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부산은 덩달아 들뜨지 않기가 힘들 정도로 활기를 뿜어냈다. 특히 서울에서 매년 가을 열리는 KIAF와 더불어 국내 시장을 떠받치는 양대 아트 페어로 자리 잡은 아트부산(Art Busan)이 열리는 초여름의 공기는 점점 활력을 더해가고 있다. 팬데믹이 드리운 장막도 이 솟구치는 항구도시의 쾌활한 에너지와 미술계를 감싸는 폭발적인 열기를 당해내지 못했다. 코로나19라는 돌발 악재가 터진 2020년에는 어쩔 수 없이 시기와 규모를 조정해야 했지만 지난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역대급’ 성적(작품 판매액 3백50억원대, 공식 방문객 8만 명 이상)을 냈는데, 올해는 그 기세를 시원하게 이어가면서 또다시 ‘기록’을 거뜬히 갈아치웠다. 그저 현대미술 장터인 아트 페어만의 얘기가 아니다. 해운대 일대가 들썩일 만큼 문화 예술 생태계의 역동성이 남달랐던 부산에 다녀왔다.
갤러리 열전과 주목할 만한 ‘New Comer’_GRAY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였다. 최근 미술계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호황기인지라 상반기를 대표하는 행사인 아트부산에도 인파가 몰릴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수치’로는 예상(6백억원 수준)을 뛰어넘는 결과가 나왔다. VIP 프리뷰를 시작으로 나흘간(5.12~15) 진행된 아트부산 2022는 10만 명 넘는 관람객을 동원하고 판매액은 전년 대비 2배 이상(7백46억원대 추정) 늘어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불과 한 달여 전에 열린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BAMA)도 10만 명 수준의 방문객을 불러모았는데, 다시 이 정도로 발길이 모였다는 건 현대미술 장터를 둘러싼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일부 갤러리들은 첫날부터 ‘솔드아웃(매진)’ 소식을 알리며 개막부터 열띤 양상을 띤 올해의 아트부산에는 1백33개 갤러리(국내 1백1개, 해외 32개)가 참여했다. ‘아트 페어 도시’로서의 가능성이 눈에 띈 2019년에 비해서는 다양성의 면모가 다소 떨어진 모양새다. 당시 17개국에서 1백64개 갤러리가 참가했는데, 그중 58개가 해외 갤러리였다. 여기에는 세계 최고 아트 페어 브랜드인 아트 바젤에 나가는 유럽 화랑도 처음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흔히들 아트 페어에도 ‘수명’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성장세를 지속적으로 끌어올리거나 유지하고 노화를 막으려면 ‘아트 신(scene)’을 이루는 다각적인 행보가 나란히 전개되어야 한다. 도시 자체적으로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인구가 타지에서 찾아올 정도로 매력적인 인프라와 콘텐츠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리다. 사실 컬렉터층이나 작가층, 미술관과 갤러리 등의 인프라 면에서 그다지 탄탄한 토대를 지녔다고 평가받지 못했던 부산이 3~4년 전부터 ‘아트 도시’로서 가능성을 내비친 배경에는 아트 신 자체가 풍부해진 변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2018년 을숙도에 부산현대미술관이 문을 열면서 생태, 환경, 노동 등 첨예한 사회 이슈들을 아우르는 동시대 예술을 소개하는 동시에 미술 축제인 부산비엔날레의 메인 전시장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으며, 국내 메이저 화랑인 국제갤러리 부산점이 망미동의 복합 문화 단지 F1963에 둥지를 틀었는가 하면, 지역 기반의 작가를 지원하는 중소 갤러리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또 아트부산의 무대인 BEXCO 전시장 이웃에 자리한 부산시립미술관은 2019년부터 별관인 ‘이우환 공간’에서 세계적인 현대미술가를 초청하는 기획전 시리즈 ‘이우환과 그 친구들’을 해마다 열면서 수준을 높였고, 최근 들어 흥미로운 전시 콘텐츠로 대중성과 내실을 동시에 꾀하고 있다. 현재 한국현대미술의 주요 지점에 위치한 작가를 소개하는 개인전의 4탄으로 ‘몸’에 대한 주제 의식을 꾸준하게 펼쳐온 <이형구> 전시(오는 8월 7일까지)와 관람객들이 요가, 댄스 등 여가 콘텐츠를 미술관에서 함께하는 기획전 <나는 미술관에 ●●하러 간다>(오는 10월 16일까지)도 호응을 얻고 있는데, 이 기간 부산을 찾은 아트부산 방문객의 ‘발품’도 덩달아 팔게 했다.
