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혁신의 와인, 샤토 라피트 로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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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02, 2015

글 이소영(프랑스 현지 취재. <사진 미술에 중독되다>, <서울, 그 카페 좋더라> 저자)

어떻게 프랑스 와인은 최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가? 신세계 와인의 품질이 급성장하고 있음에도, 프랑스 와인의 우아한 풍미와 매혹적인 스토리는 여전히 모두를 매료시키고 있다. 밸런스가 가장 좋은 그랑 크뤼 클라세 와이너리로 불리는 샤토 라피트 로칠드를 방문해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계속 사랑받을 수 있는 비법을 탐색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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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와인, 신의 물방울… 샤토 라피트 로칠드

럭셔리란 무엇인가? 영국 V&A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What is Luxury>에서는 장인 정신과 역사를 담은 핸드메이드 공예품을 재조명해 호사스러움으로 간주되던 ‘럭셔리’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흥미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현지에서 만난 도멘 바롱 드 로칠드(Domaines Barons de Rothschild)의 CEO 크리스토프 살랭(Christophe Salin)은 고가의 와인이 ‘럭셔리’라고 생각한다면, 샤토 라피트 로칠드(Cha^teau Lafite Rothschild)에는 ‘럭셔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진정한 럭셔리는 아이디어와 철학을 담은 작품이기에, 단지 소유하고 싶은 욕망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위대한 와인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찬미의 글을 쓰게 하고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주는 존재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는 1855년 나폴레옹 3세가 파리 박람회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와인을 출품하기 위해 와인 등급을 정할 때 가장 먼저 1등급에 오른 와인으로, ‘1등급 중의 1등급’으로 불린다. 샤토 마고, 샤토 오브리옹, 샤토 라투르, 샤토 무통 로칠드와 같은 1등급 와인과 비교했을 때, 출시 가격은 약 30%, 경매 가격은 2배 정도 더 높게 책정되기로 유명하다. 프랑스 왕 루이 15세와 그의 연인 마담 퐁파두르가 사랑한 와인이 바로 샤토 라피트 로칠드였다. 보르도에서 파리로 돌아온 리슐리외 공작이 예전보다 훨씬 젊어 보이자 루이 15세가 비결을 물었더니 샤토 라피트를 선물했다. 그때부터 샤토 라피트는 베르사유 궁전의 공식 와인이 되었고, 왕과 귀족들이 즐겨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왕의 와인’, ‘젊음의 샘물’이라고도 불렸다. 심지어 미국 3대 대통령이자 독립선언문을 쓴 토머스 제퍼슨이 프랑스 대사 시절부터 좋아했던 와인도 샤토 라피트 로칠드였다. 토머스 제퍼슨이 서명한 1787년 빈티지의 라피트 로칠드가 발견되어 크리스티 경매에 부쳐졌는데, 자그마치 10만5천 파운드에 낙찰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 와인이 가짜로 판명 나면서 ‘억만장자의 식초’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도 있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명성에 대한 에피소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도멘 바롱 드 로칠드의 소유주 에리크 드 로칠드(Eric de Rothschild) 남작이 영국의 유명 정치가 가족을 보르도 메도크에 위치한 라피트 로칠드의 샤토(cha^teau, 성)에서 여는 만찬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전속 요리사와 집사, 소믈리에가 촛불 아래 아름다운 만찬을 준비했다. 정치가의 딸은 와인 애호가로 아예 빈티지 차트를 무릎에 펴놓고 서브되는 와인과 대조하면서 맛을 음미했다. 호사스러운 만찬이 거의 끝나고 마지막 와인이 서브되었다. 소믈리에가 오늘의 마지막 와인은 74년 빈티지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정치가의 딸은 빈티지 차트를 보고 발끈하면서, 왜 1974년 와인을 마지막으로 서브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남작이 이렇게 대답했다. “마드무아젤, 이 와인은 1974년이 아니라 1874년 빈티지입니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역사와 품질을 극명하게 증명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What is Luxury> 전시에 만약 와인도 출품 자격이 주어졌다면 샤토 라피트 로칠드가 디스플레이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과연 1874년 빈티지 와인은 어떤 맛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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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메이커 샤를 슈발리에와의 만남

