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말, 런던의 거리와 골목을 창조의 영감으로 한가득 수놓는 디자인 축제는 도시를 한껏 달아오르게 만든다.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35만여 명의 관람객들로 그 어느 때보다 붐빈 가운데 다문화 사회를 기반으로 한 각양각색의 재능이 활기차게 나래를 편 2011년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 개성 만점 디자인의 다채로운 매력과 기운이 한껏 발산된 그 신나는 축제의 현장에 다녀왔다.
4 런던 켄싱턴공원의 서펜타인 갤러리에 설치된 2011년의 파빌리온. 스위스 출신의 명성 높은 건축가 페터 줌터르(Peter Zumthor)의 겉멋에 치중하지 않고 자연의 배경과 본질에 충실한 철학이 느껴진다.
5 동남아시아 출신으로 런던에서 활동하는 젊은 디자이너 라토레 크루즈가 텐트 전시회에서 선보인 아름다운 수공예 종이 전등갓 ‘이카루스(Icarus)’.
6 영국의 컨템퍼러리 가구 업체 이스태블리시드 & 선즈가 일본의 디자인 스튜디오 넨도와 함께 선보인 ‘마이 런던(My London)’. 런던 각 지역의 2만5천여 개 지도가 프린트된 투사지를 벽에 붙여 마치 안개 낀 도시의 이미지가 저절로 연상케 한다.
7 낡은 신문치 뭉치에 라텍스를 입혀 다용도 가구로 거듭나게 한 흥미로운 작품. 영국의 수지 버튼(Suzie Button)은 이 작품으로 100% 런던 전시회에서 수여하는 블루프린트 어워즈의 ‘유망주’ 상을 받았다.
9 100% 런던의 노르웨이관에 출품한 젊은 디자이너 마르틴 솔렘(Martin Solem)의 의자. 스칸디나비아 가구 특유의 단정미가 돋보이는 디자인과 편안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색상의 조화가 눈에 띈다.
10 영국 요크셔 출신의 수공예 가구 디자이너 앤서니 하틀리(Anthony Hartley)의 장인 정신에 입각한 작품. 알록달록한 색상의 줄무늬와 세 번에 걸쳐 구불구불 접힌 유연한 곡선이 인상적이다.
‘창의 산업의 허브’로 불리는 런던은 온갖 국제적인 행사가 열리는, 동적이고 활기찬 도시인 동시에 왠지 모르게 창백하고 싸늘한 얼굴을 한 채 으슬으슬한 기운을 내뿜는 듯한 느낌을 주는, 묘한 양면성을 지닌 도시다. 하지만 해마다 초가을로 접어들 즈음, 세계적인 디자인 행사인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이 펼쳐지면 도시 자체가 후끈 달아오르며 생동감 넘치는 축제의 터전이 된다. 올해는 공식 페스티벌 기간인 지난 9월 17일부터 25일까지 세계 50여 개국에서 약 35만 명의 관람객이 각종 행사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거리와 골목마다 넘실대는 창조적 영혼의 진취적인 숨결이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와 닿았다. 런던이라는 도시 특유의 매력과 맥을 같이하듯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다채로운 개성이 무엇보다 돋보인 디자인 잔치의 현장을 소개한다.
일반적인 남녀노소를 관람 대상으로 놓고 본다면 디자인 축제에서 단연 시선을 끄는 볼거리는 런던 시내의 랜드마크를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시키거나 분위기를 살짝 바꿔주는 흥미로운 요소를 더하는 식으로 신묘한 변신의 마법을 부리는 설치물(installation)이다. 수준 높은 설계 솜씨가 뒷받침된 규모의 미학으로, 때로는 뇌쇄적이기까지 한 색감과 자태의 조화로 보는 이들을 사로잡고 눈요기를 톡톡히 시켜준다. 수만 가지 작품을 세세히 살펴보기 귀찮다면 시내 곳곳에 둥지를 튼 설치물의 향연만 즐겨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더구나 대개 수명이 유한하기에 더욱 가치가 높은 게 설치 작품 아니던가.
