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엔드 오디오의 발자취와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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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04, 2012

글 나상준(‘오디오갤러리’ 대표, www.audiogallery.co.kr) | 에디터 고성연

Audio Series 02-오디오 道樂, 삶의 열정을 말한다

현장의 연주가 아니라 오디오 기기로 재생되는 소리일 경우, 우리는 과연 ‘있는 그대로’ 흡수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에 따라, 또 상황에 따라 우리는 따스함이나 편안함이 느껴지는 기분 좋은 소리를 듣고 싶을 수도, 설령 거북하더라도 자연음에 가까운 소리를 접하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대부분 ‘좋은 소리’를 원한다는 것이다. 저·중·고역이 저마다 제 몫을 하면서 균형 있고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며 맑고 투명하면서도 생동감이 있는 소리를 내는 시스템! 하이엔드 오디오가 추구해온 진솔한 소리의 미학을 둘러싼 세계의 발자취와 현주소를 짚어본다.   

“순위 변화란 대부분 필자의 재생 기기가 바뀐 탓일 것이다. 더 민감한 오디오 시스템이라면 전에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단점이 드러나고, 불분명했던 장점도 뚜렷이 부각됐을 테니까.”


1957년라는 미국의 오디오 잡지에 실린 ‘베토벤 교향곡을 다시 생각한다’는 제하의 글. ‘악성’ 베토벤의 교향곡들을 담은 다양한 레코드를 비교, 평가하는 이 글에서 C.G 버크라는 필자는 자신이 이전에 실시했던 두 번의 조사 결과와 다소 달라진 순위에 대해 이렇게 설명을 달아놓았다. “레코드 평은 오디오 시스템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며 새로운 오디오를 활용한 데 따른 영향을 고려해 순위 변동을 바라봐줄 것을 독자들에게 당부한 것이다. 이 같은 일화는 우리가 평소 음악을 감상할 때 과연 제대로 된 소리를 듣고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하는 동시에 오디오 시스템이 작곡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본연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어느 정도 가늠케 해준다. 이 잡지의 글이 쓰인 1950년대는 다채로운 오디오 브랜드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짐작하건대, 버크라는 인물도 당시 새롭게 쏟아지는 오디오들을 자주 접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면서 전쟁 중에 급속도로 발달한 통신 기술 덕분에 1950년대 라디오 방송이 전 세계에 보급되었고, 이에 따라 극장 시스템 위주로 발전했던 오디오가 일반 가정으로 확산됐는데, 이때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가장 유명세를 탔던 오디오 브랜드들로 마란츠, 매킨토시, 탄노이, JBL, 알텍 등을 꼽을 수 있다.

음악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는, 만만치 않은 사명

20세기 전반에 활약했던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올더스 헉슬리는 “침묵 다음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잘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음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음악의 의도를 잘 표현하는 일, 특히 훌륭한 재생음을 내는 역할은 오디오 기기가 담당해야 마땅할 터다. 이는 ‘오디오=음악을 듣는 도구’라는 광의의 정의 아래 아이폰, MP3 플레이어, 수억원에 이르는 시스템을 모두 오디오의 범주에 넣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중에서도 실제 연주회장의 소리를 거실과 같은 다른 공간에서도 원음에 가깝게 재현하기 위해 개발된 고가의 오디오를 ‘하이엔드 오디오’라 한다. 필자는 지난 8월 강원도 평창의 알펜시아 리조트에서 열린 대관령 국제음악제의 총감독을 맡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와 나눈 대담에 참가한 적이 있다. 정 씨는 그 자리에서 “연주자는 작곡가의 의도를 청중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하이엔드 오디오의 사명은 바로 생생한 연주 현장을 내 집에 그대로 옮겨놓는 게 아닌가 한다. 물론 이는 절대로 녹록지 않은 기술과 노하우를 요구한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하이엔드 오디오의 시대를 연 역사적인 주인공은 자신의 이름 자체를 전설적인 브랜드로 자리매김시킨 미국의 마크 레빈슨.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하면서 녹음 일도 했던 그는 1973년 5명의 동료와 함께 MLAS라는 회사를 차렸고, 2년 뒤인 1975년 하이엔드 오디오 산업의 물꼬를 튼 ‘LNP-2’라는 모델(프리 앰프)을 시장에 내놓았다. 당시 LNP-2의 가격은 미화로 3천5백달러. 그 시절, 이름깨나 날리던 다른 오디오 기기들의 가격을 살펴보면 마란츠 7(1959~1966) 2백85달러, 매킨토시 C22(1963~1968) 2백80달러, C26(1968~1977) 4백50달러 등이었다. 이러한 모델들과 비교했을 때, LNP-2의 가격은 무려 10배가량 높은 가격으로 책정됐다는 얘기다. 그야말로 ‘하이엔드’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파격적인 물건’이었다. 오디오 제작자들의 출발이 대개 그렇듯 레빈슨도 음악 분야에 종사하면서 품질 좋은 앰프에 대한 욕구를 자연스레 키우다 자신을 위한 제품을 직접 개발한 것이다.

