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만의 하계 올림픽을 앞둔 프랑스의 행보
팬데믹이라는 희대의 복병을 만나는 바람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올해의 도쿄올림픽. 그래도 지구촌 최대 스포츠 축제답게 여전히 역사적인 장면도, 감동 스토리도 많았다. 그런데 폐회식 때 차기 개최지인 파리를 소개하며 뜬 홍보 영상에 에펠탑이 보이자 문득 2024년 올림픽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마음이 절로 솟아났다.
모두가 바라마지않듯 ‘관중은 있고 마스크는 없는’ 올림픽이 기대되기도 하거니와, 무려 1백 년 만에 하계 올림픽을 치르는 만큼 파리의 포부가 남다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단 ‘무대’ 자체가 예술이다. 에펠탑 아래, 콩코르드 광장, 베르사유 궁전 등 파리의 명소를 비롯해 보르도, 낭트, 마르세유 등 프랑스 곳곳에서 경기가 펼쳐칠 예정이다. 올림픽만 겨냥한 건 아니지만, 도시마다 매혹적인 하드웨어와 소프트 콘텐츠를 새롭게 장착하고 나서고 있는 건 물론이다. 여행길이 막혀 있는 동안 눈을 사로잡을 만한 랜드마크들도 등장해 기대감을 더 부추긴다.
모든 인간은 완전히 자연적인 생물로 삶을 시작하지만, 점차 돌이킬 수 없이 문화적 동물로 변한다. _엘렌 디사나야케
얼마 전 서울 이태원에 문을 연 한 매장은 프랑스 파리의 빈티지 감성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공간과 오브제로 트렌드세터들 사이에서 화제를 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파리를 본거지로 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아스티에 드 빌라트(Astier de Villatte)의 서울 플래그십 매장이다. 일부러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을 택했다는 이 매장은 식기류를 비롯해 향수, 책, 가구, 그림 등으로 아름답게 채운 5층 공간을 둘러보면 느낄 수 있듯 몇 세기 전으로 돌아간 듯 고아한 감성이 묻어난다. 특히 루프톱 카페에 앉으면 가구나 소품까지 영락없이 파리 감성임을 실감할 수 있다. 파리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한 뒤 벌써 몇 년째 가보지 못했다는 필자의 지인은 “아스티에 드 빌라트를 보니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했다. 그녀의 말인즉슨 원래는 파리를 그다지 그리워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제는 없던 향수병이 도질 판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게 파리든 아니든, 우리에게는 그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쏘다니고 타 문화권을 경험하고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진짜배기 여행에 대한 갈증이 턱 밑까지 차올라 있기 때문일 터다. 1세기 만의 하계 올림픽을 앞둔 프랑스의 기운이 남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팬데믹이 지구를 뒤덮은 지도 어언 2년. 하늘길이 완전히 막힌 건 아니지만 여행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여러모로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고, 심지어 건강상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 이 때문에 평소 같으면 세계 곳곳을 다니는 아티스트임에도 자신의 작품이 설치된 모습을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현재 서울 소격동의 국제갤러리 K1에서 개인전(오는 10월 31일까지)을 진행하고 있는 단색화 거장 박서보에게도 벌어진 일이다. 프랑스 남부인 프로방스 지역에서 열리는 자신의 뜻깊은 개인전을 몸소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파리 퐁피두 센터, 런던 밀레니엄 돔, 더현대 서울 등을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가 은퇴하기 전에 설계를 맡은 마지막 작품인 갤러리 공간의 개관전인데도 말이다. 엑상프로방스 도심에서 좀 떨어진 곳에 끝을 모를 만큼 방대하게 펼쳐져 있는 샤토 라 코스트(Cha^teau la Coste) 내에 자리한 리처드 로저스 드로잉 갤러리에서 페로탕 갤러리와의 협업으로 지난 8월 말부터 열리고 있는 박서보의 <묘법(Ecriture)> 전시다(연말까지).
