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과 수집 사이 , 알렉스 린(Alex 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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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 2016

글 김민서

한 가지에 집착하는 사람을 ‘덕후’라 부르며 폄하하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성공한 덕후’라는 표현이 생겨날 만큼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 게다가 요즘의 ‘덕후’들은 더 이상 집 안에 틀어박혀 하나에만 몰두하지 않고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거리낌없이 소통하며, 자랑할 줄도 안다. 홍콩에서 만난 개인 컬렉터 알렉스 린(Alex Lin) 역시 ‘현대판 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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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은 시간이 축적돼 이루어진 한 사람의 역사다. 수집가의 수장고를 들여다보면 대단한 집념과 고집, 외로움의 세월이 느껴진다. 홍콩 금융계에 종사하는 알렉스 린(Alex Lin)은 독특한 컬렉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를 아트 컬렉터라고 간단히 소개하기에는 컬렉션의 스펙트럼이 방대하고 지식의 깊이가 남다르다. 카메라부터 도자기, 포켓 워치, 나무 성냥갑, 조각과 회화에 이르기까지 그는 일생 동안 컬렉팅을 쉰 적이 없다. 그리고 각 카테고리마다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자랑한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

집착은 컬렉터로서 타고난 기질
평생 수집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알렉스는 컬렉팅에 푹 빠져 산다. 그리고 그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동전이나 스탬프, 지도 같은 자잘한 물건을 모으기를 좋아했어요. 수집은 저같이 물건에 집착하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때 모은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아직도 갖고 있다는 말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유럽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것이 그의 이런 수집벽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원인이었을까. 미술관과 박물관을 드나들며 예술에 관심을 갖던 그는 결국 경제학과 예술사를 같이 공부하기에 이른다. 플리마켓에서 이런저런 앤티크 오브제를 구입하기 시작했는데, 컬렉션이라는 개념도 없었기에 별 원칙도 취향도 없이 그저 사 모았다. 그러던 중 오래된 서점에서 첫 번째 컬렉션 대상을 발견한다. “15년 전쯤, 서점에서 우연히 카메라에 관한 책을 읽었어요. 1930년경 카메라도 있었는데, 가격이 비싸지 않아서 구입했어요. 이후로 카메라 관련 책을 많이 읽고 공부했죠.” 그게 시작이었다. 앤티크 카메라에 관심이 생긴 그는 카메라를 하나둘 구입했다. 그렇게 차츰 커진 카메라 컬렉션 규모는 4백 대를 훌쩍 넘겼다. 양도 양이지만 컬렉션의 깊이가 웬만한 카메라 박물관과 경쟁할 수준이라고 스스로도 자신 있어 했다. 요즘도 간혹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열리는 카메라 옥션을 기다렸다가 희귀한 카메라를 발견하면 구입한다. “예전과 다른 건 그냥 오래된 게 아니라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긴 걸 구입한다는 거죠. 이를테면 회사가 파산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출시한 카메라라든지.”
그의 관심은 카메라에서 도자기와 세라믹으로 나아갔다. “학창 시절에 도자기를 배운 적이 있어 관심이 많았어요. 조각 같은 도자기 오브제부터 직접 사용하는 생활 도자기까지 다양하게 모았어요. 세라믹은 주로 동양보다는 서양 작품이 많아요.” 그가 영국 도예가 월터 킬러(Walter Keeler)의 도자기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일본이나 중국 도자기도 여러 점 소유하고 있다.
2~3년 동안은 포켓 워치에 매료되어 10개 정도 구입했다. “포켓 워치는 1650년에서 1950년까지 약 3백 년 동안만 제작됐어요. 그러니 컬렉션만 보아도 포켓 워치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죠. 저는 이제 딱 보면 이 시계가 언제 제작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어요.” 그는 컬렉션으로 결정한 아이템에 대해서는 책을 읽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이다. 스스로도 ‘미쳤다’고 표현할 정도. 컬렉션의 카테고리와 개수는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해도 구입할 때마다 엑셀 파일로 정리해둔다. 아이패드에 컬렉션을 분류해 사진을 저장해놓은 걸 보니 그의 꼼꼼하고 집요한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명감과 만족감의 공존
회화를 좋아하지만 다른 컬렉션에 비하면 많지 않은 편이다. 젊은 작가 위주인데, 어떤 작가는 꾸준히 작품을 구입해 개인적으로 작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10~2011년에 작은 옥션에서 일본 초현실주의 작가 다쿠미 가마의 회화를 보고 한눈에 반했어요. 당시 처음으로 옥션에 나온 작가였는데, 꼭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민 없이 저질렀죠.” 이후 그는 소속 갤러리에 연락해 그의 전시 소식을 받아보고, 작품도 꾸준히 구입했다. 다쿠미 가마의 섬세한 표현력과 재치는 어쩐지 알렉스의 성향을 닮은 듯하다.
그가 미술 작품을 구입할 때 세운 한 가지 원칙은 꼭 갤러리를 통한다는 것. “갤러리가 시장에 굉장히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갤러리는 젊은 작가들이 작품을 보여줄 채널이고, 저 같은 사람도 작품을 접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들을 존경합니다.” 2년 전 그가 결혼할 당시 작가가 청첩장을 디자인해줄 정도로 둘은 가까운 사이가 됐지만, 알렉스는 여전히 갤러리를 통해 그림을 구입한다. 컬렉터 역시 젊은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소신을 지키며 오랜 세월 컬렉팅을 해온 그의 남다른 사명감 같은 것이다. 그는 다쿠미 가마에게 의뢰해 만든 작품을 몇 점 더 가지고 있으며, 또 다른 일본 작가 하지메 이모토의 작품과, 최근에는 노조무 시바타의 작품도 구입했다.
물론 갤러리를 통해 구매할 수 없는 품목에 대해서는 ‘창구’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위챗, 이메일, 이베이, 온라인 옥션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요. 사기도 많이 당했죠.” 그가 중국 앤티크 부채 컬렉션을 몇십 점 보여주며 그중 95%가 얼굴도 보지 않고 거래한 것이라고 했다. 직거래를 하지 않으니 돈을 보내고 물건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동안 실패도 겪었다. 아프리칸 미술에 빠졌을 때는 관련 지식이 없어 터무니없는 걸 구입했고, 침몰 선박에서 건져 올린 도자기를 수집할 때는 의미 없다고 느껴 중도에 포기했다.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고 컬렉팅을 하는 건 투자가 아니라 개인적 만족감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컬렉션을 판매하는 경우는 되팔아 수익을 내는 게 아니라 더 큰 작품을 사기 위해서다(지금까지 판매한 건 겨우 1~2점뿐이지만). 그에게 컬렉션이 인생에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수집은 지식을 좇고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현대미술은 순전히 취향에 따르지만 카메라, 부채, 시계 같은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컬렉팅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내 안의 평화를 찾는 방법이고요.” 그에게 수집은 오브제가 아닌 지식을 모으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는 순수한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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