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02, 2025
글 김연우(뉴욕 통신원)
<Luna Luna: Forgotten Fantasy> in New York
놀이공원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장소다. 입구에 들어서면 현실을 벗어나 기묘하고 매력적인 놀이기구와 독특한 분장을 한 익살스러운 퍼포머가 방문객을 맞이하는, 복잡한 세상사를 하루쯤은 잊게 해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이 환상의 세계는 비단 아이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예술가들은 이처럼 마법 같은 공간을 상상하며 자신들의 독창성을 더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독특한 놀이공원을 만들었다. 무려 37년 만에 미국 뉴욕의 복합 문화 공간 더 셰드(The Shed)에 등장한, 과거 실재했던 ‘루나 루나(Luna Luna)’의 이야기다.
기이하고도 다정한 축제의 장
“더스트 클리너에 신발을 닦고 입장해주세요!” 직원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앞에 놓인 끈끈한 발판에 몇 차례 발을 구르고 난 뒤, 작은 컨테이너 박스식 공간에 들어섰다. 전시장 입구 바로 앞에 위치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체험형 공간 ‘루나 루나 파빌리온’이었다. 굵은 선과 색면으로 이루어진 기하학 도형으로 장식된 파빌리온 앞에는 주말에 늘어설 긴 대기 줄을 위한 안내봉이 있다. 내부는 얇은 유리벽이 복잡하게 겹쳐 있는 좁은 미로 같은 공간이었다. 낡은 나무 바닥과 기둥 곳곳에서는 덧칠한 페인트로도 숨길 수 없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듯했다. 눈앞의 유리벽을 더듬어나가며 출구를 찾는 짧은 여정 동안, 길을 잃은 다른 관람객들과 몇 번이나 마주치며 눈인사를 나눴다. 아직까지는 다들 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상태로 헤매는 모양새였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모두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웃음이 가득했다는 것. 파빌리온에 이어 만화풍 캐릭터로 꾸민 키스 해링의 회전목마와 격자무늬로 뒤덮인 살바도르 달리의 커다란 지오데식 돔(다면체로 이뤄진 반구형 건축물)을 둘러보던 중, 멀리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이끌려 다음 전시장인 맥코트 갤러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는 더욱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길쭉하거나 둥근 형태를 띤 형형색색의 덩어리들이 유쾌한 괴성을 지르며 관람객들에게 치근거렸고, 백발에 검은 목 폴라 티를 입은 ‘앤디 워홀’ 3명은 바스키아의 관람차 주변을 서성이며 무언가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는 모습이었다. 한 노부부는 계속 자신들을 따라다니며 새처럼 생긴 인형을 얼굴 앞에 흔들어대는 광대의 장난에 못 이겨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신랑과 신부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조각으로 입구를 장식한 채플에서는 어린아이 2명이 ‘결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여기서는 누구나 원하는 상대와 결혼할 수 있어요. 그게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답니다!” 어느 순간, 팝 아티스트 케니 샤프의 화려한 공중그네가 조명과 함께 홀로 가동되었다. 이에 맞춰 웅장하면서도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주변 퍼포머들은 이내 방문객들의 손을 잡고 함께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과 조명은 이내 공중그네에서 관람차로, 그리고 관람차를 지나 아릭 브라우어(Arik Brauer)의 괴상한 회전목마로 몇 분 동안이나 이어졌다.
