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집중하게 해주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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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06, 2015

에디터 고성연

세계적인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박사는 집중하는 것이 더 괴롭고 피곤한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은 인간이 집중하지 못할 때 상대적으로 더 불행하다고 했다. 인간의 심리적 에너지가 한곳에 집중되는 ‘몰입(flow)’을 빈번히경험하는 일은 쉽지 않으나 대부분 한번 제대로 경험하면 그런 상태를 갈망하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우리가 일을 할 때 그처럼 궁극의 몰입은 아닐지라도 집중도를 높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의외로 사소한 사물이나 환경이 우리의 집중에 보탬이 될 수 있다. 사람에 따라, 하는 일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일의 생산성을 높여줘 행복 지수도 사뿐히 올려줄 나만의 촉매제가 무엇일지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떨까.


때때로 우리를 어떤 일에 집중하도록 도와주는, 혹은 그 일을 조금은 더 좋아하도록 만드는 물건이나 환경이 있다. 그 물건이 심지어는 평범한 주전자일 수도 있다. 미니멀리즘 디자인으로 유명한 영국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이 만든 독일 브랜드의 전기 주전자를 끔찍이 아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녀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사실 접촉 불량 때문인지 꽤 자주 고장이 나는데도 그 주전자가 부엌에 있으면 왠지 주방 일이 즐거워요. 그래서 쉽게 망가지는데도 몇 번이나 다시 샀죠.”  흰색과 은회색의 깔끔한 조화와 더불어 세련미를 솔솔 풍기는 디자인이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물 끓이는 단순한 작업을 해내는 기계에 대한 애정으로는 좀 과하다고 할 만한 ‘사랑’이다. 하지만 주전자의 가장 본질적인 임무인 물 끓이기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는 큰 결함마저도 용서하도록 만들 만큼 ‘디자인의 힘’이 강했던 것이리라. 물론 이 말썽 많은 주전자의 디자인 파워가 누구에게나 통하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투덜거리면서도 고장이 나면 결국에는 또 사고야 마는 ‘집착적인’ 팬이 그녀뿐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결국 고질적인 결점으로 생산이 중단되는 운명에 처하고야 말았지만, 이 주전자를 더 이상 사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을 못내 안타까워하는 소비자들이 꽤 있었다고 전해지니 말이다. 이처럼 메커니즘이 꽤 단순한 편인 주방 가전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일할 때 동지로 삼는 ‘스마트한’ IT 기기라면 물건에 대한 애정도가 더 높아질 수 있다. 요즘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나가는’ 애플의 디자인이 대표적인 사례다.

‘사과’ 로고  모니터의 매혹, 눈길만이 아니라 손길도 사로잡는다

한입 베어 문 사과 모양 로고가 하단 가운데 새겨진 애플 일체형 데스크톱 PC ‘아이맥’. 전체적으로 날씬한 일체형 디자인에 얇디얇은 옆면과 매끄러운 모서리가 특징이고, 전원 코드 하나만 연결하면 다른 지저분한 선이 필요 없는 이 PC에 대해서는 사실 불평도 들린다. 컴퓨터의 심장 같은 맥 운영 체제(OS)는 그래픽 인터페이스가 뛰어나고 보안이 잘되는 등 기본적으로 장점이 많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잘 호환되지 않는 응용 프로그램이 많아서다. 또 워드 프로그램은 한글로는 글자체 종류나 각종 세세한 기능이 그렇게 풍부하지도 않다. 그래픽 디자인이나 영상 작업을 많이 하는 이들이야 당연히 맥을 사랑할 확률이 높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불편하게 느껴질 요소도 제법 있다. 그런데 작업이라고는 워드 프로그램을 열고 타이핑만 하는 사무직도 아이맥에 반하게 되는 매력 포인트가 있으니, 바로 모니터다. 숙이거나 젖혀 각도를 조정할 수 있는 이 모니터는 맵시도 빼어나지만 전원을 켜게 만드는, 그리고 일에 몰입하게 만드는 뭔지 모를 힘을 발산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단지 예쁘다는 차원이 아니다. “모니터의 힘 때문에 일단 아침에 일어나면 자리에 앉아 작업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게는 분명 그런 힘이 작용해요.” 런던과 일본을 무대로 활동해온 제품 디자이너 박혜연 씨는 이렇게 찬양했다. 아이맥 애호가들은 이러한 매력에 빠져 다른 OS에서 작업한 문서의 글자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등의 불편을 기꺼이 감수한다. 커다란 장점 덕분에 그런 불편함 정도는 사소한 단점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PC 사양이 구식이라 더 이상 쓸 수 없는데도 기념품처럼 과거의 맥 제품을 작업실에 진열해놓거나 창고에라도 놔두는 이들이 꽤 있다. 이는 아마도 다분히 상향 평준화된 PC에 대해 소비자들이 어떤 장점을 원하는지를 파악해 상품에 반영한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개방형 vs 폐쇄형 업무 환경, 중요한 건 평등이다

