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조금씩 더해가는 역동성, 그리고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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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 2024

글 고성연

아트 위크 도쿄(AWT) 2024

해마다 11월을 수놓으며 점차 브랜드 인지도를 키워나가고 있는 현대미술 축제 아트 위크 도쿄(Art Week Tokyo, AWT). 팬데믹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2021년 내국인 위주의 ‘소프트 론칭’으로 시동을 걸고 이듬해 해외 방문객들을 본격적으로 맞이한 지도 수년이 흘러, 이제 이 글로벌 행사는 4년 차에 접어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아트 페어인 아트 컬래버레이션 교토 역시 며칠 앞서 개최되는지라(내년엔 며칠 뒤가 될 예정) 아시아 미술계에서 11월은 마치 일본이 ‘찜’한 듯한 모양새인데, 둘 다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AWT는 상하이에서 열리는 아트 페어인 ‘웨스트 번드 아트 앤드 디자인’과 살짝 겹치기는 하지만 둘 다 ‘섭렵’ 가능한 일정이다). 올가을 교토행에 이어진 도쿄행은 묘한 경쟁 심리가 느껴지는 두 도시가 각자 얼마나 다른 매력을 강렬하게 품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일부분 어색하고 서투르게 느껴지던 요소들이 점차 퍼즐을 맞춰가는 모습을 보니, 하나의 축제형 플랫폼을 만들어나가는 데도 ‘1만 시간의 법칙’이 통용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분야에서 성과를 내려면 하루에 10시간 투자한다고 가정할 경우 3년 정도 걸린다는 셈법을 느슨하게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할 정도로, 글로벌 플랫폼을 겨냥한 전략적 틀의 아귀가 점차 맞아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띈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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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allery Scene

아자부다이 힐스의 메가 갤러리부터 골목길의 작은 갤러리까지
아트 위크 도쿄(Art Week Tokyo, AWT)는 현대미술 장터로 일컬어지는 아트 페어가 아니라 ‘도시 산책’을 하듯 시내 곳곳에 있는 갤러리와 미술관을 돌며 관람하는 쇼케이스형 축제다. 정부 지원을 받는 이 행사 기간에는 누구나 무료로 탈 수 있는 전용 버스도 40대 넘게 운영된다. ‘AWT PASS’라는 모바일 앱을 내려받아 동선을 짜면 된다(올해는 40개 갤러리를 포함해 53개 기관·조직이 참여했다. 11. 7~10).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본인에게, 그리고 도쿄를 방문하는 타지인에게도 (우리와) 현대미술사를 알리는 교육적인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2년 전 도쿄에서 만난 아트 위크 도쿄 공동 창립자 니나가와 아쓰코(Atsuko Ninagawa)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갤러리(다케 니나가와)를 이끄는 갤러리스트이기도 한 그녀는 지역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그 안팎에서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는 글로벌 플랫폼을 만들어 도쿄의 갤러리들이 자신들의 예술 콘텐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는 설명을 보탠 기억이 있다. 당시만 해도 미술 시장이 아트 페어를 중심으로 한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지만 도쿄는 동시대 미술 거래가 활성화된 편이 아니었기에, 도시 자체의 브랜드 파워를 염두에 뒀을 신중한 결정이었다. 건축, 음악, 디자인, 미식 등 다양한 문화 예술 콘텐츠를 품은 메가 시티 아닌가. 어쩌면 더 현명한 선택은 막강한 아트 페어 브랜드인 아트 바젤과의 협업 체제를 꾸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술 컬렉터들과의 ‘네트워킹’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제 그 효과가 눈에 띈다. 올해 AWT에는 4천여 명의 VIP가 등록했는데, 그중 8할이 해외 컬렉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찍이 무라카미 다카시 등 일본 작가들과 꾸준히 협업했고 도쿄에도 10년 전 진출한 갤러리 블럼(BLUM)의 공동 창업자 팀 블럼은 “요즘 일본에 대한 새로운, 다시 불붙은 집착 같은 게 생겨난 것 같다”며 “아시아에서든 서구에서든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도쿄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AWT 기간에 하종현 개인전을 연 블럼은 이번에는 일본의 스타 작가 나라 요시토모 전시를 선보였다. 사실 이 작가는 페이스갤러리 소속이기도 한데, 마침 요즘 ‘핫한’ 새로운 복합 단지 아자부다이 힐스에 페이스갤러리 도쿄가 입점했다(역사상 체급이 가장 큰 갤러리의 도쿄 입성이다). 그런데 그들만의 리그는 아니다. 꼭 미술품을 사지 않더라도 도쿄 여행을 기꺼워했던 컬렉터들은 자연스럽게 중소 갤러리들의 발견도 즐기게 된 듯하다. 예컨대 필자도 AWT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법한 도쿄 메구로의 작은 갤러리 이사야(LEESAYA)가 그런 사례였다. 2019년 문을 연 이사야는 도전 의식을 지닌 컬렉터층을 타깃으로 하는데, 지난해 아트 타이베이에 참가했고, 내년에는 케이프타운(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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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t Focus

