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움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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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1, 2012

에디터 고성연

인터넷과 스마트 기기로  점철된 소통의 시대에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우리의 뇌는 혹사당하고 있고, 지성은 침식되고 있다는 위기론이 싹트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마음은 행복할까? 고독과 교류의 균형을  맞춰 똑똑하고 행복해지는 한 해를 만들어보자.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 좋은 본성과 너무도 오랫동안 떨어져 시들어가고, 일에 지치고, 쾌락에 진력이 났을 때, 고독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가.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의 작품 ‘서곡(The Prelude)’에 나오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바쁘게 돌아가는’이라는 구절을 보면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이들에게도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느껴지는 일상의 분주함은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삶을 압박했던 것 같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라고 개탄하는 내용이 고대의 함무라비 법전에도 담겨 있다는 사실과 비슷한 이치일 터다. 인간의 본질이 노동을 숙명으로 하는 ‘호모 파베르’에 가깝든지, 유희를 추구하는 ‘호모 루덴스’에 치우치든지 간에, 그 시절에도 사람들은 분명 나름대로 바쁘다고 느끼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소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 우리들은 정말이지 심각하게, 다른 방식으로 분주하다. 직장인이든 학생이든 주부든, 나이와 직업에 상관없이 모두가 인터넷 미디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스마트한’ 생활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고, 구글 검색을 하고, 이메일을 수시로 훑어보고,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글을 새로 올리고, 트위터로 쉴 새 없이 따끈따끈한 소식을 담고 나르고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 갤럭시, 아이폰, 블랙베리와 같은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아이패드와 넷북, 스마트 TV 등 온갖 첨단 디지털 기기로 점철된 ‘스마트 세상’에서는 잠잘 때를 제외하면 한시도 ‘연결돼 있는(connected)’ 상태를 벗어나기가 힘들다.
이처럼 끊임없는 소통을 가능케 하는 ‘스마트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정작 똑똑해지고 있을까? 보다 효율적인 삶을 살고 있을까? 확실히 인터넷은 정보의 검색을 용이하게 하고 트위터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는 여론의 새로운 창구 역할을 거의 실시간으로 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순기능을 발휘한다. 그러나 스마트 미디어가 뿜어내는 정보의 홍수와 관계의 역학에 지배되고 있는 우리 인생은 정작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심적, 물리적 여유를 박탈당한 듯하다. 워즈워스가 읊조린 것처럼 ‘고독을 반갑게 느낄’ 틈조차 없어진 것이다. 정말 중요한 건, 굳이 온라인 게임 중독과 같은 극단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스마트 미디어에 빠져들수록 우리는 산만하고 멍청해지는 부작용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은 도구일까? 아니면 인간이 인터넷의 도구일까?

