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황홀하게 하는 가구와 조명의 파도가 넘실대는 세계적인 디자인 축제에서 직물이라는 소재 자체는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주인공은 아니다. 하지만 텍스타일은 누가 뭐래도 디자인의 소중한 토양이며, 특히 날이 갈수록 자연을 지향하는 다양한 천연 소재의 패브릭은 나무와 함께 가장 사랑스럽고 환경 친화적인 디자인 소재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기술과 장인 정신의 결연으로 창조되는 환상적인 색감과 질감, 촉감. 그 삼박자가 빚어내는 고혹적인 하모니를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를 매개체로 만나보도록 하자.
1 독일 아웃도어 브랜드 데돈(Dedon)의 자연을 닮은 녹색과 갈색 계열의 쿠션 시리즈.
2 한국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디자이너 강수진 씨의 ‘니티드 체어(Knitted Chair)’. 지난해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 전시된 데 이어 올해 <토킹 텍스타일즈(Talking Textiles)> 전시회에서도 소개된 작품으로 마치 손뜨개질한 옷을 입은 의자를 연상케 한다. 사진: 마커스 슈로더(Marcus Schroder)
3 천을 기반으로 한 유려한 곡선의 활용이 자못 인상적인 디자인 스튜디오 로 에지스(Raw Edges)의 작품 ‘코일링 컬렉션(Coiling Collection)’.
4연한 잿빛과 회색이 도는 독특한 하얀 색감이 매력적인 양탄자. 이탈리아의 텍스타일 전문 업체 G.T.디자인의 ‘I Glassati Cocco’란 작품이다. 5 인도·파키스탄 장인들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아름다운 양탄자를 제작하는 스페인 카펫 브랜드 나니 마르키나(Nani Marquina)의 ‘메디나(Medina)’. 불규칙한 간격의 줄무늬와 따스하고 다채로운 색채의 조화가 눈길을 끈다.
6 스페인 출신의 스타 디자이너 패트리샤 우르퀴올라(Patricia Urquiola)가 이탈리아 브랜드 모로소(Moroso)와 손잡고 발표한 패브릭 계열의 소파 ‘젠트리 소파(Gentry Sofa)’. 누비 천이 주는 정다운 질감과 거위 털을 넣은 쿠션이 사랑스러운 조화를 이룬다.
7 벨기에 브랜드 카살리스(Casalis)의 야외용 쿠션 ‘보넷(Bonnet)’ 시리즈. 햇빛과 물에 강한 니트 천 커버는 손쉽게 벗겨내 세탁하면 되므로 관리하기 용이하다.
8 카살리스의 또 다른 작품 ‘슬럼버(Slumber)’. 야외에서든 실내에서든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귀여운 니트 쿠션 겸 의자로 네덜란드 출신의 텍스타일 디자이너 알렉산드라 (Aleksandra)가 디자인했다.
9 핀란드 디자이너 한나 코르벨라(Hanna Korvela)가 내놓은 북유럽풍 카펫 ‘템포 211(Tempo 211)’은 보기만 해도 폭신하고 따뜻한 느낌과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10 프랑스의 ‘스타 듀오’ 로낭, 에르완 부훌렉(Ronan & Erwan Bouroullec) 형제의 매혹적인 카펫 ‘로산주(Losanges)’는 양탄자에 펼쳐진 마름모꼴의 미학을 보여주는 작품(Nani Marquina).
11 청회색과 녹색의 오묘한 결합이 멋진 그림의 바탕색을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G.T.디자인의 카펫 ‘루오기(Luoghi)’.
12 의자에 망토를 두른 듯한 콘셉트가 흥미로운 독일 출신 콘스탄틴 그리치치(Konstantin Grcic)의 패브릭 소파 ‘케이프(Cape)’. 영국의 컨템퍼러리 가구 브랜드 이스태블리시드 & 선즈(Established & Sons)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지난 4월, 디자인의 도시 밀라노를 창조적 영감으로 물들인국제가구박람회에서는 텍스타일(textile)의 숨결이 유달리강하게 느껴졌다.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다채로운 색채의 퍼레이드는 물론이고 보송보송하거나 매끄럽거나, 때로는 다소 거친 촉감마저도 근사하게 느껴지는 텍스타일의 매력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 대상이 카펫이든 방석이든 소파를 감싸는 천이든, 아니면 벽을 뒤덮는 장식품이든 말이다. 네덜란드의 출판업자이자 큐레이터로 명성 높은 디자인계의 여장부 리 에델쿠르트(Li Edelkoort)는 홈 인테리어 세계에서 ‘텍스타일의 귀환’을 예고하기도 했다.