큐레이터의 ‘브랜드 파워’와 ‘내공’의 조화를 보여준 부티크 페어
사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AWT의 존재감이 그렇게 살갑게 와닿는 것 같지는 않다. 현지인들로서는 갤러리와 미술관을 반드시 AWT 기간에 찾아야 할 이유가 없고, 굳이 전용 버스를 타야 할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한다(외국인들도 VIP 버스로 미리 짜인 일정을 소화하는 게 아니라면 그냥 대중교통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그렇지만 도쿄를 잘 모르는 이방인, 특히 문화 예술 애호가에게는 AWT가 이 도시의 숨은 매력과 재능을 더 잘 들여다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지난해부터는 이 주간에만 접할 수 있는 세일즈 플랫폼인 ‘AWT 포커스’를 선보였다. 컨템퍼러리 미술 시장의 규모와 유동성을 감안한 듯 처음에는 페어 중심의 플랫폼으로 시작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예상되었던, 신중하게 점진적으로 키워나가는 확장형 행보다. ‘부티크 페어’라 볼 수 있는 AWT 포커스는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럭셔리 호텔인 더 오쿠라 도쿄(The Okura Tokyo) 부지 내에 있는 오쿠라 뮤지엄에서 펼쳐졌는데, 작가/그룹 수는 57개이며 한국에서도 처음으로 국제갤러리가 양혜규 작가 작품으로 참가했고, 실버렌즈(마닐라/뉴욕), TKG+(타이베이) 등 아시아의 대표적인 갤러리들이 등장했다(대다수는 일본 갤러리지만 출품한 작가의 국적은 다양했다). AWT 포커스는 여타 아트 페어와 차별화하는 차원에서 저명한 큐레이터가 이끄는 ‘미술관급’ 전시를 강조하는데, 올해는 롯폰기의 상징과도 같은 모리 미술관을 이끄는 가타오카 마미(Mami Kataoka) 관장이 큐레이팅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Earth, Wind, and Fire: Visions of the Future from Asia>전으로, 우주론(cosmology)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를 토대로 한 자신의 내공을 살려 상업적인 전시(selling show)지만 마치 예술 기관 같은 주제를 지닌 ‘하이브리드’ 포맷에 맞게 잘 버무려내 ‘역시!’라는 반응이 많이 나왔다. 미술 시장이 전반적으로 하락세라지만 영리한 기획력에 부담스럽지 않은 작품 가격대, 엔저 현상까지 더해 AWT 포커스의 매력이 빛을 발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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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Spaces