루나 루나의 여정: 탄생에서 부활까지
루나 루나는 1987년 6월 5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오스트리아의 팝 스타 안드레 헬러(André Heller)는 어린 시절 방문했던 대도시 근교의 구식 테마파크인 ‘루나 파크’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예술가들이 설계한 놀이공원’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누구나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놀이공원에 ‘예술의 힘’을 더한다면 전후 황폐한 도시의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탈출구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독일의 한 잡지사에서 지원금을 받은 헬러는 세계 각국을 돌며 전 세계 예술가들을 이 프로젝트에 동참시켰다. 살바도르 달리, 데이비드 호크니, 로이 리히텐슈타인같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작가들부터 아릭 브라우어와 만프레트 다익스 같은 비엔나의 작가들, 그리고 당시 떠오르던 뉴욕의 젊은 작가 키스 해링과 장-미셸 바스키아 등이 여기에 합류했다. 이들은 낡은 놀이기구를 새롭게 장식하거나 독창적인 체험형 공간을 설계했으며, 놀이공원의 포스터, 티켓, 굿즈, 쇼핑백 등을 직접 디자인해 루나 루나를 완성해나갔다. 당시 루나 루나가 열린 함부르크의 무어바이데(Moorweide) 공원은 놀이기구, 퍼포먼스, 볼거리가 넘치는 축제의 장으로 변모했다. 소니아 들로네(Sonia Delaunay)의 알록달록한 아치형 입구가 사람들을 환상의 세계로 초대했고, 모니카 길싱(Monika Gil’Sing)의 다채로운 깃발들이 공원 곳곳에서 나부꼈다. 방문객들은 바스키아의 낙서로 장식한 관람차와 키스 해링의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로 이루어진 회전목마, 케니 샤프의 활기찬 회전그네에 올라타며 시간을 보냈다. 리히텐슈타인의 유리 미로와 만화경 같은 달리의 거울 돔을 탐험하거나, 감각을 자극하는 호크니의 그림자 음악회를 감상하기도 했다.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요소도 있었다. 다니엘 슈푀리(Daniel Spoerri)는 히틀러와 나치의 상징 총리 관저(Reich Chancellery)를 본떠 ‘쓰레기 총리 관저’라 이름 붙인 화장실 입구를 제작했다. 입구 기둥을 장식한 배설물 더미 형태의 조각상에서는 증기가 뿜어져 나와 더욱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안드레 헬러는 동성 간의 결혼이 금지된 사회에 어떤 상대와도 결혼 가능한 ‘웨딩 채플’을 선보이기도 했다. 방문객들과 뒤섞여 공원 곳곳을 거니는 유랑 극단의 키다리 광대, 동물 분장을 한 사람들, 춤추는 수녀들과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공원에 더욱 활기를 더했다. 루나 루나에는 3개월 정도에 걸쳐 약 25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갔으며,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헬러는 세계 투어의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폐장 후 매각 과정에서 복잡한 법적 분쟁에 휘말리면서, 안타깝게도 루나 루나의 모든 창작물은 긴 소송 끝에 텍사스 시골에 위치한 창고에 방치된다.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잊힐 무렵, 2019년 마이클 골드버그와 힙합 뮤지션 드레이크의 엔터테인먼트 회사 드림크루(DreamCrew)가 우연히 루나 루나의 이야기를 접하고는 이를 통째로 매입해버린다. 이들이 이끄는 새 팀은 해체된 놀이기구의 재조립을 위한 설명서조차 없는 상황에서 곧바로 루나 루나의 부활을 위한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의 사진과 도면에 의존해 다양한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루나 루나를 재개장하는 과정에서 약 1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자본과 2년이라는 시간이 투입되었다.
모두 모여 즐거움을 찬양하라!
21세기 버전의 루나 루나는 2023년 12월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의 아트 디스트릭트에서 첫선을 보인 이래, 이듬해 11월 뉴욕의 더 셰드(The Shed)로 무대를 옮겼다. 비록 예전처럼 놀이기구에 직접 탑승할 수는 없지만, 초기 모습 그대로 복원한 14점의 놀이기구와 체험형 공간을 전시하고, 일부 놀이기구를 무인 상태로 가동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통해 아쉬움을 덜어내고 있다. 특히 뉴욕에서는 푸에르토리코 기반의 퍼포먼스 듀오 폰실리 크레아시옹(Poncili Creacion)의 퍼포먼스를 더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다정한 옛 루나 루나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다. 복원 과정을 상세히 담은 사진과 연표, 당시의 드로잉, 노트, 간판, 포스터 등 아카이브 자료를 전시에 포함시켜 루나 루나의 역사적 의의를 조명하는 데도 초점을 맞추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이렇게 재탄생한 루나 루나의 목표는 단순한 과거 놀이공원의 복원을 넘어, ‘예술과 상상력을 통해 위태로운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한다’는 초기 비전의 실현이다. 아직 전시되지 않은 나머지 기구들은 여전히 복원 중이며, 역사적 가치와 안전상의 문제로 전시용으로만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최 측은 언젠가는 예전처럼 관람객들이 직접 예술가가 참여한 놀이기구에 올라탈 수 있는, 완전히 작동되는 놀이공원을 구상 중이다. 이를 위해 동시대 작가들과 협력해 실제로 탑승 가능한 놀이기구를 새롭게 제작하고, 지금처럼 순회전을 여는 도시와 공간의 특성에 맞춰 새로운 캐릭터와 이야기를 추가하며 계속 진화해나가고자 한다. 과거 루나 루나는 시각예술과 공연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전통적인 화이트 큐브 전시 공간의 벽을 넘어 놀이공원을 예술 공간으로 재정립했다. 일단 더 셰드의 <루나 루나: 잊힌 환상(Luna Luna: Forgotten Fantasy)>은 2025년 1월 5일로 막을 내리지만, 앞으로 또 어떤 도시에서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무는 영감의 공간으로 더 멋지게 거듭날지, 루나 루나의 행보가 사뭇 궁금해진다.
