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고, 다정하고, 위대한 그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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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03, 2021

글 고성연 | 이미지 제공 학고재 갤러리, 윤석남

‘윤석남’은 미술관 산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낯설지 않은 이름일 것이다. 주요 국공립 미술관의 소장 작가이고, 한국 여성주의(feminism) 미술의 대모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붙는, 다분히 상징적인 이름이기도 하니까. 정작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의 단초가 된 건 그런 무게감 있는 수식어가 아니라 어쩐지 따스하고 귀여운 매력이 풀풀 풍기는 작품이었지만 말이다. 지난해 말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진행 중이던 <내 나니 여자라>라는 전시를 보다가 마주친 ‘우리는 모계 가족’(2018)이라는 설치 작품이었다. 굵게 주름 잡힌 청색 커튼을 배경으로 5명의 여성과 한 마리 강아지가 사이좋게 모여 있는데, 윤석남 작가 본인과 그녀의 어머니, 언니와 동생, 딸, 그리고 딸이 키우는 암컷 강아지를 모델로 삼았다는 설명을 접하고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2주쯤 뒤 경기도 화성에 있는 그녀의 아틀리에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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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300m2(1천 평) 남짓한 대지에 시원스레 펼쳐진 2층짜리 건물. 소형 잠수함 정도는 너끈히 소장할 수 있을 듯한 규모다. 천 개 단위의 목조각 설치 작업을 한 공간에 늘어놓는 식으로 워낙 담대한 스케일로 작업하는 윤석남과 자못 어울리는 공간이 아닐 수 없다. 빨간색 니트 상의에 작업용 앞치마를 두른 채 마중 나온 그녀를 따라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기분 좋은 생동감이 뿜어져 나오는 ‘현장’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드로잉과 채색을 하는 작업대, 나무를 다듬는 데 쓰는 듯 보이는 기계들, 한쪽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목조각상들…. 작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아우르는 사유와 몸부림을 품은 공간이어서일까. 아티스트의 작업실에서는 널브러진 도구나 작은 나무 조각 같은 사소한 것마저도 은근한 설렘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마침 서울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앞두고 있던 터라 미리 그녀의 ‘신작’을 살짝 구경하는 행운도 누렸다. 한지에 채색을 한 초상 시리즈인데, 벽에 기대어 있는 몇몇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봐도 그다지 잘 알려진 인물들 같지는 않다. 그녀의 설명인즉슨 여성 독립운동가들이란다. 우리는 대개 유관순 열사만 기억하지만 역사적 기록에는 2천 명가량의 이름이 존재한다고. 다만 얼굴이 없는 경우가 다수다. “(독립운동가를 다루는 건) 처음인데 자료가 별로 없어요. 그래도 1백 명 정도는 하고 싶어요. 얼굴 있는 사람은 다 하려고요.” 작업대 위에 펼쳐진 채색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초지를 올려놓고 먹으로 그대로 뜨고…”라면서 세세히 설명하는 그녀는 신이 나 보였다. 말끝에 톤을 높이면서 “너무 재미있어”라고 거의 울먹이는 수준으로 탄성을 내지르기도 한다. 마흔 살에 다소 ‘늦깎이’로 미술가 커리어를 시작한 지도 어느새 40년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짐작대로 유쾌하고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녀의 열정 가득한 모습을 보노라니 이렇게 재미난 일을, 그리고 잘하는 일을 놓쳤다면 정말이지 어쩔 뻔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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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을 꾸리다, ‘늦깎이’의 도전
실제로 그녀는 “미치도록 미술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열 살 무렵부터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고, 그 꿈을 줄곧 간직했지만 집안 형편상 미술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윤석남의 부친은 한국 최초의 극영화를 촬영한 감독이자 문필가인 윤백남이다. “아버지가 책이 많았어요. (나도) 서재에서 살다시피 했지. 책들 덕분에 화가란 직업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런데 고 1 때 부친이 병으로 세상을 뜨는 바람에 어머니가 홀로 육 남매를 어렵사리 키웠야 했다. 그래서 둘째 딸인 그녀도 야간으로 들어간 대학마저 그만두고 일찌감치 직장 생활을 했다. 그렇다고 미술에 대한 열정의 불씨가 꺼진 건 아니었다. “한국전력에 다녔는데, 거기에 도표를 그리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분이 아마도 화가였던 것 같은데, 도표 작업을 위해 회사에서 방을 줬어요. 나는 거기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구경했죠.(웃음)” 결혼을 하고서는 시어머니를 모셨다. 1939년생으로 일제강점기의 끝자락, 한국전쟁, 분단 등 온갖 굴곡진 시기를 거치면서 살았던 데다, 결혼과 시집살이로 이어지면 대개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접하는 ‘뻔한 신파’처럼 스토리가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윤석남의 경우에는 좀 달랐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굴러가는 삶 속에서 그녀는 시인 박두진에게 서예를 배우고 화실에서 드로잉과 회화 레슨을 받는 등 자아 찾기를 위한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러던 중 복층 구조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방 하나를 작업실로 쓰게 된다. 드디어 ‘자기만의 방’을 소유하면서 그녀는 그토록 갈망했던 미술에 뛰어든다. 1979년의 일이다. 윤석남 작가의 그림책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2016)를 보면 당시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나온다. “스물일곱에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다가 마흔 들어 내 방을 갖게 되었어요. 경치 좋고 볕 잘 드는 나의 이층 방. 드리운 볕 가운데 한참 있으니까 여태 안 보이던 것들이 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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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되뇌고, ‘그녀들’을 소환하고…