한쪽 끝이 고정되고 다른 끝은 받쳐지지 않은 ‘외팔보(cantilever)’ 형식으로 지은 이 갤러리는 ‘공중에 떠 있는(floating) 갤러리’라 불린다. 가파른 비탈에 살짝 걸쳐져 있는 느낌이라 위태로워 보이기도, 경쾌해 보이기도 한다. 안에 들어서 양쪽 벽을 감싼 그림들이 천혜의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통창을 가운데 두고 펼쳐지는 광경이 사진으로만 봐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무려 200만m2(60만5천 평)에 이르는 넓디넓은 샤토 라 코스트에는 너른 포도밭을 병풍처럼 두고 프랭크 게리, 장 누벨, 루이즈 부르주아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조각이나 설치 작품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데, 그야말로 황홀한 감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자연 속 ‘아트 센터’다. 개인적으로 필자의 ‘최애’ 방문지 중 하나로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도 한 곳인데, 여기에 리처드 로저스 드로잉 갤러리의 ‘입성’으로 또 하나의 명물이 추가됐다. “아주 기가 막히죠?” 실제로 국제갤러리 간담회에서 만난 박서보 화백도 샤토 라 코스트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거듭 찬사를 보내며 코로나19로 직접 프로방스로 떠나지 못하는 현실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래도 수년 전 방문했다가 샤토 라 코스트라는 공간의 미학에 매료되어 꼭 전시를 열고 싶었다는 박 화백의 소망은 이뤄진 셈이다.
샤토 라 코스트에는 ‘미술 한류’의 선구자로 한국이 낳은 또 다른 거장 이우환의 작품이 영구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2016년 여름 이곳에서 전시를 열었던 그는 같은 해에 ‘House of Air’라는 작품을 남겼다. 이우환은 ‘베르사유 작가’로 불릴 만큼 프랑스에서 환대받는다. 베르사유는 2008년부터 세계적인 현대미술가들을 초대해 궁과 정원에서 전시를 펼치며 역사적 공간을 새롭게 해석하는 행보를 이어왔는데, 이우환은 2014년 협업 작가로 선정된 인연이 있다. 그와 프랑스의 연결 고리는 더 탄탄해질 듯하다. ‘해바라기’나 ‘밤의 카페 테라스’ 등 빈센트 반 고흐 작품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소도시 아를(Arles)에 전시 공간을 품은 이우환 재단(Fondation Lee Ufan Arles)이 들어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팬데믹 이전에 프로방스를 여행하다가 아를을 찾은 적이 있는데, 마침 이우환 재단 미술관 부지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건축 설계는 이우환의 나오시마 미술관을 진행한 안도 다다오가 맡았다.
아를은 원형경기장 등 로마 유적이 도심 곳곳에도 스며들어 있는 고색창연한 도시인데, 금세기를 수놓은 현대 건축가들의 작품이 최근 계속 들어서고 있어 흥미롭다. 구겐하임 빌바오의 주인공인 ‘스타키텍트’ 프랭크 게리의 설계로 지은 루마 재단(Luma Arles) 단지의 타워 역시 그중 하나다. 프랭크 게리 특유의 강렬한 디자인 스타일을 말해주는 듯한 구겨진 금속의 물결 같은 건물 파사드가 인상적인 이 9층짜리 타워의 상단부는 반 고흐의 풍경화 속 빛 스펙트럼처럼 햇살을 받으면 묘한 색조로 반짝거리는데, 어느새 아를의 현대적인 아이콘 같은 랜드마크가 되었다. 건물 안에는 전시 공간은 물론 강당, 도서관, 아티스트 작업실, 카페 등 다양한 시설이 있다. 이 랜드마크의 배경에는 스위스 제약 그룹의 상속자로 아를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마야 호프만(Maja Hoffmann)이라는 인물이 있다. 아를의 자랑인 사진 축제를 비롯해 루마 재단, 동시대적 예술성을 반영한 호텔과 파인 다이닝에 투자하는 등 아를에 현대적인 활기를 다각도로 불어넣고 있는 일등 공신이다.