이번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에서 ‘숨은 진주’로 떠오른 디자인 전시 구역인 람브라테(Lambrate) 지역. 이곳에서 열린 독특한 전시회 <텍스타일을 말하다(Talking Textiles)>에 서는 푸릇푸릇하고 신선한 감각이 돋보이지만 결코 애송이 냄새만 난다고는 할 수 없는 실험적인 텍스타일 아이템들을 선보였다. 대담한 직선 무늬가 돋보이는 의상, 올록볼록한 질감과 물결처럼 구비치는 선이 귀여운 목도리 등 영국, 네덜란드,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지에서 최근 졸업한 ‘젊은 피’의 창조물들이다. ‘텍스타일의 귀환’을 부르짖은 에델쿠르트가 직접 큐레이터로 참여한 이 행사는 주로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피의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진행된 데 반해, 밀라노 시내의 패션 거리인 비아 폰타초(Via Pontaccio)의 스파지오 지안프랑코 페레에서 동일한 주제로 개최된 전시에서는 마르텐 바스(Maarten Baas), 캄파냐(Campana)형제, 잉가 상페(Inga Sempe) 등 쟁쟁한 기성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대거 선보였다. 이 가운데 ‘신성 듀오’ 야엘 메르와 샤이 알칼라이가 이끄는 디자인 스튜디오인 로 에지스(Raw Edges)의 작품 ‘코일링 컬렉션(Coiling Collection)’은 모 소재의 천을 활용해 색다른 느낌으로 결을 살린 카펫, 탁자 등의 시리즈로, 모양새나 발상이 흥미롭다. 한국 디자이너 강수진 씨가 선보인 ‘니티드 체어(Knitted Chair)’는 손으로 짠 굵은 뜨개실로 군데군데 감싼 의자의 조화가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전통적인 공예의 의미를 현대적인 맥락의 텍스타일 작품으로 되새기고 인간과 사물의 정서적인 유대 관계를 탐구하고자 했다”는 게 강씨의 설명이다.
옷과 이불은 물론 커튼, 방석, 융단 등 실내 장식품의 바탕이 되는 직물(織物), 쉬운 우리 말로 ‘천’의 세계는 은근히 다양하고 복잡하다. 일례로 면과 함께 여름철 천연섬유의 쌍두마차로 꼽히는 마의 세계만 들여다봐도 얼마나 다채로운가? 흔히 ‘리넨(linen)’으로 불리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아마, 청량감이 좋고 시원한 저마(한복 옷감에 많이 쓰이는 ‘모시’도이에 속함), 설탕·면화의 포장용 포대로 사용되는 황마, 그리고 우리나라에선 ‘삼베’라고 알려진 대마도 있다. 텍스타일 분야는 반도체 칩과 같은 첨단 기술의 결정체처럼 그 발전 양상이 확실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분명 섬세하고 의미 있게 진화하고 있다. 이탈리아 볼로냐의 유서 깊은 텍스타일 업체 G.T. 디자인은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흔히 포장용 끈으로 사용하는 황마와 야자열매 겉껍질에서 추출한 내구성 좋은 소재 코이어(coir) 등을 적극 활용한 명품 카펫을 생산한다. ‘소재 특유의 거칠고 원시적인 매력이 뿜어내는 질감과 색채를 살리면서도 매끄러운 촉감과 세련된 색상의 직물로 거듭나게 한다.’ 기술 혁신을 통해 얻은 이 회사의 자신감이자 소득이다. 이탈리아 가구업체 모로소(Moroso)는 편물의 굵은 짜임과 나무의 조화가 인상적인 안락의자 ‘빅니트(Big-Knit)’를 만들기 위해 햇빛에 강하고 수분과 악취를 발산하는 성질이 있는 신소재 개발에 나서기도 했다. 쓰임새의 폭도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방송되어 최고의 인기를 누린 TV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열혈시청자였다면 혹시 남자 주인공인 김주원의 근사한 자택 식탁 위 벽에 걸려 있던 멋진 인테리어 소품을 기억하는가? 기하학적 요소와 흑백의 조화가 인상적인 이 장식품도 사실 천조각을 조합한 작품이다.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듀오 로낭, 에르완 부훌렉 형제가 덴마크의 텍스타일 브랜드 크바드라트(Kvadrat)와 손잡고 탄생시킨 ‘클라우드(Clouds)’다. 이 정도면 ‘천의 예술’이라 불릴 만하지 않은가.
