영하는 다채로운 유·무형의 예술 콘텐츠를 비우고 채워내기를 반복하는 카멜레온 같은 공간으로서의 매혹이 분명 존재한다. 설계 돌입 시점을 기준으로 8년여의 세월을 거쳐 2021년 늦가을 드디어 대중 앞에 자태를 드러낸 M+ 역시 그러한 공간에 대한 포부를 품고 ‘Museum and More’라는 뜻에서 비롯된 이름을 갖게 됐다. 코로나 사태로 내려진 방역 규제가 전격적으로 풀린 올봄에야 비로소 지구촌 여행자들에게 공개된 홍콩의 새로운 랜드마크 M+. ‘공간 창조자’를 대표하는 건축가를 만나, 이미 3백만 명에 이르는 관람객을 맞이한 M+의 건축 여정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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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가장 흥미로운 건축 거장들(HdM)의 새로운 도전
비록 소수지만 어떤 건축가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수백, 수천 명의 관중을 모이게 하고 많은 문화 소비자로 하여금 그들의 인장이 찍힌 ‘공간 순례’에 나서게 할 만큼의 ‘마력’을 지닌다. 매머드급(한화 1조원을 훌쩍 넘기는 건축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다) M+ 설계 공모에서 선정된 스위스 건축 회사 HdM을 이끄는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듀오 자크 헤어초크(Jacques Herzog)와 피에르 드 뫼롱(Pierre de Meuron). 동갑내기(1950년생) 친구로 어린 시절부터 우정과 커리어를 키워온 이 듀오의 이름은 낯설게 느껴지더라도 HdM의 건축 여정을 간단히 들여다보면 아마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 베이징 올림픽 주 경기장, 도쿄의 아오야마 프라다 빌딩, 함부르크의 엘프필하모니, 그리고 가깝게는 서울 도산대로에 자리한 케이크 조각처럼 생긴 건물로 유명한 송은(SONGEUN) 등 세계 유수 도시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설계한 ‘스타키텍트’로 ‘건축계 노벨상’으로 통하는 프리츠커상도 일찌감치 받았다(2001년). 필자는 이 시대의 유명 건축가들이 차별된 기술을 구사해 대중을 경탄하게 하는 스펙터클과 공공적 이미지를 구현할 능력이 있는, 하지만 상업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셀러브리티’나 다름없다는 한 저자의 강도 높은 주장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정의와 비용 그리고 도시와 건축>). 사실 ‘정도’는 다르지만 그들 대다수도 사업가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막대한 상징 자본을 등에 업고 많은 보수를 받으면서도 의뢰인의 요구와 창조성 사이에서 크게 휘둘리지 않으며 ‘도시의 기억’을 좌우하는 건축 생태계를 호령하는 직업이라니, 많은 이들이 선망할 만도 하다.
그중에서도 HdM은 ‘시그너처 스타일’을 지문처럼 남기는 대신(예컨대 안도 다다오의 ‘노출 콘크리트’ 스타일) 프로젝트마다 유연하게 끊임없이 실험을 거치며 심미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작업을 이어온, 개인적으로도 가장 흥미롭게 지켜봐온 건축가 집단이다. 수년 전 송은에서 열린 간담회를 찾은 이 듀오에게 그처럼 지문을 남기지 않는 전형성의 탈피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건축적) 제약에서 비롯된 형태이기에 우리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 발견한 것이다’라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이들이 근대의 건축적 전범을 굳이 넘어서려 하지 않고 건축의 핵심 의제로 여겨지는 ‘표피’에 집중해온 이유를 일부분 설명해주는 대목이기도 했다(M+의 경우, 동양 건축의 전통적인 지붕에서 영감받았다는 세라믹 타일 소재의 ‘표피’가 눈길을 끈다). 송은 때 서면 인터뷰 당시 ‘모든 프로젝트 진행 시 닫힌 서랍에서 꺼내 쓸 수 있는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보다 항상 열린 리듬을 갖고 진행해왔다’고 답했던 피에르 드 뫼롱인데, 홍콩에서 만나니 이번 M+ 프로젝트만큼은 처음에 약간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고 털어놓을 정도로 전혀 다른 유형의 도전이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잘 알려졌듯 M+가 ‘아무것도 없는 구룡반도 서쪽 매립지에 세우는 아트 센터’라는 제안을 골자로 한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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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씽킹의 역학, 제약에서 공간을 ‘발견’하다