마이크로소프트(MS)든 아래아한글이든 한 가지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에 익숙해지면 좀처럼 바꾸기 힘들다. 오죽하면 ?마누라는 바꿔도 워드는 못 바꾼다”라는 얘기가 나왔을까. 종이와 펜으로는 뭔가를 끼적거리는 정도는 몰라도 제대로 된 글을 완성하기 힘들다는 경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혹시 종이에 쓸 때와 스크린에서 키보드로 작업할 때 생성되는 콘텐츠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고 느껴본 적이 있는가?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자 시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와 유사한 상황을 실제로 겪었다. 한때 시력 약화와 만성 두통으로 일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던 그는 당대의 발명품인 타자기 덕에 저술 활동을 재개했다. 일단 익숙해지니 눈을 감고도 손가락 끝으로만 타이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작곡가 친구인 하인리히 쾨젤리츠는 니체의 글에 미묘하지만 변화가 생겼음을 감지했다. 타자기를 사용하면서 보다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가 된 것이다. ?내 생각도 펜과 종이의 질에 영향을 받는다”라며 새로운 도구의 파장에 대해 언급한 친구의 편지에 니체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맞아. 글쓰기용 도구는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는 데 한몫하지.” 니체가 기술 결정론을 옹호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간은 기술에 종속된다’는 시각은 많은 이들에게 퍼져 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존경해 마지않는다는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사물들은 안장에 앉아 있다. 그리고 사람을 타고 간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보 기술(IT) 분야의 권위자이자 경영 잡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의 편집장을 지낸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저서에서 기술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결정주의자든 ‘기술은 인간의 도구일 뿐’이라는 주장을 하는 도구주의자든 한 가지 사실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때로는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획기적인 기술이 등장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수많은 부작용을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대단한 기술 혁명’의 하나인 인터넷이 인간에게 미치는 막대한 부작용을 뇌의 구조와 관련지어 설명했다. 인터넷 세상에 몰입할수록 우리의 뇌는 혹사당하고, 궁극적으로는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스마트 미디어는 바보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니콜라스 카는 원래 인터넷의 확산을 ‘정보의 천국’이라 여기며 반겼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 자신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걸 깨닫고는 ‘뇌의 기능이 변한 건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가 2008년 <애틀랜틱>지에 기고한 ‘구글이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있는가’라는 글은 논란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카의 주장은 어른이 된 뒤에도 뇌가 계속 변한다는 ‘뇌의 가소성’ 이론을 토대로 한다. 인간의 생각과 감정, 인격을 결정하는 복잡한 회로 속으로 이끄는 역할은 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 사이의 부위인 ‘시냅스’가 맡고 있는데, 두개골 안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시냅스는 적은 양의 훈련만으로도 변한다는 것이다.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의 신경 연구학자인 알바로 파스쿠알 레온은 “우리의 뇌는 경험과 행동에 반응해 끊임없이 변한다”며 이러한 뇌의 가소성이야말로 진화의 가장 중요한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인간의 행동뿐만 아니라 상상만으로도 뇌의 반응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레온 교수는 피아노 연주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모아 간단한 연주법을 가르친 다음, 이들을 2개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은 5일 동안 키보드를 연습하도록 하고, 다른 한 그룹은 단지 연주하는 상상만 하도록 했다. 그런데 뇌 활동을 기록한 결과, 두 그룹의 뇌에 나타난 변화는 같았다. 뇌는 우리가 사고하는 대로 변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러한 뇌의 유연성엔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게 레온 교수의 설명이다. 회로가 새로 생기기도 하지만, 반대로 관심받지 못하는 회로는 약화되거나 아예 와해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인간의 뇌가 인터넷에 굉장히 민감하게 움직인다는 연구 결과는 꽤 많이 나와 있다. UCLA 정신의학과의 개리 스몰 교수는 인터넷 초보자로 하여금 하루 1시간씩 웹 검색을 하도록 했는데, 5일 만에 뇌 앞쪽 부분에 베테랑 사용자들과 완전히 똑같은 신경 회로가 활동하게 된 것을 발견했다. 책 읽기와 달리 ‘하이퍼텍스트’가 춤추듯 유혹하는 인터넷은 다양한 ‘의사 결정’ 활동을 수반하므로 뇌가 혹사당한다고 한다. 링크와 마주칠 때마다, 이메일이 올 때마다 비록 찰나일지라도 전전두엽 피질이 ‘클릭할지 말지’를 판단하기 때문. 그리고 이는 이해력과 집중력의 저해로 이어진다.

우리는 왜 집중하지 못하는가

천재적인 흡수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인간의 뇌는 어째서 인터넷의 늪에 빠지면 맥을 못 출까? 그건 인간의 뇌가 즉각적인 감각과 생각을 품고 있는 단기 기억과 이해, 추론과 연계된 장기 기억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호주의 교육심리학자 스웰러에 따르면 인간은 정보를 단기 기억으로 옮겨주는 역할을 하는 ‘작업 기억’밖에 의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니콜라스 카는 작업 기억이 정신의 메모지라면, 장기 기억은 정신의 서류 정리 시스템과 같다고 비유했다. 지능의 깊이는 바로 이 작업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이동시켜 복잡한 개념으로 이어 붙이는 능력에 달려 있다. 문제는 단기 기억이 저장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아주 적고, 작업 기억이 장기 기억으로 이동하는 통로는 병목현상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집중력도 결국 작업 기억에 달려 있기 때문에 ‘과부하’가 걸리면 뇌는 혹사당하고 산만해지며, 우리는 정보에 대한 분별 능력을 잃게 된다. 인터넷은 수많은 정보의 연결 고리를 제공해주지만 그것이 뇌의 시냅스처럼 풍부하고 깊은 사고를 유도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인터넷 환경에서 멀티태스킹을 하는 데 사용되는 뇌의 신경 회로는 확장되고 강해지는 반면, 깊고 지속적인 집중력으로 읽고 사고하는 데 쓰이는 부분은 약화되거나 사라지고 있다는 게 니콜라스 카가 주장하는 바이다. 바로 이것이 많은 이들이 컴퓨터에서 멀어진 상태에서도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준다고 그는 말한다.
집중력을 회복하려면 뇌에 휴식을 줘야 한다. 작업 기억이 혹사당하지 않고 사색이 이뤄지면 사고를 통제하는 능력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2008년 말 미국 미시건대에서 실시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자연을 벗 삼아 호젓하게 시간을 보낸 피실험자들이 도심에서 산책을 한 이들에 비해 인지 능력과 집중력에서 월등한 진전을 보였다. 깊이 있는 사고만이 아니라 공감과 열정 같은 고차원적인 심리 요소도 고요함을 필요로 한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도 있다. 사우스 캘리포니아의 뇌와 창의력 연구소에 따르면 뇌는 물리적인 고통에 빨리 반응하지만 심리적인 고통에 공감하는 섬세한 과정을 거치는 데는 훨씬 더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올바른 판단을 내릴 때 숙고의 시간을 거쳐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연구 결과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고독을 즐긴다?

