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대구 스피릿을 되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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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5, 2017

글 김민서

‘도시의 세기’라 불리는 21세기에 도시 경쟁력은 곧 국가 경쟁력이다. 예술은 결코 순위나 기록 싸움을 하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지만, 문화적 위상을 끌어올린다는 차원에서 도시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지역 주민의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순기능을 지니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세계 도처의 중소 도시에서 크고 작은 담론이 펼쳐지는 문화 예술 행사가 개최되는 사례가 꽤 많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의 경우, 미술을 포함해 10개 이상의 비엔날레가 전국에 걸쳐 열리고 있지만 ‘브랜드 인지도’와 ‘수준’을 겸비한 선례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비엔날레 과잉’으로 외려 비난까지 받는 현실, 어떤 타개책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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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유럽은 온통 ‘아트’로 달아올랐다. 아트 바젤(Art Basel)과 카셀 도쿠멘타(Kassel Documenta),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Mu··nster Skulptur Projekte), 그리고 베니스 비엔날레, 리옹(Lyon) 비엔날레와 이스탄불(Is-tanbul) 비엔날레 등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올해 꼭 유럽을 방문해야 할 큰 행사가 있었다. 게다가 5년에 한 번 열리는 카셀 도쿠멘타와 10년마다 열리는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가 겹치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여기에 역시 시기가 겹치는 아트 바젤, 베니스 비엔날레를 아우르는 미술 여행을 워낙 많은 이들이 떠나는 바람에 17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지식 여행을 따 올해를 ‘그랜드 아트 투어의 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트 바젤과 베니스 비엔날레는 워낙 유명해졌다지만, 아마도 미술에 관심이 없다면 카셀과 뮌스터라는 도시 이름조차 생소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의 이 중소 도시들은 어떻게 국제적인 예술 도시가 된 것일까?


작지만 강한 문화 예술 도시들
독일 중부에 자리한 카셀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 대부분이 파괴되고 인구 5분의 1만 살아남은 아픔을 지닌 도시였다. 이런 상흔을 치유하고 1930년대 나치에 의해 퇴폐예술로 낙인찍힌 독일 현대미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1955년 카셀 예술대학 교수이자 작가인 아르놀트 보데(Arnold Bode)가 도쿠멘타를 창설했다. 이후 도시의 분위기가 점차 바뀌었고, 이제 5년마다 도쿠멘타가 열리는 해면 인구 20만 명의 소도시에 1백만 명 정도의 방문객이 다녀간다. 독일 북서부의 작은 대학 도시 뮌스터에서는 10년에 한 번씩 조각 축제가 열린다. 그런데 이 행사의 탄생 스토리가 흥미롭다. 1975년 영국의 추상 조각 대가 헨리 무어의 작품이 설치되자 뮌스터 시민들은 ‘울퉁불퉁한 작품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반발했다고. 이를 계기로 공공 미술에 대한 담론이 싹텄고, 결국 시민들에게 현대미술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야외 조각 미술전을 기획했다. 1977년 이렇게 작은 공공 프로젝트로 시작된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이제 세계적인 현대미술 축제로 여겨진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1백2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비엔날레의 시초다. 과거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고, 지금은 관광 명소인 베니스는 상업주의가 일찌감치 자리 잡고 다양한 문화가 섞여 국제적인 예술 행사가 꽃피우기 알맞은 환경이었다. 비엔날레 덕분에 베니스는 아름답지만 낡은 고도(古都)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적인 아트 도시로 거듭났다. 프랑스 리옹의 경우 요즘은 미식의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1991년 리옹 비엔날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도 이미 예술의 도시로 성장해왔다. 1970년대 리옹의 미대생 10명이 무색 도시를 벽화로 장식한 공공 미술 프로젝트가 촉매제로 작용했다. 아시아에도 눈여겨볼 만한 사례가 생겨나고 있다. 일본에는 ‘예술의 섬’으로 지구촌 곳곳의 방문객을 끌어모으는 나오시마가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중국에서는 상업 메카인 상하이가 2019년 개관을 앞둔 퐁피두 미술관 분관 외에 이미 많은 미술관과 갤러리가 들어서 역동적인 아트 허브로 발돋움하고 있다.