‘도쿄’라는 브랜드 파워를 등에 업은 다채로운 공간형 콘텐츠
AWT 포커스가 열리는 오쿠라 뮤지엄은 특이하게도 도쿄 도심에 있는 더 오쿠라 도쿄 호텔 부지 내에 있는데, 알고 보면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한다. 원래 창업자 가문의 선대 경영자인 오쿠라 기하치로가 1917년 설립한 일본 사립 미술관의 효시다. 1960년대 당대의 명망 높은 건축가 다니구치 요시로가 설계한 호텔로 2019년 대대적인 새 단장 끝에 다시 문을 연 더 오쿠라 도쿄는 AWT의 파트너가 되었는데, 2023년 AWT 포커스가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이 부티크 페어를 품는 무대로 낙점됐다. AWT는 유망주 후원 차원에서 신진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기는 라운지인 ‘AWT 바(bar)’라는 프로젝트 공간을 매년 꾸려오고 있다. 갤러리스트 니나가와 아쓰코와 더불어 AWT의 또 다른 공동 창립자이자 ‘큰손’ 컬렉터 시라이 가즈나리(Kazunari Shirai)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일부를 ‘팝업’ 개념으로 제공한 공간이다. AWT 2024 행사에는 조경 건축가 도무라 에이코(Eiko Tomura)가 선정되어,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하얀 바탕에 식물들이 수놓은 ‘작품’을 선사했다. 내로라하는 럭셔리 브랜드들의 매장이 출중한 디자인을 자랑하는 도쿄답게 이들이 꾸리는 ‘예술 공간’도 눈여겨볼 만하다. 공간의 미학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기는 전시 콘텐츠도 빼어나다. 올해 AWT 기간에는 에르메스의 도쿄 전시 공간인 르 포럼에서 세토내해를 배경으로 하는 데시마 미술관의 아름다운 설치 작품으로 명성이 자자한 일본 아티스트 나이토 레이(Rei Naito)의 전시, 루이 비통의 전시 공간인 에스파스 루이 비통 도쿄에서는 잉크젯 프린터를 활용해 캔버스에 추상 작품을 빚어내는 미국 작가 웨이드 가이턴(Wade Guyton)의 전시, 건축 거장 듀오가 이끄는 스위스 HdM의 명작으로 꼽히는 프라다 아오야마에서는 미국의 1981년생 동갑내기 듀오 피치 | 트레카틴(Fitch | Trecartin)의 상상력 넘치는 전시를 각각 선보였다. 올해는 샤넬도 긴자에 위치한 넥서스 홀에서 작가 3인(비앙카 봉디, 고바야시 무쿠, 니와 유미코)을 내세운 기획전 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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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useum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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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대미술을 알리는 데 안팎으로 힘을 모으는 행보
‘아트 주간’을 단단히 받치는 힘은 역시 미술관 전시에서 비롯된다. 도쿄에는 공공이든 사립이든 다양하고 수준 높은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지만, ‘art week’라는 콘셉트는 확실히 전시 캘린더를 유심히 살펴보고 진지한 태도로 감상함으로써 통찰력을 얻게 도와주는 이점이 있다. 일본의 문화 예술을 ‘세계적인 것’으로 포지셔닝하려는 노림수가 반영된 전략이든, 그동안 국제적으로는 덜 조명된 작가들을 소개하려는 의도든, 지난가을 도쿄의 전시 풍경에는 일본의 현대미술 궤도를 짚어볼 수 있는 전시가 많이 눈에 띄었다. 정부 차원의 후원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AWT를 계기로 확실히 응집력이 커진 듯한 느낌이다. 우선 국립신미술관(이하 NACT)은 AWT에 열린 자세로 협업하는 모습이 눈에 띄는 기관이다. NACT에서는 지난해 프라다 아오야마 매장에서 선보이기도 했던 일본 팝 아티스트 다나아미 게이이치(Keiichi Tanaami) 회고전이 AWT 주간을 기해 막을 내렸고,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는 아라카와-나시 에이(Ei Arakawa-Nash) 전시를 개막했다. 동양의 앤디 워홀이라는 별칭을 얻은 다나아미 게이이치는 스스로를 ‘이미지 디렉터’라 지칭하며 고급문화와 하위문화,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든 전설적인 아티스트로 무라카미 다카시, 나라 요시토모 같은 오늘날 세계 미술계에서 각광받는 일본 현대미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존재이기도 하다. 작가가 개막한 지 이틀 만에 작고하는 바람에 유고전이 된 이 전시는 끝났지만, 서울에서 그의 또 다른 전시를 볼 수 있다. 서울 통의동에 있는 대림미술관에서 작가의 주요 작품 7백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가 열리고 있어서다(2025년 6월 29일까지). NACT에서는 홍콩 M+와 손잡고 진행 중인, ‘일본 현대미술’을 주제로 한 전시가 내년 가을에 예정되어 있는데, 이 전시 기획을 이끄는 정도련 M+ 부관장이 AWT 주간에 직접 개요를 설명하는 간담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또 다른 도쿄의 주요 현대미술관인 도쿄도 현대미술관(MOT)에서는 일본의 선구적인 미술품 수집가 다카하시 류타로(Ryutaro Takahashi) 소장품전이 개최됐다. 구사마 야요이, 무라카미 다카시, 미스터(Mr.), 나라 요시토모, 가토 이즈미 등 국제 무대에서도 잘 알려진 작가들만이 아니라 일본 현대미술의 한 페이지를 수놓은 여러 작가를 한데 모아놓은 ‘생생한 공부’ 같은 전시였다. 전후의 고도성장 신화와 그 그늘에 가려진 사회문제 속에서 나타난 예술과 하위문화의 관계를 날카롭게 해부하는 글을 일부분 ‘시각적으로’ 풀어놓은 느낌이랄까. 긴자의 아티존 뮤지엄에서는 일본 미술의 ‘현재’를 볼 수 있는 전시를 선보였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작가이자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로 주목받는 모리 유코(Yuko Mohri) 개인전 (2025년 2월 9일까지). 모리 유코는 이숙경 예술감독이 이끈 제14회 광주비엔날레 참여 작가로, 둘은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작가와 감독으로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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