아담한 소도시로 이루어진 프로방스 지역이 이러할진대 수도인 파리가 팔짱 끼고 유유자적할 리 없다. 실제로 올 들어 파리의 도시 풍경에는 새롭고도 강력한 활력소가 더해졌다. 하나는 문화 예술계를 들썩인 피노 컬렉션의 어마어마한 전시 공간이다. LVMH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과 더불어 럭셔리업계의 양대 산맥이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예술계 큰손이기도 한 프랑수아 피노 회장의 현대미술품 컬렉션을 모아놓은 파리의 프로젝트가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피노는 현재 구찌, 생 로랑, 발렌시아가 등의 브랜드를 거느린 케어링 그룹의 창업주(아들인 프랑수아-앙리 피노 회장이 현재 케어링 그룹의 수장이다)로 베니스에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전시 공간을 두 곳에 두고 있었지만, 자신의 모국 수도에 미술관을 여는 건 남다른 의미가 있을 터. 그가 평생에 걸쳐 수집해온 컬렉션을 담아낸 그릇은 심지어 파리 도심 레알 지역의 역사적 기념물인 옛 상업거래소(Bourse de Commerce) 건물이다. 피노 명예 회장의 베니스 프로젝트를 도운 안도 다다오가 레노베이션 작업을 맡았는데, 지난봄 서막을 알리는 개관전 <Ouverture>와 더불어 대중에 공개되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수 세기 전의 시대를 아우르는 화려한 프랑스 건축양식과 안도 다다오 특유의 노출 콘크리트의 묘미를 살린 미니멀한 설계 미학의 앙상블뿐 아니라 다국적 작가들을 품은 컬렉션 자체도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음은 물론이다. 특히 미술관의 중심축인 원형 전시관 로통드 홀은 외부의 빛이 스며드는 유리 돔 천장과 콘크리트 실린더의 조화가 압권인데, 여기에 우르스 피셔의 왁스 조각 시리즈와 19세기 천장화의 대비가 대구를 이루는 듯하다.
이어 지난여름, 파리에는 또다시 장안에 떠들썩한 화제가 된 주인공이 등장했는데, 이는 미술관도 축구장도 아닌 백화점이다. 퐁뇌프 다리 인근에 문을 연 사마리텐(La Smaritaine) 백화점. 하지만 그저 백화점이라고만 하기에는 파리지앵이 오랜 세월 ‘애정’해온 명소를 재단장해 16년 만에 대중에 선보인 역사적, 문화적 프로젝트다. 소설가 에밀 졸라가 ‘현대 상업의 대성당’이라고 불렀던 이 역사적 건축물을 2001년 LVMH 그룹이 인수해 무려 1조원을 들여 공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재개장 행사에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까지 참석했을 정도니 그 의미를 짐작할 만하다. 18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명물 백화점은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건축양식을 품고 있는데, 센강을 바라보는 전면부는 여전히 그 같은 풍모를 간직하고 있지만 후면부는 달라졌다. 상점이 즐비한 도로를 향해 있는 후면부는 일본의 건축가 그룹 사나(SANAA)가 유리 패널을 커튼처럼 드리운 파사드를 만들어 현대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부도 아르누보의 명작으로 꼽히는 공작새 프레스코 회화까지 말끔하게 복원된 퐁뇌프 건물의 고전적인 분위기와 사나가 맡은 리볼리 건물의 미니멀한 분위기는 극명하게 갈린다. 사마리텐 단지 안에는 5성급 갤러리, 스파, 사회 주택, 탁아소 등 다양한 시설이 모여 있다. 오늘날 서울을 비롯한 대다수 메트로폴리스에서 볼 수 있듯 백화점은 더 이상 커다란 상점이 아니라 복합 공간임을 보여준다. 파리지앵이 ‘사마르’라는 애칭으로 부를 만큼 백화점의 대중화를 상징했던 것에 비하면 ‘too much luxury’라는 지적이 있지만 말이다.
※ 9, 10 프랑스 관광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