올해 60여 개의 크고 작은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며 방문객 숫자가 60% 증가했다는 사우스켄싱턴의 빅토리아&앨버트(V&A) 박물관은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의 허브 역할을 담당한다. 올해 이 박물관 앞에는 여성 건축가 어맨더 레베트(Amanda Levete)의 스튜디오 AL_A에서 설계한 ‘팀버 웨이브(Timber Wave)’가 정문 앞에 모습을 드러내 당당하게 위용을 뽐냈다. 미국산 참나무를 재료로 정밀하게 설계된 이 작품은 커다란 비대칭 원형을 둘러싼 격자의 매력을 무기로 행인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박물관으로 인도하는 도우미가 되었다. V&A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갤러리 공간을 활용한 이색적인 설치 작품들이 또 다른방식으로 걸음을 멈추게 한다. 요즈음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프랑스 출신의 듀오 로낭&에르완 부훌렉 형제가 덴마크 텍스타일 업체 크바드라(Kvadrat)와 손잡고 선보인 널찍한 카펫 설치물 ‘텍스타일 필드(Textile Field)’는 그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다.
240m²의 넓은 바닥을 푸른색 계열의 줄무늬가 물결치는 듯한 문양의 카펫으로 감싸며 고전 명화의 품격이 느껴지는 ‘라파엘 코트’를 방문객들에게 자유롭게 쉬어 갈 수 있는 편안한 ‘텍스타일 라운지’로 바꿔놓았다. 17세기 건축물인 세인트 폴 대성당에 마련된 미니멀리즘 건축가 존 포슨(John Pawson)의 크리스털 렌즈 ‘퍼스펙티브즈(Persepectives)’도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크리스털 브랜드 스와로브스키와 협력해 만든 이 커다란 렌즈는 성당을 건축한 크리스토퍼 렌 경이 만든 ‘기하학적인 계단’을 방문자들이 흔히 보지 못하는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원작자의 천재성을 부각시켰다. 포슨은 “렌즈와 볼록 거울 장치 덕분에 밑에 서서 올려다보면 성당 꼭대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며 “육안의 수준을 넘어서는뭔가를 볼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이 밖에 영국왕립예술학교(RCA) 건너편에 위치한 켄싱턴 파크의 작지만 근사한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y)에서 매년 7월 초부터 10월 중순까지 공개하는 파빌리온은 이미 알 만한 이들 사이에서는 런던의 명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페터 춤터르가설계한 올해의 파빌리온은 켄싱턴 파크를 배경으로 삼은 듯한 ‘작은 정원’을 표방한 작품으로, 나무에 검은색 캔버스 천을 씌워 질감과 색감이 정감 어린 느낌을 주며 단지 눈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정화시켜주는 듯하다. 은근히 동양적인 정서도 느껴지는 이 공간에서 색조가 우아한 꽃과 풀을 감상하며 차 한잔을 마시면 절로 사색에 빠져들게 된다.
주최 대상을 놓고 보았을 때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은 100% 디자인, 텐트(Tent), 트렘셰드(Tramshed), 디자인 정션(Design Junction) 등 크게 8개의 주요 그룹으로 나눠지고 지역별로 봤을 때는 서쪽의 브롬튼(Brompton), 시내 중심가의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 동쪽의 쇼디치(Shoreditch Design Triangle) 등 6개의 디자인 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마디로 디자인이 런던 시내 구석구석을 다양한 색깔로 물들인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오색찬란한 디자인의 잔치 속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장소는 다수의 국가관이 자웅을 겨루는 100% 디자인 전시회가 열리는 런던 시내의 얼스코트(Earl’s Court) 국제 전시장이다.
올해는 앞서 9월 초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메종 오브제(Maison & Objet)의 하반기 전시회에서 서울 디자이너스 파빌리온이 호평을 받은 데 이어 런던에서도 한국 디자인의 미래에 청신호가 환하게 켜졌다. 한국관이 카롤린 올슨, 마르틴 솔렘 등 쟁쟁한 신예들을 소개한 노르웨이관과 더불어 전시회의 ‘베스트 부스’로 선정되었으며 한국 디자이너 김기현 씨가100%에서 수여하는 디자인 상인 블루프린트 어워즈(Blueprint Awards)의 ‘최우수 소재’ 부문 수상자로 뽑히는 등 경사가 겹치며 국제 무대에서 ‘코리아 파워’의 가능성을 한껏 뽐낸 것이다(한국 디자이너들의 선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자연주의가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인지 원목을 이용한 수공예 작품이 눈에 많이 띄었고, 최신 경향을 반영하듯 단순한 재활용의 차원을 넘어 버려진 재료를 새로운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업사이클링(upcycling)’ 제품들도 강세였다. 블루프린트의 유망주 상을 거머쥔 주인공도 낡은 신문지에 라텍스를 입힌 업사이클링 가구를 내놓은 영국의 수지 버튼(Suzie Button) 양. 그녀는 “신문지 뭉치도 쓸모 있는 가구로 제2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지만 상까지 받을 줄은 몰랐다”며 자신의 작품에 걸터앉아 밝게 웃었다. 또 다른 젊은 영국디자이너 닉 프레이저(Nick Fraser)는 여자 친구가 실내장식에 사용하는 핀을 가져다 시계의 분침으로 사용하는 재치를 발휘해 멋진 작품을 내놓기도 했다.