스페인의 카펫 브랜드 나니 마르키나(Nani Marquina)의매혹적인 작품 ‘로산주(Losanges)’ 역시 로낭과 에르완 형제의 또 다른 명작이다. 페르시아 양탄자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 작품은 이름이 말해주듯 (‘Losange’는 마름모꼴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마름모꼴 무늬가 13가지 다채로운 색상속에서 아름다운 조합을 일궈낸다. 보풀 없이 평평하게 짜는‘킬림(kilim)’ 기법을 적용해 그야말로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엮은 이 카펫은 파키스탄 장인들의 섬세한 손기술로 제작해 각각의 색깔이 가진 개성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마름모마다 약간씩 다른 모양새를 지니게 된다고.텍스타일 분야에서 오랫동안 강세를 나타내온 핀란드 출신디자이너들의 작품도 눈에 띄었다. 국제가구박람회 주 전시장에 독립 부스를 차린 한나 코르벨라는 북유럽 특유의 단순미를 내세운 우아한 카펫 시리즈를 선보였다. 100% 모 제품인 ‘템포 300(Tempo 300)’은 깔끔한 기하학적 무늬와 색상이 현대적인 느낌을, 리넨·모 혼방의 북유럽풍 ‘리어(rya) 융단’ 시리즈의 하나인 ‘템포 211’은 부드럽고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종이를 원료로 한 지직사(paper yarn)를 가미한 수공예 작품 ‘미노르(Minore)’는 바닥에 길게 드러눕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다.영국의 대표적인 가구 디자인 브랜드인 이스태블리시드 &선즈(Established & Sons)의 2011년 새로운 컬렉션 중 ‘볼케이노, 매머드, 미티어(Volcano, Mammoth, Meteor)’ 도 핀란드 민화를 연상케 하는 토속적인 미적 감각이 넘치는 작품이다. 헬싱키 태생의 세계적인 삽화 작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클라우스 하파니에미와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구찌의 아트 디렉터 출신인 그의 아내 미아 발레니우스가 함께 빚어낸 3종 시리즈(태피스트리와 깔개 등으로 구성)로, 하늘색 계열의 우아한 색상과 신비로운 문양이 보면 볼수록 시선을 사로잡는다.
침대를 제외하면 폭신폭신하고 보들보들한 천 소재의 소파와 쿠션만큼 안락함을 안겨주는 사물이 있을까? 그런 맥락에서 벨기에 브랜드 카살리스(Casalis)의 신제품 ‘슬럼버(Slumber)’는 소파도 되고 쿠션도 되는 상당히 매력적인 물건이다. 사용자의 자세에 따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형태의 유연성에 ‘키드 모헤어(kid mohair)’ 소재의 편물이 자아내는 신축성과 편안한 촉감까지 덤으로 제공하는 이 제품은 하양, 파랑, 고동 등 12가지 색상으로 선보였다. 독일이 자랑하는 아웃도어 가구 브랜드 데돈(Dedon)도 편안하고 고급스러운 소재의 원단을 사용한 카펫과 쿠션을 다 수 선보여 눈길을 잡아끌었다. 아웃도어 브랜드답게 대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질감과 색상을 채용한 것이 특징이다. 자연이 선사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녹색과 갈색을 파스텔 톤으로 재현한 쿠션 시리즈가 좋은 예다. 집 안이든 밖이든 어디에서든 껴안고 잠들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은 제품군이다. 이 회사가 “안락함은 이제 더 이상 인도어, 아웃도어를 구분 짓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외칠 만도 하다. 역시 독일이 낳은 대표적인 스타 디자이너 콘스탄틴 그리치치가 이스태블리시드 & 선즈와 함께 선보인 소파 ‘케이프(Cape)’가 주는 느낌은 또 다른 의미에서 매력을 품고 있다. 이름 그대로 어깨에 걸치는 망토를 연상케 하는 작품으로, 캐주얼한 느낌이 나면서도 동시에 품격 있고 고상한 분위기를 지 니고 있다. 또 부훌렉 형제를 비롯해 장 누벨, 필립 니그로 등 스타 군단을 등에 업은 프랑스 브랜드 리네 로제(Ligne Roset)의 팔색조 같은 매력을 뽐내는 다양한 패브릭 소파도 눈여겨볼 만했다.
하지만 달콤한 휴식과 같은 편안함과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단연 최고의 재주를 보인 인물은 스페인 출신의 패트리샤 우르퀴올라가 아닐까 싶다. 앞서 언급한 모로소의 ‘빅 니트(Big-Knit)’를 만든 주인공이기도 한 그녀가 올해 발표한 클라라 컬렉션, 젠트리 소파 등 일련의 시리즈를 보노라면 촘촘하게 짜이고 얼기설기 엮은 각종 패브릭 소재를 나무, 가죽 등 다른 재료와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능력에서 달인의 경지가 엿보인다. 날실과 씨실의 곱디고운 조화를 사랑하고 자신의 색깔을 창조적으로는 입힐 줄 아는 그녀가 있기에 밀라노는 더욱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