이는 모니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허먼 밀러의 에어런 체어, 스틸 케이스 립 체어 등 착석감이 뛰어난 의자에서  ‘집중의 힘’을 빌린다는 이들도 있고, 심지어 몰스킨 같은 수첩에서 아이디어의 영감을 받는다는 이들도 있다. 사소한 도구라고 여겨질 수도 있는 물건들의 ‘도우미’ 역할도 이러할진대, 우리를 둘러싼 작업 환경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직장에 대한 애정도가 가장 높은 직원 중 98%는 사무실에서 “쉽게 집중할 수 있어서”라고 답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2014년 10월호). 그런데 과연 어떤 환경이 집중에 도움이 될까? 많은 이들은 집중력을 발휘해 책임감 있게 일하려면 흔히 ‘탁 트인’ 환경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느끼는 주변 환경에 대한 통제 여부나 프라이버시의 보호가 일에 대한 직장인들의 만족도와 애정도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물론 나라나 지역마다 프라이버시가 의미하는 바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지만). 그래서인지 ‘일류’를 지향하는 많은 기업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집중’과 ‘프라이버시’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업무 공간을 구성하는 데도 꽤나 공을 들인다. 이런 경향은 프라이버시가 개인의 만족감을 더해줄뿐더러 여러 명이 힘을 합쳐야 하는 협업의 효과 역시 높인다는 주장이 꽤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투명성에 무게를 둔 개방형이든 프라이버시를 염두에 둔 폐쇄형이든, 일단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요소는 ‘평등’이라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예컨대 사무실 환경이 기본적으로 ‘개방적’이라면 지휘 고하에 관계없이 모두가 열린 공간에서 일하되,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할 수 있는 장치를 곳곳에 마련하고 접근하기 쉽게 하는 편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전문가들은 얘기한다. 실제로 이런 환경이 상대적으로 보편적인 네덜란드의 경우, 직장 만족도가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고.