마크 레빈슨과 함께 싹을 틔운 하이엔드 오디오 시대

LNP-2는 입이 벌어질 만큼 높은 가격대를 차치하고서도 갖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진공관 오디오와 LNP-2는 완전히 다른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진공관을 사용한 당시의 오디오들은 음색이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사용자들이 듣기에 편안한 사운드를 추구한 데 반해, LNP-2는 섬뜩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착색이 없는 광대역의 소리를 냈다. 분명히 오디오적인 쾌감을 맛볼 수 있는 기기였지만 LNP-2는 기존 진공관 오디오 사용자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저음부터 고음까지, 폭넓은 대역의 소리를 재생하다 보니 귀에 거슬리는 소리마저 들렸고 ‘차갑다. 인간미도, 온기도 없다’는 비평이 불거졌다. 하지만 좀 더 사실적인 재생을 가능케 한 광대역의 사운드에 반한 열렬한 예찬론자들도 생겨났고, 이 때문에 하이엔드 오디오의 기반을 다지는 전환점이 마련됐다. 찬반 논란 속에서도 LNP-2는 보란 듯이 성공을 거뒀다. 레빈슨은 이를 기반으로 1977년 4천7백50달러짜리 파워 앰프 ML-2를 비롯해 다양한 모델을 선보이면서 사업을 확장했다. 하지만 사생활의 굴곡을 피하지 못했던 그는 이혼을 겪으면서 1982년에 회사 경영권을 하먼 카든 그룹에 넘겼다. 그 뒤, 마크 레빈슨은 1985년 자신의 수석 엔지니어였던 톰 코란젤로와 현재 비올라라는 앰프 업체의 사장인 폴 제이슨과 손잡고 첼로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면서 재기를 도모했다. 하지만 많은 명기를 빚어냈던 이 오디오 업계의 풍운아는 경영에는 취약한 면모를 보이며 결국 회사 문을 닫는 운명을 맞이했다. 현재 그는 스위스로 옮겨 다니엘 헤르츠(Daniel Hertz)라는 하이엔드 오디오 브랜드로 다시 야심 찬 도전에 나섰다. 하이엔드 오디오라는 장르를 개척한 주역인 만큼 그의 행보는 여전히 세인의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예컨대, 다니엘 헤르츠의 오디오 시스템을 배경으로 푸틴 대통령과 담화를 나누는 러시아 메르베데프 총리의 모습을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강자, 메이드 인 스위스의 미학

당대의 하이엔드 오디오 시장을 거론하자면 골드문트와 FM어쿠스틱스를 빼놓고 얘기하긴 어렵다. 둘 다 스위스 기업이지만 서로 대척점에 서 있기에 더욱 흥미로운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골드문트는 디지털 분야의 강자이고, FM어쿠스틱스는 아날로그 분야의 별이다. 먼저 골드문트의 역사를 보자면, 1977년 프랑스에서 대학생 2명이 설립한 이 회사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수준의 음질을 구현한 ‘T3’라는 톤암과 ‘레퍼런스’라는 턴테이블을 개발했다. 하지만 판로를 찾지 못해 헤매다가 미셸 레바숑이라는 IBM 출신 비즈니스맨을 만나게 됐다. 오페라 가수였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소리에 남달리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레바숑은 이 시스템의 탁월함을 알아보고는 미국으로 건너가 마크 레빈슨에게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8년에는 골드문트를 아예 인수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자신의 회사를 설립했다. 목표는 실제 공연 사운드, 더 나아가서는 연주회장의 분위기까지 재생할 수 있는 ‘극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오디오 개발. 어째서 오디오에서 재생되는 소리가 실제 소리와 다르게 들리는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최대한 원음에 근접한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포부였다. 인간의 귀는 주파수 20~20000Hz의 음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이를 가청 주파수라 한다. 하지만 인간은 귀로만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골드문트의 앰프는 0.1~3Mhz의 주파수를 재생한다. 가청 주파수의 1백 배에 달하는 주파수 대역이다.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오디오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는 셈이다.