문화 예술 행사가 범람하는 한국
경제 수도인 상하이를 제외하면 카셀, 뮌스터, 리옹, 나오시마, 심지어 베니스조차 그 나라의 제1 도시가 아니다. 인구와 산업이 집중한 파리, 런던, 뉴욕처럼 메트로폴리스가 아니라 지방의 중소 도시들이다. 하지만 역사와 환경을 극복하고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국제적인 예술 도시로 성장했다. 한국은 모든 문화와 산업이 수도 서울에 몰려 있는 집중화 문제가 심각한 나라다. 물론 지방 분산을 위한 노력이 없지는 않았지만, 주요 행사는 대부분 서울에 포진해 있다. 그나마 ‘비서울’ 지역의 대표적인 미술 행사로는 2년마다 열리는 광주 비엔날레가 있다. 1995년 광복 50주년과 당시 문민정부가 지정한 ‘미술의 해’를 기념하고 한국 미술의 부흥이라는 정책적인 의도에서 창설한 행사다. 도시 인프라가 부족했던 광주는 애초에 대상 지역이 아니었지만, 지방 도시를 키운다는 개발 의지,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받은상처를 치유하고 민주 정신을 기린다는 명분에 힘입어 개최지로 결정됐다. 2005년에는 자매 비엔날레인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가 생겼다(짝수 해에 열리는 광주 비엔날레와 교차로 홀수 해에 개최된다). 역사로 보자면 광주보다 더 오래된 부산 비엔날레가 있다. 부산 비엔날레의 출발은 1981년 개최된 부산 청년 비엔날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국내 최초의 비엔날레이자 지역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타 지역과 차별성을 띤다. 2011년부터 부산 비엔날레에서 분리된 바다미술제가 홀수 해에 열려 사실상 부산에서는 매년 미술 축제가 열리고 있다. 여기에 아트 부산과 부산 국제 아트 페어도 있다. 사실 1990년대 이후 비엔날레라고 불리는 행사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비엔날레를 발판으로 지방의 중소 도시가 국제도시로 성장하고자 하는 바람을 반영한다. 올해만 해도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를 위시해 청주 공예 비엔날레,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서울 도시 건축 비엔날레 등이 열렸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참가자와 관람객 수와 상관없이 질적인 성장은 제자리걸음이다. 일각에서는 비엔날레가 운영 조직의 폐쇄성과 지역성 때문에 예술적 거대 담론을 형성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정부 지원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정권의 영향을 피할 수 없는 아트 비엔날레의 구조적 현실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입장권 강매, 지역 작가와 업체 밀어주기 등 의혹도 매년 떠오르는 이슈다. 지난 9월 28일부터 10월 1일까지 열린 광주 국제 아트 페어의 경우도 전체 부스 중 대부분이 지역 작가들에게 판매됐고, 국내외 다양한 갤러리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해 ‘국제’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무색했다는 평을 얻었다.


