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식사, 디자인에 요리를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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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1, 2015

글 이소영(<사진 미술에 중독되다>, <서울, 그 카페 좋더라> 저자)

디자이너는 부엌에서 영감을 얻는다? 디자인은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한 부엌과 식사에서 디자이너의 명작이 탄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먹고 마시는 인류의 단순한 행위를 통해 빛나는 영감을 받은 디자이너의 작품을 통해 ‘부엌’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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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슐랭 3 스타 셰프는 왜 디자이너가 되었나?

스페인에서는 요리사도 디자인을 한다. 최근 스페인 요리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데에는 요리사들이 주방용품을 디자인한 것도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그 유명한 레스토랑 ‘엘 불리(El Bulli)’의 페란 아드리아와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 ‘엘 셀러 드 칸 로카(El Celler de Can Roca)’를 함께 운영하는 삼 형제 조안 로카, 조셉 로카, 조르디 로카 등 스페인의 유명한 셰프들은 본인이 직접 디자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디자이너와 협업해 자신의 요리와 스페인 요리를 더욱 다채롭게 즐길 수 있는 제품을 만들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개최한 <스페인 음식 디자인>전을 기획한 큐레이터 줄리 카펠라는 엘 불리 셰프 페란 아드리아의 전성기를 중심으로 스페인의 디자인이 새롭게 탄생했다고 예찬한다. 지금은 레스토랑을 재단으로 바꾸기 위해 엘 불리의 문을 닫았지만, 2011년 이전에는 매년 1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요리를 맛보기 위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곤 했다. 페란 아드리아 셰프는 1997년부터 디자이너와 협업했다. ‘요리는 음식을 디자인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그는 자신의 요리에 독창성을 부여하기 위해 먼저 그릇에 관심을 가졌다. 스페인 디자이너 에스더 산 미얀, 라파 마테오, 미구엘 가소에게 커피와 함께 제공하는 작은 쿠키 디저트 프티푸르(petits-fours)를 담는 그릇을 요청했고, 종이접기에서 영감을 얻어 금속 세트를 만들었다. 이후 페란 아드리아는 엘 불리만을 위한 디자인과 소비자를 위한 판매용 디자인이라는 2개의 주제 아래 디자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2001년에는 아예 디자이너 루키 후버가 레스토랑의 일원이 되어 흥미로운 디자인을 쏟아냈다. 가다랑어회와 앵두 같은 작은 음식을 특별히 디자인한 스푼에 담아 서브하는 것도 엘 불리에서 최초로 시도한 것이다. ‘땅콩 포마드와 벌꿀 토스트’처럼 튜브에 소스를 담아 고객이 직접 소스 양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한 아이디어, 캐비아 케이스를 본떠 멜론으로 캐비아 형태의 음식을 만드는 유머러스한 요리 기구, 즉석에서 스파게티 면을 만들 수 있는 길이 5m의 튜브 등이 유명하다. 페란 아드리아는 그릇과 커틀러리 디자인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페란 아드리아와 디자이너 겜마 베르날이 함께 만든 사각형 접시와 스푼으로 구성된 올라 컬렉션은 세계의 많은 레스토랑에서 사용하는 유명한 제품이 되었다. 거르개 숟가락, 디저트 숟가락, 아이스크림 숟가락, 집게 숟가락으로 구성된 커틀러리 세트 ‘엘 불리 컬렉션’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허브를 스푼 중앙 집게에 끼워 향기를 맡으면서 요리를 음미할 수 있는 집게 숟가락은 간단하면서도 혁신적인 아이디어 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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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카 삼 형제와 스페인의 젊은 셰프들