창의적으로 만들어주는 업무 환경의 힘, 밸브와 현대카드

프라이버시와 생산성의 관계에 주목하는 회사들은 업무 환경이나 방식을 꽤 달리한다. 너무 개방적이면 역효과가 있다고 믿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폐쇄적인 환경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단지 ‘눈치’를 안 보게 한다는 점이 관건이다. 누군가 자신을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다고 느껴 주눅이 든 상태에서는 창의성을 발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호랑이 감독으로 유명했던 알렉스 퍼거슨 경도 훈련 시간에는 절대로 선수들을 비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때야말로 선수들이 시합 때 효과가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도전적인’ 시도를 해보는 시간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밸브(Valve)라는 PC 게임 개발업체의 경우에는 직원들이 각자 소비자 입장에서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프로젝트에 근무 시간을 100% 할애할 수 있다. 또 협업이 필요하다면 바퀴 달린 책상을 움직여 무리(cluster)를 이루는 식으로 자유롭게 팀을 꾸린다. 그런데 직원 1인당 거두는 수익이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보다도 높다고 하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또 구글은 엔지니어들이 근무 시간의 20%를 언제, 어디서 사용하는지 일일이 확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언 번스타인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최근 학술지에 구글의 제품 포트폴리오 중 절반 이상이 이처럼 ‘보호받는 시간’ 덕분에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실리콘밸리에서는 프라이버시가 보장된 개인 공간이 필요하되, 교류 없이는 혁신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꽤 강하다. 사람들이 오가다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게 되는 ‘우연한 충돌’ 이 가능한 공간 역시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구글은 신사옥을 ‘우연한 만남’을 극대화하도록 설계했고, 페이스북은 수천 명의 직원을 약 1.5km 길이의 단일 공간에 모을 계획이라고. 현대카드는 여의도 본사 1층에 일명 ‘아이디어 테이블’을 설치했는데, 여기에는 각종 필기구가 마련돼 있어 오가다 마주치는 직원들이 언제든지 자유롭게 회의를 하고 아이디어를 교환할 수 있다.
집중이나 재충전, 사적인 일로 시간을 잠깐 할애해야 하는 ‘목적이 있는 고립’을 원하는 직원들에 대한 배려도 상당히 중요하다. 엄청난 투자를 할 필요 없이 구조만 약간 변경해도 조직원들의 행동과 문화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다. 현대카드의 경우에는 남들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고 편하게 통화할 수 있도록 회사 건물 각 층에 ‘휴대폰 부스’를 설치했다. 여의도 본사에는 두 동에 걸쳐 모두 28개의 부스가 설치돼 있다. 휴식이 필요하거나 사적인 감정을 표출해야 할 때 청각적으로나마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은근한 조력자 역할을 하는 보이지 않는 요소

그러나 반드시 혼자 있다고 해서 집중을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낯선 사람들 무리에 섞여 있을 때 오히려 ‘나만의 세계’에 몰두하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는 내향적인 이들도 그렇다는 의외의 결과도 있다. 어떤 학자들은 사람들이 집중해서 일하기 위해 카페를 찾는 것은 대개 직장에서 ‘낯익은’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주의가 산만해지는 상황을 피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적당히 낯선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데다 잔잔한 소음이 제공되는 환경에서 오히려 창의적인 업무의 효율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끄러워 피하는 게 아니라 좋아서 찾게 된다는 ‘백색 소음’의 효과다. 자연이나 생활 속의 소음이라고 할 수 있는 백색 소음은 균등하고 일정한 저주파수 대역의 소리로, 귀에 쉽게 익숙해지기 때문에 주변 소음을 덮는 기능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우리는 거의 ‘공부의 전당’처럼 카페에서 저마다 보고서나 책에 몰입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지 않은가.
<콰이어트(Quiet)>라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펴낸 수전 케인의 실제 사례를 보자. 내향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그녀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이기에 자신의 집 안에 안락하고 채광이 잘 드는 자신만의 집필 공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고독하게’ 작업을 하려고 하니 마음을 도통 잡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필요한 자료와 노트북 등 집필에 필요한 ‘짐’을 잔뜩 싸들고 카페로 향했다. 자신에게 커다란 명성을 안겨준 책을 이 카페에서 끝낸 그녀는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카페가 내 사무실이 된 까닭은 현대의 학교와 직장에는 없는 몇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사교적이었지만 편안했고, 원하는 대로 오갈 수 있는 분위기라 불필요하게 얽힐 일이 없었고, ‘의도적으로 글쓰기를 연습’할 수 있었다. 나는 원하는 만큼 관찰자와 행위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또 환경도 통제할 수 있었다. 나는 매일 내가 사람들을 보는 것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나를 보이고 싶으냐에 따라 탁자 위치를 한가운데나 가장자리로 선택했다. 그리고 내가 그날 쓴 것을 조용하고 평화롭게 고치고 싶으면 언제든지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대개 나는 고작 몇 시간 후에 이 권리를 행사했다. 보통 사무실 직원들이 8시간, 10시간, 14시간씩 있다가 나오는 것과는 달랐다.”
결국 군중 속으로 들어가 이름 모를 존재가 되어 한 가지 일에 집중하거나, 아니면 꽉 막힌 칸막이형 사무실에서 보고서 작성에 몰두하거나, 자신에게 맞는 환경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환경이 아니라 일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내실 있는 전략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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