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담긴 황용엽의 ‘삶의 증언’

조회수: 2976
9월 05, 2018

글 고성연(파리·오빌레 현지 취재)

인간이 숙명적으로 겪는 고통과 절망, 치유와 회복을 자신만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캔버스에 담아내온 황용엽. 60년 넘도록 시류에 좌우되지 않고 꾸준히 추구해온 자화상 같은 인간상은 그가 살아온 인생인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격동을 대변한다. 1989년 제정된 이중섭미술상의 첫 번째 수상자이기도 한 황용엽의 개인전은 일관된 주제 안에서도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노장의 아름다운 예술혼을 느끼게 한다.

1
01
2
02
3
03
4
04
단지 노장이라는 사실이 품격과 깊이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간 속에 단단히 여문 내공과 지혜가 어우러진 노장의 작품에는 형언하기 힘든 감동이 있다. 더군다나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운 시도를 꾀하는 열정이 넘치는 예술가의 풍모는 경외감마저 일으킨다. 올해로 여든여덟의 나이, 화가의 길에 들어선 지 60여 년이 된 작가 황용엽을 지지하고 사랑하는 이들도 바로 이 같은 맥락에서 그를 바라볼 것이다. ‘인간애(人間愛)’라는 단어로 압축되는 황용엽의 예술에 대한 끝없는 갈구를 엿볼 수 있는 오는 9월의 전시 <같은 선상에서>를 주목할 만한 이유다. 이중섭미술상 제정 30주년 기념전이자 1호 수상자(1989년)인 그의 28번째 개인전이다.
인간을 그리고, 인간성을 담다
“인간성의 추구는 내 화필이 꺾이지 않는 한 결코 변할 수 없는 나의 명제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변화는 있지만 황용엽은 늘 인간을 연구하고 그려왔다. 스스로 ‘삶의 증언’이라고 표현하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을 이해하려면 그의 인생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931년 평양 출생인 황용엽은 일제강점기, 분단 등으로 점철된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거치며 여러 굴곡 속에서도 독자적인 회화 양식을 구축하고 꾸준히 창작혼을 불태워왔다. 청년 시절 북한의 징집을 피해 월남을 감행한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지만 총상을 입고 제대해 생활을 위한 또 다른 전쟁터에 던져졌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홍익대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해 추상화의 대가 김환기 교수를 사사했다. 근현대 한국 화단을 휩쓴 불교와 불교적 미니멀리즘과 차별되게 황용엽은 초기 작품부터 묘사적이거나 설명적인 것과는 거리를 둔 구상 회화를 추구했고, 1960년대에 이미 독자적인 화풍을 창안했다. 이 시기에 간신히 식별 가능한 개별 형상이나 인간의 형태를 실루엣과 얼굴로 축소시킨 ‘여인’ 시리즈가 그렇게 탄생했다. 인물을 보는 것인지 추상적 표면을 보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재료에 갇힌’ 듯한 캐릭터, 그리고 극한의 고통을 투영한 듯한 붉은색, 황토색, 갈색 등의 색채를 보면 윌렘 드 쿠닝이나 잭슨 폴록 같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푸른색과 녹색을 지배적으로 사용하며 ‘인간’을 담아냈는데, 유신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했는지 공포와 비인간적인 인간상을 그려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 뿐만 아니라 선으로 도식화된 회색과 갈색 등의 단색조 그림을 그렸는데, 미니멀리즘의 요소를 담고 있고 거의 추상에 가까웠다. 이 시기의 ‘인간’ 시리즈는 한국적 모더니즘과 같이 반복된 선과 패턴을 담되, 작가 특유의 이념과 형식으로 인간상을 구현해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1980년대에는 다양한 전통 문양과 민화적 요소를 반영하면서 전반적으로 색채가 밝아지고 형상에 생동감이 더해졌으며 보다 구체적인 인간상이 나타났다. 1989년에는 조선일보에서 새로 제정한 이중섭미술상의 첫 수상자가 되었고, 이는 작품성을 널리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1990년대부터는 활발한 작가 활동을 펼치면서 파란만장한 삶의 질곡이나 전쟁의 트라우마가 조금은 치유된 듯 생명력이 돋보이는 경쾌한 인간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5년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린 19회 개인전 <황용엽-삶의 이야기>전에서 이 같은 경향이 더 다양하고 짙게 드러났는데, 미술평론가 최병식은 ‘다각적 휴머니티로의 변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열정 어린 에너지가 느껴지는 신작
‘인간’이라는 일관된 소재를 다루면서도 꾸준한 자기 성찰 속에서 쉼없이 변화를 꾀해온 황용엽의 이번 개인전은 그의 과거 작품은 물론, 열정으로 빚어낸 신작 등 40여 점을 볼 수 있는 기회다. 신작의 경우 현대사적 요소를 형상화하고 선과 색이 간단해지고 단조로워진 점이 눈에 띈다. 1970년대 작품의 색감과 유사한 회색과 청색의 단색조가 주를 이루지만 밝고 가벼워진 느낌이다. 당시 갇혀 있던 인간의 형태와 흡사하지만 더욱 도형적이고 한국적이며 토속적인 문양과 패턴이 더 과감하게 표현됐다. 특히 스키광인 작가가 활강하며 내려올 때 슬로프 위에 그어진 선을 캔버스 위에 담아냈다고 한다. 다양한 구도와 분할된 화면에는 각기 다른 스토리가 담겨 있는 듯하다. “세월의 흐름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의식에 변화를 가져다줬다. 극한 속에서 존재 의미를 찾는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모았던 나는 또 다른 실험의 길로 들어섰다”라고 말했던 황용엽의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연륜 속에서 빛을 발하는 창조적 도전의 에너지는 그의 ‘인간’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이중섭미술상 제정 30주년을 기념해 2018 아트 조선 온 스테이지의 네 번째 기획전으로 마련된 전시는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오는 9월 7일부터 16일까지 열흘 동안 열린다. 문의 아트 조선 02-724-7832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