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02, 2025
글 고성연
MIMOCA_엑스포 이노쿠마(EXPO INOKUMA)
지난가을 일본 교토에 출장으로 머물던 와중에 선물처럼 주어진 1박 2일 여행의 종착지는 마루가메라는 시코쿠 지방의 소도시였다. 가가와현(県) 중서부에 자리한 항구도시로 인구는 10만 명가량이다. 주말을 틈탄 이 짧은 버스 여행을 결심하게 만든 ‘키워드’ 중 하나는 쫄깃하고 두툼한 면이 일품인 사누키 우동(가가와현의 옛 이름이 사누키다)이고, 다른 하나는 마루가메의 명소인 ‘미모카(MIMOCA)’였다. 평소 좋아하던 건축가 다니구치 요시오(Yoshio Taniguchui)가 설계한 미술관의 별칭이다. 마루가메 기차역에서 나오면 살짝 놀랄 정도로 시야에 바로 들어오는 이 아름다운 미술관은 거장의 건축을 대하는 즐거움도 선사하지만, 그 토대가 된 인물을 ‘발견’하는 재미도 안겨준다. 20세기 일본 문화 예술계를 수놓은 인맥의 구심점 같은 존재인 이노쿠마 겐이치로(Genichiro Inokuma)다. 올봄부터는 <엑스포 이노쿠마(EXPO INOKUMA)>라는 전시로 대중을 만난다.
아기자기한 풍경과 평온한 정취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일본 ‘소도시 여행’ 추천지 목록을 보면 끝이 없을 듯 길다. 그도 그럴 것이 ‘도도부현’으로 정렬되는 일본 행정구역에서 현(県)만 해도 43개이고 도시 숫자로 따지면 8백 개를 향하고 있다. 그중 가가와현은 인구가 1백만 명도 되지 않은 작은 현이지만 문화 예술 향유자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하다. 세계적인 일본 현대미술 축제인 세토우치 트리엔날레로 유명한 ‘예술의 섬’ 나오시마가 속해 있어서다. 일본 특별명승지로 지정된 리쓰린 공원과 반세기 넘는 역사를 지닌 민가 박물관 시코쿠 무라가 있는 다카마쓰를 비롯해 이곳의 운치 있는 항구를 출발점으로 펼쳐지는 세토내해의 여러 섬은 저마다 예술적 자취를 뽐낸다. 여기서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가와현 자체를 ‘예술 현’이라 부를 만한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의 아틀리에와 자택, 정원 등을 원형 그대로 볼 수 있는 미술관을 비롯해 디자이너 조지 나카시마의 작업장, 그리고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출 미술관인 미모카(MIMOCA)가 있다.
‘미술관은 영혼의 휴양소여야 한다’는 믿음의 구현
다카마쓰 공항에서 차로 1시간이 걸리지 않고, 기차를 탄다면 오카야마에서 40분 정도 소요되는 한적한 도시 마루가메. 기차역 출입구에서 도보로 1분밖에 걸리지 않는 미모카의 정식 명칭은 마루가메 이노쿠마-겐이치로 뮤지엄 오브 컨템퍼러리 아트(The Marugame Genichiro-Inokuma Museum of Contemporary Art, MIMOCA). 미술관 이름 자체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노쿠마 겐이치로는 미모카의 바탕이 된 예술가다. 1902년 다카마쓰에서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마루가메에서 학교를 다니다 도쿄로 떠나 미술을 전공했고, 미술과 디자인, 예술 운동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면서 20세기 중·후반 일본 문화계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예를 들면 아직도 활용되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포장지 디자인도 그의 창작물이다. 1938년 프랑스 파리로 떠나 수년간 체류하면서 앙리 마티스를 사사하는 시기를 보냈고, 1955년에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자신의 스튜디오를 꾸리면서 20년간 머무르기도 했다. 당시 이사무 노구치, 마크 로스코, 로버트 라우션버그, 조지 나카시마, 존 케이지 등과 인연을 만든다. 풍부한 호기심과 왕성한 활동력을 바탕으로 국내외를 오가면서 풍부한 인맥과 폭넓은 경험을 쌓은 그는 1980년대 후반 1천 점이 넘는 자신의 작품을 가가와현에 기증했고, 1991년에는 마루가메의 명예 시민으로 추대됐다(현재 드로잉까지 합치면 미모카의 이노쿠마 소장품은 2만여 점에 이른다). 이노쿠마 겐이치로와의 인연, 그리고 그로 인해 다채롭게 꽃핀 가가와현의 창조적 자산을 기리는 미모카가 문을 연 해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2년 뒤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영혼이 머무르는 집처럼 미술관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 마치 이 작은 도시의 수호신처럼 기차역 옆에서 35년 세월을 보낸 미모카는 첫인상부터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듯 친근하게 다가온다. 지난가을 첫 방문에 이어 올봄 오사카 엑스포와 궤를 같이하는 듯한 전시 <엑스포 이노쿠마(EXPO INOKUMA)>를 앞두고 다시 찾았는데 오래된 친구처럼 정겹게 느껴졌다. 