아티스트들의 진정한 보고, 대구
‘국제’라는 타이틀을 단 행사의 유무를 떠나 ‘자산 가치’로 보면 사실상 한국 근현대미술의 보고는 대구다. 곽인식, 김구림, 이강소, 최병소 등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과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가들 중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 지역 출신이 많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구는 17세기 경상도를 관할하던 경상감영이 설치되고 일제강점기인 1905년에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도시로 성장했다. 이러한 배경 덕에 대구는 섬유 패션의 도시 이전에 연극과 오페라 등 공연 문화가 발달해 한때 서울 다음으로 극장이 많은 곳이었고, 전후 사회, 정치적 격변기이던 1950~60년대에는 화단의 진취적인 창작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57년 창립한 모던아트협회에 정점식 작가가, 서울대 출신 작가 단체 ‘앙가주망’에 박광호 작가가 참여하는 등 한국 현대미술을 이끈 주도 세력에는 거의 대구 출신이 빠지지 않았다. 1970년대에는 이상회, 신조회 등 미술 단체가 결성되면서 전국에서 가장 활기찬 현대미술의 장이 됐다. 대구에서 다양한 예술 문화가 꽃피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요소가 있다. 우선 당시 지방에서 유일했던 대구 미국문화원이 지역 작가들에게 바다 건너 이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했다. 미국문화원 화랑에서는 1970년대부터 리처드 프랭클린, 안셀 애덤스 등의 전시가 열렸고, 작가와 미술학도들은 <아트 포럼>, 일본 <미술 수첩> 같은 해외의 문화 예술 잡지와 서적을 접하면서 세계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화단의 진보 성향을 바탕으로 1974년에는 한국 최초 현대미술제인 대구현대미술제가 개최됐다. 서울보다도 1년 앞선 시기다. 대구시 달성군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작가들이 모여 기성 화단에 대한 반발로 시작한 대구현대미술제는 모더니즘과 전위, 행위 예술 등을 선보여 한국 미술사상 가장 혁신적이고 다양한 실험의 장이었다. 김옥렬 평론가는 “1974년부터 1979년까지 현대미술제가 열렸을 즈음을 대구의 나이 지긋한 작가들은 소위 ‘좋았던 시절’로 기억한다”며 학연 등 수직 관계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서울과 달리 대구 작가들은 각자의 개성을 수평적으로 지켜나갈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무엇이 달랐나? 화랑의 활약과 독보적인 컬렉터층
서울 다음으로 화랑이 많은 대구에는 일찍부터 화랑이 발달했다. 부산보다 15년가량 앞서 화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수화랑과 대구백화점화랑(대백프라자갤러리 전신) 같은 갤러리가 있었으며 1980년대에는 현대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공갤러리(리안갤러리 전신)와 인공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수화랑에서 ‘한국 최초의 아트 디렉터’라 불린 황현욱이 1988년 개관한 인공갤러리는 최초의 현대미술 전문 화랑으로, 대구 현대미술을 주도했다.
대구는 지역 작가들로 뭉친 집단보다는 작가 개개인의 색이 강한 곳이다. 최초의 추상화로 간주되는 ‘파란’으로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주경 화백은 대구 출신은 아니지만 광복 이후 대구에 정착해 지역 미술을 포함한 전반적인 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얼마 전 계명대 대명캠퍼스 극재미술관에서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연 정점식 작가는 1960년대 초반 계명대에 미술학과를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학강미술관과 갤러리 분도에 이어 올해만 세 번의 전시를 연 것만 봐도 대구 화단에서 차지하는 정점식 작가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강정대구현대미술제의 태동을 주도한 작가들 중 한 명인 설치미술가 김영진(1946년생)도 중요한 인물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뒤늦게 작품이 등록됐지만 그는 1970년대부터 비디오, 설치, 사진, 이벤트 등 다양한 장르의 실험적인 작품 활동을 했다. 한국 근대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서양화가 이인성, 1세대 여성 행위 예술가 정강자, 백남준 이후 해외에서 가장 호평을 받는 김수자, 서도호 작가의 부친인 동양화가 서세옥 등도 대구 출신이다. 이들이 각자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1970~80년대 거리낌 없는 비평과 논쟁 문화가 버티고 있다. 그래서 당시 대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작가들은 잔뜩 긴장한 채 준비해야 했다는 후문도 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지방마다 현대미술제가 봇물을 이뤘다. 미술제가 유행이 된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전시 형태나 내용, 참여 작가 등 여러 면에서 거의 비슷하다는 점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런 점을 의식해 이강소 작가는 5회 대구현대미술제 당시 한국과 일본의 젊은 작가들이 함께 문제를 모색하는 행사를 기획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1980년대 대구에서는 일본과의 교류 전시가 종종 열렸다.
화랑과 화단이 발달했으니 당연할 수도 있지만, 대구는 남달리 두꺼운 컬렉터층으로도 부러움을 사왔던 도시다. 이제는 1970~80년대 컬렉터들의 자녀 세대로 대물림되면서 한층 ‘글로벌’한 감각을 지녔다는 얘기도 나온다. 경매 회사들이 눈여겨볼법하다. 실제로 2007년 대구MBC가 K옥션과 업무 제휴를 맺어 옥션M을 설립한 적이 있고, 올가을 서울옥션은 2009년 이후 8년 만에 다시 대구의 문을 두드렸다.


다시 주목받고 있지만…
물론 오늘날의 대구가 혁신을 주도하고 한국 미술 사조를 이끈 1970년대처럼 빛나고 있지는 않다. 지역 미술계는 활력을 잃었다. 그래도 1979년 5회를 끝으로 맥이 끊긴 대구현대미술제가 2012년 달성문화재단의 주도로 ‘강정대구현대미술제’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는 점은 반갑다. 아직은 국제 행사로 발돋움하기에 여러모로 부족해 보이지만 지역 아티스트들의 활동과 교류를 북돋는 차원에서 바람직하다. 대구미술관이 개관한 지 이제 6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풍부한 DNA를 지닌 도시답게 수준급 전시를 많이 기획해오면서 지역 시립미술관의 본보기를 보이고 있다. 오는 2020년께는 국보급 사립 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이 대구에 상설 전시관을 열 예정이다. 문화 예술 사랑이 지극한 대구의 풍토나 간송의 위상을 볼 때 고무적인 일이다. 몇 년 전 이우환미술관 건립이 추진되다가 어그러진 일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글로벌 문화 도시’라는 타이틀을 놓고 보면 대구를 비롯해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역 도시들은 갈 길이 멀다. 아트 페어와 비엔날레가 동네 축제 수준이나 예산 낭비가 심한 ‘무늬만’ 국제 행사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작가들의 활발한 연대, 심도 있는 미술 비평과 담론, 이를 받아들 수 있는 화단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거의 반세기 전인 ‘1970년대 대구’의 정신이야말로 작금의 한국 미술계에 가장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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