1 뉴욕 더 셰드에 부활한 <루나 루나: 잊힌 환상>(2024. 11. 20~2025. 1. 5) 전시 모습. Photo by Brian Ferry. Courtesy of Luna Luna LLC
2 1987년 독일 함부르크에 개장한 당시의 루나 루나. Aerial view of Luna Luna in Moorweide park. Hamburg, Germany, 1987. Photo Ⓒ Sabina Sarnitz. Courtesy Luna Luna, LLC
3 키스 해링과 그의 회전목마. Keith Haring with his painted carousel. Ⓒ Keith Haring Foundation/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Photo Ⓒ Sabina Sarnitz. Courtesy Luna Luna, LLC
4 키스 해링의 회전목마와 달리 돔. Photo by Brian Ferry. Courtesy Luna Luna LLC
5 복원된 장-미셸 바스키아의 관람차와 소니아 들로네의 루나 루나 입구 아치. 입구 너머 작은 방에는 코끼리 탈을 쓴 사람이 보인다. 이곳 ‘폰실리랜드’에서는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분장물을 제작하고 착용해볼 수 있다. Photo by Brian Ferry. Courtesy Luna Luna LLC
6 원하는 상대와 결혼할 수 있는 안드레 헬러의 ‘웨딩 채플’은 이성 간의 결혼만 허용되었던 당시 사회에 대한 도발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Photo by Brian Ferry. Courtesy Luna Luna LLC
7 조명, 음악과 함께 무인 가동되는 케니 샤프의 공중그네. Photo by Brian Ferry. Courtesy Luna Luna LLC
8 과거 루나 루나에서 키스 해링의 회전목마를 즐기는 방문객들의 모습. 뉴욕 전시에서 해링의 회전목마를 포함한 대부분의 놀이기구는 역사적 가치와 안전상의 문제로 탑승이 제한된다. Visitors ride Keith Haring’s painted carousel. Luna Luna, Hamburg, Germany, 1987. Ⓒ Keith Haring Foundation/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Photo Ⓒ Sabina Sarnitz. Courtesy Luna Luna, LLC
2 1987년 독일 함부르크에 개장한 당시의 루나 루나. Aerial view of Luna Luna in Moorweide park. Hamburg, Germany, 1987. Photo Ⓒ Sabina Sarnitz. Courtesy Luna Luna, LLC
3 키스 해링과 그의 회전목마. Keith Haring with his painted carousel. Ⓒ Keith Haring Foundation/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Photo Ⓒ Sabina Sarnitz. Courtesy Luna Luna, LLC
4 키스 해링의 회전목마와 달리 돔. Photo by Brian Ferry. Courtesy Luna Luna LLC
5 복원된 장-미셸 바스키아의 관람차와 소니아 들로네의 루나 루나 입구 아치. 입구 너머 작은 방에는 코끼리 탈을 쓴 사람이 보인다. 이곳 ‘폰실리랜드’에서는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분장물을 제작하고 착용해볼 수 있다. Photo by Brian Ferry. Courtesy Luna Luna LLC
6 원하는 상대와 결혼할 수 있는 안드레 헬러의 ‘웨딩 채플’은 이성 간의 결혼만 허용되었던 당시 사회에 대한 도발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Photo by Brian Ferry. Courtesy Luna Luna LLC
7 조명, 음악과 함께 무인 가동되는 케니 샤프의 공중그네. Photo by Brian Ferry. Courtesy Luna Luna LLC
8 과거 루나 루나에서 키스 해링의 회전목마를 즐기는 방문객들의 모습. 뉴욕 전시에서 해링의 회전목마를 포함한 대부분의 놀이기구는 역사적 가치와 안전상의 문제로 탑승이 제한된다. Visitors ride Keith Haring’s painted carousel. Luna Luna, Hamburg, Germany, 1987. Ⓒ Keith Haring Foundation/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Photo Ⓒ Sabina Sarnitz. Courtesy Luna Luna, L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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