아마도 이런 정서의 미학에는 이노쿠마의 천진난만한 드로잉이 새겨진 건물의 파사드,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절로 동심을 자아내는 조각들의 지분이 제법 클 터다. 기차역을 지척에 둔 ‘시민에게 열린 현대미술관’. 이는 ‘영혼을 달래주는 치유와 휴식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이노쿠마의 믿음과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특히 아이들에게 의미 있고 즐거운 배움의 전당이 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반영해 기차역에서 가까운 곳에 배치한 ‘전략적 포지셔닝’의 소산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절제 있는 품격’을 곱씹게 되는 다니구치 요시오의 설계 미학이 더 세심하게 펼쳐진다. 커다란 파사드와 대조적으로 안쪽의 입구는 낮고 좁은데, 이는 일본에서 다실에 들어가면 ‘누구라도 평등하다’는 뜻에서 작은 입구를 두는 ‘니지리구치’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그래서 미술관 안으로 들어왔을 때 시원시원한 느낌이 더욱 쾌적하게 와닿는다(중간이 뚫려 있어 가장 높은 공간은 14m에 이른다). 안팎으로 이어지는 바닥의 선조차 깔끔하게 이어지도록 한 배려, 깔끔하고 평안한 동선, 자연광과 인공조명이 적절히 배치된 여러 전시 공간이 저마다의 느낌을 지닌 채 독립적으로, 하지만 유기적인 느낌으로 이어진다(지상 2~3층에 걸쳐 있다). 미술관에는 이노쿠마의 상설전도 꾸려지지만 동시대 작가들을 빛나게 하는 지지대가 되기를 바랐던 그의 철학처럼 주기적으로 다양한 동시대 작가 전시가 열린다. 마침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유망한 작가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인 ‘미모카 아이’의 1회 수상자 사이조 아카네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엑스포 이노쿠마>에 앞서 그의 학창 시절과 파리 시절을 담은 특별전을 거치고 나면, 아담한 카페와 분수를 품은 ‘케스케이드 플라자(Cascade Plaza)’가 자리 잡은 루프톱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으면 이노쿠마와 친분이 있던 이사무 노구치 사후에 기증된 돌 조각과 더불어 그 자신의 사랑스러운 조각과의 조화를 감상할 수 있는데, 햇살이 함께하는 이 공간의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노라면 절로 마음이 정화되는 듯하다.
창조적 인맥 지형의 구심점
뉴욕 모마의 신관 설계를 맡았고 교토 국립박물관 신관, 도요타 미술관 등의 작업으로 알려져 있는 다니구치 요시오는 자기 PR에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일에 집중했던 인물로 ‘건축가들의 건축가’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지난해 말 타계했다. 일본은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를 9명이나 배출한 ‘건축 강국’이지만, 언젠가 이름이 새겨지길 (개인적으로) 바라게 되는 거장이다. 하지만 미술관 설립을 둘러싼 얘기가 오갔을 당시에는 1937년생인 다니구치는 상대적으로 젊은 편이었다(오히려 그의 건축가 부친 다니구치 요시로가 이노쿠마의 동시대 인물이다). 그런데 건축가들의 네트워크를 다지는 조직을 만들 정도로 건축을 사랑했던 이노쿠마는 그의 가치를 알아보고 “요시오에게 기회를 주는 게 어떨까? 그는 미래가 기대되는 예술가”라고 강력히 추천했다. 다니구치 요시오가 자신의 커리어 초창기에 실무를 배운 선배로 일본 건축계의 구루인 단게 겐조(1913~2005)도 이노쿠마와 끈끈한 인연을 지니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나온 중대한 산물이 공공 건축의 참신한 랜드마크로 족적을 남긴 가가와현 청사다(1958년 완공). 일본과 해외의 가교 역할을 하며 고향 땅의 문화 예술 토양을 풍요롭게 하는 데 발벗고 나섰던 이노쿠마는 당시 ‘디자인 지사’라는 별칭까지 지녔을 정도로 문화 예술에 진심이었던 가가와현의 지사 가네코 마사노리에게 단게 겐조를 추천했다. 노출 콘크리트의 거친 질감을 살리는 브루탈리즘의 맥락을 따랐지만 건물 곳곳을 생동감 있는 원색으로 수놓은 이 청사는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옥상 카페를 열었는데, 당시 ‘가장 핫한’ 장소로 널리 회자되며 인기를 끌었다. 옥상 카페만이 아니라 청사 앞 정원도 일종의 광장 같은 역할을 하도록 설계한 이 건물은 일본의 재건과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기념비적 공공 건축으로 자리매김했다. 1층 로비의 경쾌한 타일 벽화는 이노쿠마의 작품이고, 가구와 디자인 등 곳곳의 요소도 당대 예술가들과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창조적 구심점이었던 이노쿠마의 흥미로운 생애와 철학은 <엑스포 이노쿠마>전(오는 7월 6일까지)과 더불어 다카마쓰의 민속 박물관으로 유명한 시코쿠 무라에서도 전시 시리즈로 펼쳐져, ‘협업 정신’을 이어갈 예정이다.