엘 불리는 문을 닫았지만 그곳에서 일했던 셰프 호세 안드레스와 페란 아드리아 셰프의 동생 알베르트 아드리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티케츠’, 그리고 스페인의 젊은 요리사들은 주방 관련 용품 디자인에 대한 열정을 이어받았다. 스페인 키친 디자인의 시작을 페란 아드리아가 이끌었다면, 21세기는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 ‘엘 셀러 드 칸 로카’를 운영하는 삼 형제 요리사 조안 로카, 조셉 로카, 조르디 로카가 주도하고 있는 셈이다.
로카 형제의 디자인 대표작 중 하나는 ‘메시의 골’과 ‘아바나 여행’이다. ‘메시의 골’은 디자이너 안드레우 카루야와 협업해 만든 것인데, 화이트 초콜릿 그릇에 골이 회전해 들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디저트다. ‘아바나 여행’은 모히토 잔과 시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시가 향을 담은 얼린 디저트라는 기발함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렇지만 로카 형제의 가장 놀라운 디자인 작품은 ‘엘 솜니(꿈)’가 아닐까 싶다. 이는 12코스 요리를 종합예술 체험으로 즐기게 한 것인데, 미술, 영화, 책, 오페라까지 포함되어 있다.
호세 안드레스 셰프는 미국으로 건너가 ‘할레오’ 등 여러 곳의 스페인 요리 레스토랑을 오픈해 스페인 요리의 매력을 알렸다. 그의 레스토랑은 스페인 디자인 작품으로 인테리어했으며 요리도 마찬가지다. 타파스를 먹으며 테이블 축구를 할 수 있게 만든 ‘테이블 축구 테이블’과 유리로 만든 컨버스 신발에 담은 튀김 요리 ‘테니스 슈(Tennis Shoe)’ 등이 유명하다. 지면에 다 싣기 어려울 정도로 스페인 요리사와 디자이너의 활약은 방대하다. 결론적으로 스페인 요리의 위력은 요리사가 디자인에 참여한다는 데서 비롯됐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www.k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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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 하디드가 부엌에 들어간 이유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를 설계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도 스푼과 포크 등 커틀러리에서부터 꽃병, 센터 피스, 실버 플레이트, 테이블과 의자 등 독창적인 식사를 위한 다양한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임에도 여성으로서 유리 천장에 시달린다고 토로한 적 있는 자하 하디드는 주방에 들어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 보인다.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한 주방용품은 그녀의 비정형 건축물을 연상시키는데, 언젠가 그녀의 건축물을 소유하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이들의 첫 번째 컬렉션으로 손색이 없다. 블랙 컬러 멜라민으로 만든 컴포넌트 5개로 구성한 ‘니체(Niche)’는 찰싹 붙여놓아도 좋고, 간격을 두어 자신만의 모양으로 배치해도 좋다. 초콜릿 디저트나 작은 요리를 올리면 어울릴 만한 현대적인 센터 피스다. ‘티 & 커피 세트(Tea & Coffee Set)’는 조각 작품처럼 보인다. 티 포트, 커피 포트, 우유와 설탕 단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4개가 퍼즐처럼 이루어져 테이블 위에 배치하는 재미가 있다. 마치 테이블 위에서 도시 풍경을 이루는 건축물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WMF 커틀러리(WMF Cutlery)’는 왜 몇 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스푼과 포크 디자인에 변화를 줘야 되는지 반문하는 이들에게 좋은 대답이 될 것 같다. 원을 이루지 않는 스테인리스 스틸 스푼이 특히 독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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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조 마리와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신념을 주방용품에 담다

많은 디자이너들의 존경을 받는 이탈리아 디자이너 엔조 마리 역시 부엌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왔다. “인간이 서로 평등할 것. 그것이 나의 신념이다”라고 말하는 엔조 마리에게 플라스틱은 특히 매력적인 소재였다. 플라스틱은 첨단 기술을 접목해 기존 소재로는 실현할 수 없는 다양한 형태나 기능을 더할 수 있고, 생산 단가를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소재 컬렉션 중에서 ‘자바(Java)? 컨테이너가 특히 유명한데, 다른 부품과 연결하지 않고 본체, 덮개 두 부분만으로 이루어진 독창적인 음식 저장 용기다. 합리적 절차를 통해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길 원했던 엔조 마리의 디자인 철학을 잘 반영한 제품이다. 그는 이외에도 플라스틱으로 과일 그릇과 촛대, 얼음통, 꽃병 등을 만들었다. 스테인리스 스틸도 즐겨 사용했는데, 제품을 본질에 가까우면서도 경제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소재였기 때문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만드는 사람까지 배려하는 엔조 마리의 생각이다. 디자인이란 100% 사용자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원래 도자기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공장에서 그릇을 만드는 근로자들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제품을 완성할 때 느끼는 희열을 선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도자기 소재 디자인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위트 있으면서도 우아한 도자기 접시 ‘사모스 모델 S(Samos Model S)’, ‘사모스 모델 E(Samos Model E)’ 등을 완성했다. 대리석 화병인 ‘파로스 시리즈(Paros Series)’는 대리석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카라라 지방 근로자를 위한 디자인으로, 누가 만들어도 일정하게 높은 수준의 제품을 대량생산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www.ddp.or.kr).
마침 엔조 마리와 더불어 생존하는 위대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알레산드로 멘디니 전시가 DDP에서 열리고 있다.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네덜란드 흐로닝언 미술관, 일본 히로시마 파라다이스 탑 같은 건축물과 컬러감이 인상적인 푸르스트 의자, 삼성 기어 S2 등을 디자인했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의 대표작은 여전히 와인 오프너 ‘안나 G(Anna G)?다. 전 여자 친구 안나에게 영감을 얻어 만든 와인 오프너가 큰 인기를 끌어 병마개, 타이머, 캔들, 후추 그라인더, 케이크 스탠드 등도 연달아 선보였다. 2014년에는 안나 G 출시 20주년 기념 한정판 제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안나 시리즈와 세트 개념으로 자신의 모습을 소재로 한 ‘알레산드로 M(Alessandro M)? 와인 오프너와 모카 포트도 디자인했다. 전시를 기념해 한국을 찾은 그는 자신이 ‘기능적인 디자인’보다 ‘아름다운 디자인’을 추구하고, 인간 형상을 한 디자인에 인격을 부여해왔음을 강조했다. 사람 모습을 한 디자인 제품을 통해 사용자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거장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는 우리가 자신의 제품과 함께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실 때마다 더욱 행복해지기를 바란다(www.mendi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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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밥멍덕과 21세기 숟가락, 젓가락