M+의 디자인 브리프는 명료했다. ‘아시아 최초의 글로벌 컨템퍼러리 비주얼 문화 센터’(전시 공간 규모만 17,000㎡, 약 5천1백 평이다). 구룡반도의 거대한 매립지를 문화 예술촌인 시주룽 문화 지구(WKCD)로 탈바꿈하는 정부 차원의 프로젝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컨템퍼러리 미술관을 말한다. “(건축가의 일은) 디자인 브리프를 해석해 하나의 건축물로 빚어내는 것이지요. 브리프를 받아 든 다음에는 부지(site)를 살펴보고요. 그런데 이게 텅 비어 있었죠. 매립지였으니까요.” 피에르 드 뫼롱은 “테이트 모던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그래도 기존 건물(발전소)이라도 있었는데…”라고 살짝 미소 지으면서 “게다가 그 밑으로는 기차가 지나가는 길(공항 철도)인데 그걸 그대로 유지해야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M+ 밑에는 공항철도 터널(Airport Express Tunnel)이 존재한다. 피에르 드 뫼롱은 당시 점선으로 처리되어 있던 ‘터널’이 담긴 현장 도면을 닮은 그림까지 직접 그려가면서 “(그런데) 이것이 아이디어의 단초(sparkle)로 작용했어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주어진’ 터널을 제약으로 여기지 않고 이를 공간의 근간으로 삼는 방식이다. 발전실을 입구 로비와 전시 장소로 개조한 그 유명한 테이트 모던의 ‘터빈 홀’을 다룬 방식과 닮은, HdM다운 해법이다. “뭔가 주어진다는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M+ 경우에도 공간을 규정하는(space-defining) 것(효과)이었죠.” 이는 HdM이 언젠가부터 자주 사용하는 용어인 ‘파운드 스페이스(found space, 발견된 공간)’의 창출로 이어졌다. 실제로 M+ 건물 안에 들어가면 대각선 방향으로 터널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지하 2층의 빈 공간(void) 주변에 ‘파운드 스페이스’라고 적힌 걸 볼 수 있는데, 현재 이 공간에는 일본 예술가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의 패브릭 설치 작업 ‘Death of Nerves’(2022)가 전시되고 있기도 하다(M+에서는 오는 5월 14일까지 쿠사마 야요이의 역대급 규모 회고전이 열린다). 메인 홀(G층) 라운지에는 쿠사마의 상징과도 같은 검은 땡땡이 무늬의 노란 호박’(2022) 2점이 놓여 있는데(예의 그 호박 같지만, 좀 이색적으로 생겼다), 이 공간은 입장권을 따로 사지 않더라도 누구나 들어와 감상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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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eum ‘너머(+)’를 꿈꾸는 공간의 역동적인 에너지
물론 시간이 몹시 빠듯한 게 아니라면 M+에 일단 들어왔는데, ‘호박’만 보고는 33개 전시실(gallery)을 비롯해 다양한 전시 공간을 품은 미술관을 두고 나가기는 아쉬울 법하다. 단지 규모가 큰 걸 넘어 ‘글로벌’을 지향하는 ‘아시아의 비주얼 문화 센터’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다채롭고 수준 높은 콘텐츠로 가득하다. 자크 헤어초크가 프라다의 후원으로 열린 ‘프라다 프레임’ 강연에서 ‘발걸음을 내디뎌 들어서는 순간 ‘다양성(diversity)’이 느껴진다’고 강조하기도 했는데, 회화, 조각, 영상 미술 등 현대미술만 다루는 게 아니라 디자인과 건축 전시관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고 영화관, 러닝 허브(교육) 등의 공간도 꾸린다. 아시아의 현대미술을 심도 있고 다각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구성도 눈에 띈다. 예컨대 현재는 쿠사마 전시 말고도 중국 현대미술사의 주요 자취를 아우를 정도로 ‘백과사전식’으로 소장품의 대다수(1천5백10점)를 M+에 기증해(일부는 매입) 화제가 된 스위스 컬렉터 울리 지그(Uli Sigg, 현재 송은에서도 그의 소장품 전시가 진행 중) 전시를 비롯해 홍콩의 현대사를 파노라마처럼 훑어볼 수 있는 전시가 펼쳐지고 있다. M+는 다양한 기능을 겸한다는 점에서는 파리의 퐁피두를 연상케도 하지만, 피에르 드 뫼롱은 도시에 미치는 영향의 성격을 감안할 때 런던의 테이트 모던, 함부르크의 엘프필하모니 같은 문화 예술 공간과 비교할 만한다고 말했다. “셋 다 도시 중심에 자리하고, 강이나 바다 같은 ‘물’을 끼고 있죠. 그리고 도시의 맥이 잘 흐르도록 하는 에너지를 선사할 수 있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그는 ‘침술 요법처럼 도시의 혈을 뚫어주는’ 역할에 대한 비유도 곁들이며 부디 M+가 다양성을 품은 채 에너지를 발산하는 아트 센터로 성장하기를 기대했다.
그는 다행히 시작선상에서는 긍정적인 기운이 느껴진다면서 ‘존재감을 발산하기 위해 반드시 제일 높은 건물이 될 필요는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실제로 M+는 홍콩 기준에서는 높지 않은 18층짜리 건물이고, 전시 공간은 대략 3개 층에 나뉘어 있다). 구룡반도 건너편 홍콩섬에서 잘 보이는 M+ 건물의 한 면을 큰 스크린으로 감싼 ‘M+ 파사드’도 그런 존재감의 원천이 되어주는 요소로 꼽았다(M+ 파사드에서는 예술 작품이 주기적으로 상영된다). M+는 건축물 자체도 수직적인 압도감이 부재하기에 사실 가까이에서는 큰 오라가 느껴지지 않는다. 건물들이 온통 하늘로 치솟은 수직의 도시(vertical city)에서 좀처럼 접하긴 힘든 ‘수평의 미학’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HdM의 말처럼 수직과 수평이 누운 T자형으로 교차하는 건물의 실루엣조차 야외로 나가 각도를 넓게 봐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외부의 화려함이 아니라 자연광이 군데군데 효과적으로 빛을 발하고 작품에 보다 잘 집중할 수 있는 동선과 구조 등 내부 공간의 미학이 미술관이라는 플랫폼에 잘 맞는 옷 같다(디자인만 아니라 사고와 시각에서도 ‘수평’을 추구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도). 그래도 M+를 방문한다면 안에만 머물지 말고 옥외의 ‘루프 가든’ 산책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홍콩섬이 보이는 탁 트인 풍경을 벗 삼아 바람을 쐬는 경험은 물론 피에르 드 뫼롱이 말한 좋은 에너지를 느끼며 ‘공간의 기억’을 쌓을 기회가 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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