시그니엘 부산이 자리한 부산 달맞이길의 명물 갤러리 조현화랑은 올해 단단히 벼른 느낌이었다. 담쟁이 덩굴로 덮인 소담스러운 건물을 확장해 2층 공간까지 거느린 전시 무대를 공개했는데, 그 첫 단추로 ‘숯의 작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이배 작가의 개인전 <oblique/비스듬히>를 선보였다(오는 7월 3일까지). 달맞이길의 새 공간과 더불어 해운대 공간에서도 동시 진행되는 이 전시는 일단 1층 전시장 전체를 수놓고 있는 존재감 넘치는 대형 설치 작업부터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조현화랑 큐레이터는 “1층 공간 자체가 마치 커다란 캔버스인 듯 벽과 바닥을 종이로 씌워 그림 공간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이전 전시들과 차별화된다”면서 공간과의 조응이 남다른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관람객은 그림이 그려진 종이 위에 올라 작품의 일부가 된 느낌을 오롯이 경험할 수 있다. 또 새롭게 자리한 2층에는 검정 숯으로 화면을 만들고 그 위에 오일 파스텔을 활용해 흰 선들을 그린 작품 ‘불로부터(Issu du feu white line)’ 시리즈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공간과의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조화를 이끌어내는 느낌이었다. 이배 작가는 바닷가와 맞닿아 있는 조현화랑의 특성을 생각하면서 공간 자체를 하나의 화면으로 해석했고, 부산 밤바다에 비가 내리는 풍경을 연상했다고.
루이 비통 <장인 정신>展 등 ‘장외’ 행사 풍성
미술계에서 아트 페어의 존재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저 ‘큰손’ 컬렉터의 취향을 반영하고 유행을 주도하는 현대미술 장터의 수준을 넘어 역량 있고 참신한 작가를 새롭게 조명하는 전시 콘텐츠와 실험적인 시도가 녹아든 작품을 접하는 무대이자 여러 이슈를 논하는 담론의 장으로도 역할을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트 페어라는 콘텐츠 하나만으로 부산이 아시아 지역을 대표하는 ‘아트 도시’로 발돋움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홍콩, 마이애미 등에 진출해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아트 바젤처럼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만한 아트 페어의 몫도 중요하기는 하다. 이 같은 맥락에서 위성 아트 페어의 등장이라든지 공공 미술관의 수준 높은 콘텐츠, 도시 재생 정책으로 꾸려온 예술 마을 조성 사업, 고은사진미술관 같은 특화 공간, 그리고 크고 작은 상업 화랑들의 다채로운 행보는 반길 만하다. 매년 결이 대동소이한 갤러리들의 부스 구성과 콘텐츠가 지속되면 어느덧 관람객은 싫증 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별도의 공간을 빌려 아트 페어 참가와 동시에 ‘장외 전시’를 펼치는 갤러리라든가, 아예 브랜드 차원에서 독립적인 전시 콘텐츠를 내놓는 풍경도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게 아닐까 싶다. 예컨대 ‘여행의 예술’을 브랜드 DNA에 담고 있는 루이 비통은 올해 해운대 마린시티 아이파크에서 VIP 고객들이 장인의 섬세한 손길이 닿은 다양한 맞춤 제작 트렁크들, 그리고 글로벌 디자이너들과 펼쳐온 ‘오브제 노마드’라는 협업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아트 퍼니처를 접할 수 있는 <장인 정신> 전시를 마련해 쏠쏠한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