1 일본 시코쿠 지방의 가가와현 마루가메에 자리한 미술관 미모카(The Marugame Genichiro-Inokuma Museum of Contemporary Art, MIMOCA) 정면 모습. 건축 거장 다니구치 요시오가 설계했고, 가가와현 출신의 예술가로 미술, 건축, 디자인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으며 일본과 서양의 가교 역할을 했던 이노쿠마 겐이치로(1902~1993)의 작품 2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2 미술관 설립의 근원이 된 이노쿠마 겐이치로의 뜻에 따라 미모카는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이 되도록 기차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3 이노쿠마 겐이치로의 작품. ‘Keio University mural Democracy’, 1949. Photo by Akira Takahashi
4 이노쿠마 겐이치로의 대표적인 벽화 작품인 JR 우에노역(Ueno Station)에 설치된 ‘Freedom’. 원래 1951년 완성되었다가 1984년 복원 작업을 거쳤다.
5 동서양 예술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고 동시대 일본 예술가들과 협업을 도모하며 창조적 인맥의 허브 역할을 했던 이노쿠마 겐이치로 모습. Photo by Akira Takahashi
6 Genichiro Inokuma, ‘Portrait of a Woman’, 1926.
7 이노쿠마 겐이치로가 맡아 70년 넘게 활용되고 있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전설적인 포장지 디자인.
8 Genichiro Inokuma, ‘Self-portrait’, 1924.
9 Genichiro Inokuma, ‘Night’, 1937.
10 다카마쓰의 명물 중 하나인 민속 박물관 시코쿠 무라. 4월 중순부터 <Form, People, Living>전을 시작으로 이노쿠마 겐이치로의 창조적 여정을 기리는 전시를 연말까지 펼치게 된다.
11 단게 겐조가 설계를 맡아 공공 건축의 새 바람을 일으킨 다카마쓰에 있는 가가와현 청사의 1층 내부 풍경. 이노쿠마 겐이치로의 벽화가 보인다.
12 가가와현 청사의 옥상은 과거 시민들을 위한 카페 공간을 꾸린 ‘핫플’이었다.
13 근대건축 자산으로 여겨지는 가가와 현립 체육관. 역시 단게 겐조의 작품이지만 아쉽게도 유지 비용 문제로 철거될 예정이다.
※ 1, 2, 7, 10, 13 Photo by 고성연
※ 5, 6, 8, 9 ©The MIMOCA Foundation
※ 11~12 Photo by 오미네 다쓰마(Tatsuma Omine)
2 미술관 설립의 근원이 된 이노쿠마 겐이치로의 뜻에 따라 미모카는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이 되도록 기차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3 이노쿠마 겐이치로의 작품. ‘Keio University mural Democracy’, 1949. Photo by Akira Takahashi
4 이노쿠마 겐이치로의 대표적인 벽화 작품인 JR 우에노역(Ueno Station)에 설치된 ‘Freedom’. 원래 1951년 완성되었다가 1984년 복원 작업을 거쳤다.
5 동서양 예술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고 동시대 일본 예술가들과 협업을 도모하며 창조적 인맥의 허브 역할을 했던 이노쿠마 겐이치로 모습. Photo by Akira Takahashi
6 Genichiro Inokuma, ‘Portrait of a Woman’, 1926.
7 이노쿠마 겐이치로가 맡아 70년 넘게 활용되고 있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전설적인 포장지 디자인.
8 Genichiro Inokuma, ‘Self-portrait’, 1924.
9 Genichiro Inokuma, ‘Night’, 1937.
10 다카마쓰의 명물 중 하나인 민속 박물관 시코쿠 무라. 4월 중순부터 <Form, People, Living>전을 시작으로 이노쿠마 겐이치로의 창조적 여정을 기리는 전시를 연말까지 펼치게 된다.
11 단게 겐조가 설계를 맡아 공공 건축의 새 바람을 일으킨 다카마쓰에 있는 가가와현 청사의 1층 내부 풍경. 이노쿠마 겐이치로의 벽화가 보인다.
12 가가와현 청사의 옥상은 과거 시민들을 위한 카페 공간을 꾸린 ‘핫플’이었다.
13 근대건축 자산으로 여겨지는 가가와 현립 체육관. 역시 단게 겐조의 작품이지만 아쉽게도 유지 비용 문제로 철거될 예정이다.
※ 1, 2, 7, 10, 13 Photo by 고성연
※ 5, 6, 8, 9 ©The MIMOCA Foundation
※ 11~12 Photo by 오미네 다쓰마(Tatsuma Om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