현재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와인 셀러에서 보관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와인은 1787년 빈티지다. 세계대전 당시, 와인 셀러를 벽으로 막아서 올드 빈티지 와인이 수탈되는 것을 방지한 덕분이다. 1868년 제임스 로칠드가 인수한 후 샤토 라피트 로칠드라는 현재의 이름을 완성했으며, 현 소유주는 가문의 5대손 에리크 드 로칠드 남작이다. 로칠드 남작은 금융인이지만 와인에 조예가 깊다. 하지만 와이너리는 전적으로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있는데, 크리스토프 살랭 대표이사의 지휘로 와인메이커 샤를 슈발리에(Charles Chevallier)가 와인 양조를 담당하고 있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는 유서 깊은 건물과 양조 시설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지만, 현대적 혁신을 반영한 와이너리다. 세계대전도 견뎌낸 신비로운 와인 셀러와 역사를 담은 복도를 지나면, 건축가 리카르도 보필(Ricardo Bofill)이 최근 설계한 와인 셀러가
위용을 드러낸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셀러로 손꼽히는 이곳은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데, 1년에 한 번 지역 주민을 위한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입장료는 없지만 워낙 인기가 높아서 몇 달 전부터 예약을 서둘러야 한다.
얼마 전에는 샤토 라피트 로칠드에서 후원하고 있는 기타리스트 티보 코뱅(Thibault Cauvin)의 연주회가 열렸는데, 3백 명의 게스트들이 음향 효과 없이도 놀라운 사운드를 들려주는 와인 셀러에서의 기타 소리에 흠뻑 빠졌다. 샤토는 아쉽게도 와인 전문가, VIP들에게만 공개되는데, 전속 요리사와 집사, 소믈리에가 준비하는 촛불 아래서의 만찬이 종종 열린다. 이번 방문에서 샤토 라피트 로칠드 1995년과 함께 직접 경험한 디너는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에서의 감동을 능가하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1층에는 로칠드 가문의 초상화로 장식된 응접실과 다이닝 룸이 있으며, 2층에는 로칠드 남작 가족의 침실이 있다. 샤토는 라피트 로칠드 레이블에 나오는 와이너리의 상징이지만, 남작의 가족들에게 이곳은 가문의 별장이기도 하다는 점이 재미있다. 직접 와이너리를 안내해준 수석 와인메이커 샤를 슈발리에는 1983년부터 이곳에서 일했으며, 라피트 로칠드의 명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와인 품질을 관리하는 것에 인생을 걸고 있다. 그는 라피트 로칠드의 품질은 50% 이상이 사람의 정성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와이너리를 위해 일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좋은 와인을 만든다는 것은 자연의 역량을 잘 표현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이곳에서 31년째 근무하고 있지만 포도밭의 여러 요소들을 포괄하는 테루아(terroir)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날씨와 자연환경에 따라 양조 방향을 정하고, 적당한 해법을 찾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14년 날씨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6월에 비가 많이 오고 추워서 포도가 제대로 익지 않았으며, 8월부터 본격적으로 포도가 익기 시작했다. 샤를 슈발리에는 오랜 고민 끝에 덜 익었거나 더 익은 양극단의 포도를 제외하고, 가장 적당하게 익은 중간 단계의 포도만 수확해서 와인을 만들었다고 한다. 샤를 슈발리에의 와인 양조 에피소드는 이어진다. 1988년 라피트 로칠드의 관계사 샤토 리외섹(Cha^teau Rieussec)으로 잠시 발령받은 샤를 슈발리에는 원래 일하던 직원들과 수확 일정을 앞두고 마찰을 빚었다. 샤를 슈발리에는 포도가 더 익기를 기다리자고 했고, 직원들은 당장 수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원들이 로칠드 남작에게까지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샤를 슈발리에는 남작의 독촉에도 아직 포도가 최상의 상태가 아니기에 수확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남작이 샤를 슈발리에에게 매일 확인 전화를 했지만, 그는 태평하게 빈둥거리기만 했다. 모두가 지쳐가던 어느 날 새벽, 샤를 슈발리에는 오늘은 포도를 따야 한다고 말했고, 샤토 리외섹 1988년 빈티지는 최고의 풍미를 자랑하는 역사적인 디저트 와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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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지키기 위해 도전과 혁신도 필요하다