2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기업이 조율하는 디지털의 과학, 골드문트

효율적인 아웃소싱 시스템을 구축해 20명도 채 되지 않는 소규모 기업으로 10년 넘게 두 자릿수 성장률을 이끌어온 ‘작지만 강한’ 골드문트의 레바숑 회장. 지난 10월 골드문트의 독점 수입 업체인 오디오갤러리의 청담동 쇼룸을 찾은 그는 “인간의 뇌는 소리를 인식하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하는데, 소리가 제대로 보정될수록 뇌가 덜 지친다”며 ‘소리 과학’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것이 바로 골드문트가 1990년대부터 디지털 시대를 위한 오디오 연구에 소매를 걷어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오디오 시스템에서는 고역의 속도가 저음의 속도보다 빠르기 때문에 스피커에서 재생되는 소리를 들으면 고역이 먼저 뇌에 입력되고 아주 근소한 차이로 중역, 저역 순으로 뇌가 인식하면서 뇌에서 다시 각 음역대를 맞추는 작업을 한다. 이 같은 현상으로 뇌는 쉽게 피곤해지고, 실제 소리와 스피커의 소리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당시 앰프와 스피커 등 하드웨어만 가지고는 실제 소리에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레바숑 회장은 디지털로 왜곡된 소리를 보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사람이 부재했기에 그는 인재를 키우기로 마음먹고 당시 스위스 공대의 베로닉 아담이라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디지털 보정 기술을 연구하게끔 지원했다. 그 결과 10여 년 만에 탄생한 ‘프로테우스’라는 기술은 각 음역대의 소리가 스피커에서 재생돼 귀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차를 보정한다. 레바숑 회장은 “프로테우스는 스피커 영역에서의 보정 기술이고, 골드문트는 음향과 뇌의 인식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자체적으로, 그리고 세계 유수 대학과 함께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부품 하나하나도 인간의 손과 귀를 거친다, FM어쿠스틱스
디지털 오디오가 뒷받침하는 소리 과학에 총력을 기울여오면서 아널드 슈워제네거, 톰 크루즈 등을 고객 명단에 올렸다는 골드문트와 달리 아날로그만이 진정한 현장음을 재생한다는 믿음을 고수하는 FM어쿠스틱스. 퀸, 요요마와 같은 스타 음악인들이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이 브랜드 역시 ‘정밀 공화국’으로 통하는 스위스가 자랑하는 기업이다. FM어쿠스틱스의 창립자 마누엘 후버는 독학으로 음향을 공부하다가 앰프를 만들게 됐고 이 중 하나를 친구에게 빌려줬는데, 이 제품이 비틀스 음악의 산실인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까지 사용됐다고 한다. 결국 비틀스는 이 앰프를 사용해 음반을 제작하게 됐다고. CD조차도 사라져가면서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는 요즘 시대에도 디지털 소스를 완전히 배제하고, LP로 음악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후버 사장은 모든 부품과 제품을 하나하나 인간의 귀로 테스트하며 제작하는 일종의 ‘장인 시스템’을 까탈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고집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을 거치려면 상당한 시간과 자본을 투입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14억원대의 시스템으로 국내에서도 장안의 화제가 됐던 XS-1 스피커의 경우, 오케스트라나 오페라와 같은 대편성곡의 재생에도 탁월한 것으로 명성이 높은 ‘오더 메이드 제품’으로 1년에 2조밖에 생산하지 못한다. 그래서 FM어쿠스틱스 제품들은 주문을 해도 6개월에서 1년을 기다려야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기다림의 미학’으로도 유명하다.
저마다 다채로운 개성을 자랑하는 하이엔드 오디오 세계
1980년대에는 고급 시계, 자동차, 하이엔드 오디오가 부의 상징이었다. 1990년대에 이르자 오디오 시장은 크게 하이엔드 오디오 시장과 B&O나 보스와 같은 브랜드들로 대표되는 럭셔리 오디오 시장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하이엔드 오디오 시장은 단순히 ‘궁극의 소리’만을 위해 투자하면서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가격 논란에 휩싸이고, 디자인의 완성도는 떨어지게 된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 럭셔리 오디오 브랜드들은 디자인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이러한 장점을 무기로 삼은 활발한 마케팅에 힘입어 제품을 판매하다 보니 좋은 사운드를 개발하는 데는 제약을 안게 된 측면이 있었다. 이러다 보니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양쪽 모두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현재 하이엔드 브랜드들은 가격을 현실화하고 디자인이 빼어난 제품을 만드는 데, 그리고 럭셔리 브랜드들은 좋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저마다 강한 개성과 장점을 지닌 오디오 기기들이 나날이 소리 환경을 북돋우기 위한 비상의 날갯짓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천편일률적인 사각형 디자인을 거부하고 달팽이를 닮은 스피커를 만들어낸 천재 디자이너가 ‘공명과 반사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추구하며 설계했다는 남아공의 파워풀한 스피커 브랜드, ‘앰프를 켜지 않아도 음악을 들려준다’는 평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바이올린 선율을 닮은 음향에 클래식 재생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한다는 이탈리아 브랜드, 앰프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얇은 두께를 자랑하는 데다 예술적 감성까지 반영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프랑스의 차세대 앰프 브랜드 등…. 그야말로 다채로운 소리의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내게 맞는, 그리고 내가 몹시도 사랑하는 음악에 꼭 맞는 소리의 질감과 촉감, 맛을 찾기 위한 향한 여정은, 그래서 약간은 고통스럽지만, 한없이 즐거울 수도 있는 도락(道樂)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삶을 지루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나 자신’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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