변변한 정규 교육과정도 밟지 않은 주부 출신 미술인. 당연히 미술 생태계에서 환영할 만한 ‘스펙’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친구를 통해 알게 된 또래 여성 작가들과 어울리면서 작업을 해나갔다. 그렇게 만난 13명의 여성 미술인이 돈을 모아 구반포 근처에 작업실도 함께 얻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문예진흥원 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회화 작품을 선보였다(1982년). 주제는 ‘어머니’. 그녀 자신의 어머니와 장사하는 여성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는데, 이 전시로 호평을 받으면서 <제1회 82인간11전(인간전)>에도 참가하는 물꼬가 트였다. 이후 그룹전에 참가하기도 하고 미국 뉴욕에서 체류하면서 해외 동향을 몸소 익히기도 하는 등 부지런히 달리던 그녀는 1985년 한국 여성주의 미술사에서 의미 있는 자취로 여겨지는 ‘시월모임’을 결성한다. ‘구반포 모임’에서 만나 ‘결혼한 또래 작가’라는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친분을 다져온 김인숙, 김진숙, 윤석남 등 3인방이 뭉친 것. 러시아의 10월 혁명에서 따온 ‘시월모임’ 멤버는 1985년과 1986년 두 차례 전시를 가졌는데, 첫 전시는 ‘주부 화가’ 정도로 불리면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반(半)에서 하나로>라는 두 번째 그룹전은 여성주의 미술의 출현을 예고한 최초의 전시로 언론과 문화 예술계, 그리고 여성운동계의 이목을 끌었다. 당시 윤석남의 출품작은 생계와 가사를 위한 노동과 양육 등으로 고달픈 어머니의 희생을 그린 ‘손이 열이라도’(1986). ‘어머니’라는 주제는 그 후로도 10년에 걸쳐 윤석남의 작품 세계를 지배했다. 1993년 금호미술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가졌는데, 전시 제목이 <어머니의 눈>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그녀는 버려진 목재를 조립해 여성의 신체를 입체적으로 조각하는 설치 작업을 선보인다. 브롱스 미술관의 남미 작가전을 보고 귀국한 뒤 강릉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를 방문했는데, 당시에 주워 온 감나무 가지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나무 작업을 탄생시킨 것이다. 시작은 개인적인 서사였지만 어머니의 존재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인내로 점철된, 하지만 치열하게 살면서도 당당함을 추구했던 한국 여성의 삶을 투영하고 있기에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대안적 여성주의 문화 운동을 꾀했던 단체 ‘또 하나의 문화’와의 교류를 비롯해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를 발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작품에는 역사 속 인물들도 반영하면서 여성들의 연대를 확장하는 데도 앞장섰다. 사실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자체도 생소했던 시기에 그저 자신을 쏟아내기 위해 미술을 시작했지만 그녀는 ‘여성주의 미술가’라는, 자칫 프레임에 갇힐 수도 있는 표현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나에겐 이 땅에 여성으로 태어났고 여성으로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바로 페미니즘을 불러온 것 같다. (하지만)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그럴 것이다.” 시인 김혜순과 나눈 대담에서 그녀가 직접 한 말이다. 결국 거창한 논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주체가 되기 위해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공정한 시각으로 봐달라는 외침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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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끄집어내다, 자화상으로 문을 연 채색화
여성주의라는 수식어가 상업적 논리가 지배하는 갤러리 시장에서는 제약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윤석남’은 어느덧 브랜드가 되고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9백99개의 목각 여인상 작업(‘999-빛의 파종’)으로 여성 미술가 최초로 이중섭미술상을 거머쥐고(1996년) 베니스 비엔날레 등 해외 유력 행사에 초청받았으며 영국 테이트 컬렉션의 소장 작가(‘금지구역 I’)가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기나긴 세월 동안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속 시원히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서 그림을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정말 ‘나 자신’에 대해서는 요만큼도 말할 게 없었던 거죠. 너무 부끄럽고, 그래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당한 우리 엄마 얘기로 시작한 거예요.” 1990년대부터 조각이나 설치로 자화상을 담아내기도 하고 동시대 여성의 불안과 자괴감을 담은 작품(‘핑크룸’ 등)도 했지만, 스스로에 대한 봉인을 제대로 풀기 시작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2018년 학고재에서 연 개인전 <윤석남>이 바로 그 봉인 해제의 무대였다. 그녀는 예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 윤두서 초상을 보고 매료된 기억을 살려 채색화를 배웠고, 동양화 기법으로 채색한 다수의 자화상을 학고재 개인전에서 선보였다. 자신의 얘기를 처음으로 전면에 끄집어냈다는 그녀는 이후 자신은 물론 소중한 벗, 그리고 이번에는 독립운동가의 초상까지 ‘초상 시리즈’에 몰두하고 있다. “초상을 공부하다 보니 조선시대에는 여성 초상이 거의 없었더라고요. 벼슬을 한 남자들만 있고. 은근히 화가 나고, 뭐가 이렇게 우럭우럭 올라오더라고요.” 이달 중순 학고재 개인전(2월 17일~3월 28일)에서 선보일 여성 독립운동가 초상의 경우에도 그녀는 할 말이 많다. 한 고위 관리가 동향 출신인 유관순을 알리는 데 맹렬히 나서는 바람에 다른 존재들은 묻혔는데, 실제로는 남쪽에 유관순이면 북쪽엔 동풍신이라는 기록도 있고, 대다수가 모르는 진실이 버젓이 있다는 것. 전시 제목은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 역사를 뒤흔든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 김이경 소설가가 동명의 책도 출간할 예정이다. 윤석남의 ‘허스토리(herstory)’는 앞으로도 쭈욱 궁금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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