이처럼 ‘젊은 피’의 약진도 엿보이지만 100%에서는 아무래도 쟁쟁한 기성 브랜드와 영국의에드워드 바버와 제이 오스거비 콤비, 네덜란드의 키키 반 아이크 등 스타 디자이너의 세련미 짙은 작품들이 눈에 띈다면 런던 동쪽의 브릭레인(Bricklane) 근처에 자리 잡은 텐트 전시회에서는 강한 개성을 토대로 한 실험적인 디자인을 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핸드메이드라도 규격에 따라 생산되고 있는 참신한 제품이 꽤나 많았기 때문에 마냥 실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뽕나무 소재의 아름다운 수공예 종이 전등 갓 ‘이카루스’와 실내외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대나무 원목의 무늬와 결을 곱게 살린 ‘라비그 체어(Labig Chair)’ 등을 선보인 라토레 크루즈(Latorre Cruz)의 작품이 그 예다.
밀라노, 런던 등 대규모 디자인 축제가 열리는 도시의 공통적인 특징은 거리의 볼거리가 주요 공식 행사보다도 더 매혹적이라는 점이다. 그냥 심심찮은 정도가 아니라 각종 디자인 상점과 멀티 브랜드 숍의 참여 정신은 규모나 아이디어 면에서 높이 살 만하다. 부유층이 밀집한 런던 서쪽의 브롬튼 지역. 영국 리빙 업계의 제왕 테렌스 콘란이 거느린 콘란 숍(Conran Shop), 디자인 업계 여성 파워의 하나인 리나 카나파니가 운영하는 민트(Mint), B&B 이탈리아 등이 다양한 행사를 벌이며 샴페인을 터뜨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유분방하고도 예술적인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다면 푸미(Fumi) 등 인상적인 갤러리들이 모여 있는 쇼디치,정교한 공예품에 대한 열망이 크다면 클럭큰웰(Clerkenwell) 지역을 찾으면 된다. 특정 날짜에 전시품을 염가에 살 수 있는 기회도 노려봄직하다.
올해 들어 적극적으로 활약을 보이고 있는 런던 중심가 홀본 근처에서는 디자인 그룹 디자인 정션이 처음으로 문패를 내걸고 잔치에 동참했다. 히치 밀리어스(Hithch Mylius), 앵글포이즈(Anglepoise), 카펠리니(Cappellini) 등 내로라하는 브랜드가 참여한 이 행사에서는 보 매클러란(Beau McClellan)의 높이 3m, 너비 5m 규모의 LED 샹들리에가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2백 개가 넘는 원형의 유리 공을 동원해 제작한 이 샹들리에는 아이폰, 아이패드 등 첨단 기기를 사용해 조명의 색깔도 바꿀 수 있다고. 영국의 대표적인 컨템퍼러리 디자인 브랜드인 이스태블리시드 & 선즈(Established & Sons)는 일본의 디자인 스튜디오 넨도(Nendo)와 함께 ‘런던’이라는 도시를 주제로 한 특별한 쇼룸을 선보였다. E&S의 가구 소품이 놓인 공간을 무대로 런던 각지역의 2만5천여 개 지도가 프린트된 투사지를 벽에 붙여 안개 낀 도시의 이미지가 저절로 떠오르게끔 꾸민 공간이다. 넨도 스튜디오의 설명대로 ‘굉장히 역동적이지만 여러 면모를 지닌 모호한 얼굴의 도시’인 런던. 해가 거듭될수록 ‘팔색조’ 매력이 더 잘 살아나는 런던 특유의 창의성을 떠받치는 원천 중 하나는 바로 그 양면성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