이쯤 되면 오늘날 스마트 기기와 의도적이고 주기적인 결별을 하는 것이 당면 과제로 느껴지는 이들이 꽤 될 듯하다. 하지만 뇌의 성숙과 발전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만 일부러 고독을 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겠는가. 인터넷 세상과 쉽사리 단절하지 못하는 건 편리성이나 중독성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애착’이나 ‘홀로서기’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않은가. 그러나 다수의 정신분석학자들은 어떠한 친밀한 관계도 완벽한 일체감을 지속적으로 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고독이야말로 인간에게 행복과 창의성을 선사하는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영국의 지성 앤서니 스토는 그의 명저 <고독의 위로>에서 인간관계와 행복의 연결 고리가 강하다는 건 통념일 뿐, 창의적인 사람들 중에서 특히 행복하게 고독을 즐기며 사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로마제국 쇠망사>를 집필한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 그는 집안의 반대로 첫사랑에 실패하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지만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았다. 주변 사람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인생의 제비뽑기에서 아주 좋은 패를 뽑았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나는 쾌활한 기질, 적당한 감수성, 활동보다는 고요를 좋아하는 성격을 타고났다.” 스토는 기번의 경우처럼 창작 활동에 애정을 쏟으면서 홀로 즐겁게 살다 간 인물들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어떤 대상에서 느끼는 흥미, 진정한 독창성을 발휘하는 수많은 창조 활동은 인간관계 없이도 계속된다”라며 그 희열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

물론 여기에서 ‘고독형 인간’은 결혼이나 애인, 가족의 유무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고독에 몰입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 친밀한 인간관계의 부재를 의미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더군다나 세상엔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만의 생각에 깊이 빠지는 부류도 있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는 웬만하면 산만하다고 느낄 상황에서도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리적으로 혼자인 상태이든, 누군가가 곁에 있지만 자신에게 빠져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게 가능하든, 이 같은 ‘나만의 세계’는 내면의 평정을 찾고 되려 외부 세계와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토대가 된다. 이를 가리켜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자기만의 가게 뒷방’이라고 했고,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콧은 ‘혼자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인 제라르 마크롱은 <고독의 심리학>에서 ‘어른이 된다는 건 혼자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정의하며 “이는 타인들도 세상과 거리를 두거나 자신의 내면으로 물러나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했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부족하거나 상대방에게 무관심하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조언이다. 그는 또 아이들에게도 고독을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도록 ‘무위(無爲)의 시간’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시간에 욕구와 상상력, 창의력이 샘솟는다”라고 말했다.

홀로움의 미학을 터득하자

복잡한 뇌 과학과 정신분석학의 세계를 떠나서도 인생의 동반자이자 필수 자양분으로서 고독을 예찬한 이들은 많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는 고독의 미학을 설명하기 위해 외로움과 구분을 뒀다. ‘외로움(loneliness)’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solitude)’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라고 풀어낸 것이다. 시인 황동규는 홀로 있음의 중요성을 예찬하며 ‘홀로움’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홀로+외로움’이라는 이 합성어는 ‘외로움을 통한 혼자 있음의 환희’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동양의 선현들이 홀로움의 미덕에 대한 깨달음이 남달랐다는 예는 흥미롭게도 한자에서도 엿보인다. 2006년에 ‘밀리언셀러’ 대열에 오른 <배려>의 저자 한상복은 최신작 <지금 외롭다면 잘되고 있는 것이다>에서 솔리튜드를 한자어로 표현하면 ‘한가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한(閑)으로 나타낼 수 있는데, 이 글자의 모양을 잘 보면 ‘가시 있는 나무로 담을 두른다’라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남들이 함부로 침범할 수 없도록, 가시 울타리 안에 들어앉아 느긋하게 여유를 즐긴다는 것이다. 사실 서양에서는 중세에만 해도 공동체 생활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고독이 일종의 사치였다. 개인에 대한 존중이 싹튼 르네상스시대에도 종교인이나 귀족 등 사회의 특권 계층만이 혼자 있는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나무에게 물과 빛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가 있으니, 고독과 교류가 그것이다.” 프랑스 문인 크리스티앙 보벵의 이 같은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런데 우리는 온갖 인간관계망과 스마트 미디어에 둘러싸여 ‘교류’에 충분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고, 어쩌면 소통의 덫에 빠져 뇌를 혹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해에는 남에게 관심을 갖는 것만큼이나, 나에게도 집중하면서 ‘고독력’을 키워가면 어떨까. ‘홀로움의 미학’을 터득하며 쌓은 내공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긍정의 힘이 될 수 있다. 이처럼 교류와 홀로움의 균형을 잡아가노라면 어느덧 위대한 시인 워즈워스처럼 고독을 반갑게 맞이하는 나 자신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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