우리나라에도 예로부터 부엌에서 유래된 독창적인 디자인이 있었다. 한복을 만들고 남은 천으로 만든 상보, 외출 나간 식구의 밥을 아랫목에서 따뜻하게 보관하기 위한 밥멍덕,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김솔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과거 이름 모를 여인들의 디자인 감각이 담긴 자수품을 컬렉션하는 한국자수박물관의 허동화 관장은 세계 각국의 뮤지엄에서 이를 순회 전시해 찬사를 받고 있다고 했다. 자수 컬렉션은 쓰임새와 디자인도 빼어나지만, 과거의 디자인 작품에 한 여인의 일생이 담겨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혼례를 앞두고 한복을 만들고 남은 천, 부모와 자녀와 손주의 한복을 만들고 남은 천을 차곡차곡 모아서 만든 상보와 밥멍덕을 들여다보면 과거의 즐거운 일, 힘든 일이 하나둘 떠오르곤 했으리라(www.bojagii.com).
당당히 자신을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우리나라 젊은 디자이너들의 빼어난 감각은 과거 이름 없는 이러한 여인들의 디자인 유전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최근 전진현, 전미선 디자이너가 커틀러리 디자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전진현 디자이너는 식도구가 감각을 자극하는 새로운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디자인을 한다. 작가는 소리를 색으로 보거나 움직임에서 소리를 듣는 교차된 감각을 경험하거나 후천적으로 하나의 감각이 특별히 강화된 공감각자를 인터뷰하며 영감을 얻기도 한다. 작품 중 주목받는 것은 숟가락이다. 단순히 동그란 숟가락에서 벗어나 작은 돌기가 난 숟가락을 디자인해 음식이 입안에 더 오래 머물게 하거나, 사탕같이 붉은빛을 내는 식기도 식욕을 돋운다는 평이다.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미슐랭 스타 셰프들과 공감각 식사 이벤트도 개최하고 있다(jjhyun.com).
반면 전미선 디자이너는 젓가락에 몰두한다. 음식 종류는 다채로운데 하나의 젓가락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에 의문을 가진 작가는 메뉴에 따른 젓가락을 제안한다. 중국 음식은 뜨겁고 면류가 많기 때문에 젓가락이 길고 두툼하다. 해산물 요리가 많은 일본 음식은 젓가락 위주로 먹기에, 그릇을 들고 먹기 쉽게 길이가 짧고 끝이 뾰족하다. 이외에 부드러운 두부를 쉽게 먹을 수 있는 젓가락, 미끄러운 해조류를 먹기 위한 것 등 그녀의 젓가락 디자인은 무려 1백20여 가지에 달한다. 작가가 제안하는 특별한 경험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한 끼에 수십 가지 젓가락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큐레이터 줄리 카펠라가 디자인을 배제한 식사는 즐거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한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생존하기 위해 먹는 하루 세끼 식사가 어떻게 즐거울 수 있을까? 아티스트의 디자인과 함께라면 매일 행복한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식사 즐겁게 하세요! 부엔 프로베초(Buen Prove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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