샤토를 중심으로 그 유명한 포도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데, 70%는 카베르네 소비뇽, 25%는 메를로, 2%는 카베르네 프랑 품종을 심는다. 라피트는 낮은 언덕을 뜻하는 ‘라 이트(la hite)’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피레네 산맥에서 내려온 자갈과 모래, 진흙이 층을 이룬 토양은 40년 이상 수령 포도나무의 복합성을 북돋우는 최고의 테루아다. 가을에 100% 손으로 수확한 포도는 숙성시켜 매년 3월이면 오크 배럴 테이스팅을 하는데, 테이스팅에만 무려 1개월 반이 소요된다. 샤를 슈발리에의 진두지휘로 블렌딩을 하고나면 이를 다시 숙성시킨다. 그래서 샤토 라피트 로칠드는 기다림의 와인이기도 하다. 1백 년 이상 보관 가능하며, 적어도 만든 지 20년은 지나야 시음 적기에 이르는 와인이기에 인내의 과정이 필요하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진한 루비 컬러와 입안에 오래 남는 여운, 진귀한 향수와 같은 풍미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어린 손주를 위해 할아버지가 보관해두는 와인이며, 기다린 시간만큼 두 사람이 함께하는 순간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와인 한 병에 역사와 인생을 담을 수 있다는 말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인근에서 라피트 로칠트만을 위한 오크 통을 직접 만드는데, 숙련된 장인이 하루에 겨우 3개밖에 만들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작업이다. 프랑스 중부 지방의 떡갈나무(oak)를 2년 동안 건조시킨 후 제작하는데, 최종적으로 와인의 풍미를 높이기 위한 토스팅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세계적으로 오크 통을 직접 만드는 와이너리는 몇 군데 되지 않는다. 모든 공정에 정성을 쏟으려는 라피트 로칠드의 장인 정신이 반영된 부분이라고 하겠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는 지난 1백60년 동안 유행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라피트 로칠드의 전통을 존중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혁신과 도전에 인색하지는 않습니다. 과거에는 알코올 발효를 했으나 요즘은 젖산 발효도 하며, 이전에는 오래 보관 가능한 와인을 만들었으나 요즘은 관계사를 통해 오래 숙성하지 않아도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도 만듭니다.” 도멘 바롱 드 로칠드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도 와이너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로칠드 가문은 오래전부터 프랑스의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상상력을 실현하기 위해 해외에도 와이너리를 만들고 있다. 크리스토프 살랭 대표이사는 전통과 모던함의 조화야말로 샤토 라피트 로칠드가 이렇게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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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화살을 세계로 쏘다

도멘 바롱 드 로칠드에는 여러 개의 와이너리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다만 그 와인이 라피트 로칠드 관계사의 와인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 계열사의 와인들은 모두 보틀에 로칠드 가문의 다섯 형제를 의미하는 5개의 화살이 그려져 있으니 이를 참고하면 기억하기 좋겠다. 같은 보르도 지역에는 샤토 뒤아르 밀롱(Cha^teau Duhart Milon), 샤토 레방질(Cha^teau L’Evangile), 샤토 리외섹이 있으며, 프랑스 남부 랑귀도크 지방에서는 도멘 도시에르(Domaine d’Aussieres)가 생산되고 있다. 칠레의 비냐 로스 바스코스(Vina Los Vasocos), 아르헨티나의 보데가스 카로(Bodegas Caro)도 도멘 바롱 드 로칠드의 소유다. 수석 와인메이커 샤를 슈발리에가 각각의 와이너리의 와인메이커와 논의해 와인을 양조하는데, 지역의 테루아를 반영한 와인을 만들면서도, 도멘 바롱 드 로칠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 산둥 지방에도 진출해 시틱 와이너리(DBR Citic Wine Estate)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멘 바롱 드 로칠드의 와인들은 우리나라 면세점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와인이기도 하며, 특히 로스 바스코스 퀴베 20(Los Vascos Cuve′e 20e′me Anniversaire)은 2013년 이마트 히트 상품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최근 론칭한 프라이빗 리저브 메도크(Private Reserve Medoc)와 프라이빗 리저브 보르도(Private Reserve Bordeaux)도 호평받고 있다. 프라이빗 리저브는 에리크 드 로칠드 남작이 친구들과 즐겁게 마시기 위해 만든 데일리 와인을 상품으로 판매한 것이다. ‘남작의 리저브 와인’으로 불리고 있으며,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 34권에도 소개되었다. 저렴한 가격으로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밸런스와 풍미를 경험할 수 있으니 추천할 만하다. 매일 샤토 라피트 로칠드를 마실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특별한 와인과 함께하는 만찬으로 백만장자가 된 것 같은 행복감을 만끽해보는 것은 어떨까? 도멘 바롱 드 로칠드의 모든 와이너리는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 방문 가능하며, 테이스팅도 할 수 있다.


문의 www.lafi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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