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수집한 현대미술 컬렉터의 반세기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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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5, 2023

글 고성연

Interview with_ 울리 지그(Uli Sigg)

막대한 가치를 품은 소장품 기부로 ‘이건희 컬렉션’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미술품 컬렉터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브랜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강력한 컬렉터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이건희’라는 이름 석 자만 붙으면 안 그래도 인기가 부쩍 치솟은 문화 예술 플랫폼인 미술관 앞에 몇 겹 똬리를 틀 정도로 긴 줄이 늘어서는 광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저명한 아트 딜러이자 컬렉터인 아담 린데만은 미술품 수집을 가리켜 “병, 지독한 물질주의, 집착, 혹은 열정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했다. 분명한 건 단순한 투자로만 대하지 않는 수집광들에게 컬렉팅은 도무지 멈출 수 없는 행위이자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취향대로 즐기거나, 혹은 어떤 목적을 갖고 수집을 계속한다고 해서 컬렉터가 되는 건 아니다. 출중한 안목과 지속적인 연구, 유연하고도 명료한 수집 철학을 지녀야만 한다. 현재 서울(송은)과 홍콩(M+)의 현대미술관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소장품 전시가 동시에 열릴 만큼 ‘성공적인’ 컬렉터 인생을 꾸리고 있는 울리 지그(Uli Sigg)에게 중국 현대미술의 ‘수호자’이자 ‘기록자’나 다름없는 ‘외길’ 컬렉팅 여정과 철학을 들어봤다.


역사 속에는 예술가들을 뒷받침하고 성장시키는 데 톡톡한 몫을 하는 건 물론, 예술사의 흐름을 함께하거나 심지어 바꿔놓기도 할 정도로 위대한 컬렉터들이 있다. 20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액션 페인팅’으로 유명한 잭슨 폴록을 키워내는 등 미국 현대미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페기 구겐하임도 있고, 앙리 마티스나 파블로 피카소 같은 재능에 아낌없이 투자했던 세르게이 시추킨 같은 인물도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명소로 꼽히는 게티 뮤지엄 설립자 존 폴 게티는 아트 컬렉팅을 인간이 꾀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희열과 충족감 넘치는 것이라고 예찬하면서 미술품 수집이 단순히 취미가 아닌 ‘소명’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단한 부를 소유했던 소위 ‘갑부’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사실 ‘슈퍼 리치’ 게티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짠돌이’였지만 미술에는 관대한 편이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 같은 맥락에서 울리 지그(Uli Sigg)를 보고 ‘성공적인 컬렉터’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 같다. 스위스 출신인 그는 거부 집안에서 태어나 마음껏 부를 휘두르며 예술을 접한 게 아니라 평범한 샐러리맨 생활을 하다가 컬렉터의 길로 빠져들게 됐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 유수 미술관으로부터 그의 이름을 내건 소장품 전시를 하자는 러브콜을 받으면서 스위스 루체른주에 있는 아름다운 섬(Mauensee)에 자리한 고성에서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으니, 뭇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만도 하다. ‘컬렉터=직업’이라 여겨져도 무리 없을 명성과 인맥, 재력까지 골고루 갖춘 드문 사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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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현대미술사와 함께한 ‘지그 컬렉션’
그러나 ‘성공’의 화려한 단면만 부각되기엔 아쉽다. 예술적 토양이 풍부한 스위스 출신이긴 하지만 울리 지그는 현대미술을 접하거나 수집을 하는 ‘아트 애호가’와는 거리가 먼 성장기를 보냈다. 서울 강남 도산대로에 자리한 인상적인 건축물로 유명한 송은에서 지난 3월 10일 개막한 전시 <울리 지그 중국 현대미술 컬렉션(SIGG: Chinese Contemporary Art from the Sigg Collection)>展을 기념해 한국을 찾은 그는 중국 발령으로 근무지를 옮기기 전에는 “가구에는 관심이 꽤 있었지만 미술품을 수집한 적은 없었다”고 털어놓으며 지인의 파산으로 우연히 스위스 화가의 망가진(구멍 뚫린) 그림을 산 게 전부였던 것 같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미술 자체에는 흥미가 있었다고 해도 ‘컬렉터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법학을 전공한 그는 경제·경영 분야 기자(business journalist)로 커리어를 시작했다가 쉰들러 그룹에서 일을 하게 됐고 30대에 접어든 1970년대 후반 베이징에 파견됐다. 당시 개혁과 개방을 추진했던 덩샤오핑의 시대였기에 글로벌 기업들은 중국 시장의 문을 두드렸고, 쉰들러 그룹은 승강기(elevator) 만드는 합작 법인을 설립하고자 했다. 느닷없이 산업의 현대화를 이끄는 선두 대열에 속한 외국 비즈니스맨이 된 울리 지그는 중국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호기심과 학구열이 있는 그로서는 이 거대한 나라에 대해 파편적인 정보만 쌓는 것이 마뜩잖았다. 그래서 동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 일컬어지는 현대미술을 통한다면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당장 무턱대고 수집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현대미술을 한다고 할 만한 작가가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먼저 ‘공부’가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저 뭔가를 쌓아가는 “축적자(accmulator)와 컬렉터(collector)의 역할은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그리하여 그는 중국의 역사와 사회, 문화 예술을 다룬 서적을 섭렵하며 ‘독학’해나갔고, 현지 예술가들도 알아갔다. 이렇듯 관망과 연구를 하던 중 1989년 톈안먼 시위가 발발했고, 이는 인류의 오랜 역사의 전철을 밟듯 문화적 자극제 역할을 했다. 새로운 예술적 표현과 도전에 나선 중국 예술가들을 보면서 울리 지그는 1990년부터 작품 수집에 전격 나섰다(이 시기에 회사도 그만뒀다). 당시 중국에는 갤러리나 딜러가 활동할 만한 예술 생태계가 부재했기에 주로 작가에게서 구매했다. 특이하게도 그는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중국, 북한, 몽골 주재 스위스 대사로 재직했는데, 덕분에 그는 북한의 미술품도 소장하게 됐다(심지어 평양에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짓자는 제안도 받았지만 정중히 거절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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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기증 이후 ‘수집 인생’ 2막을 즐기다
울리 지그의 중국 현대미술 컬렉팅 여정에서 만난 작가는 지금까지 2천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중에는 유명한 반체제 작가 아이웨이웨이도 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주 지적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미술을 직업으로 하고 있지는 않았다””며 창작을 북돋웠다고 그는 회상했다(명성 높은 시인 아이칭의 아들인 아이웨이웨이는 영화를 전공했고 미국에서 행위 예술을 하기도 했지만 부친의 병환으로 1993년 베이징으로 돌아온 직후에는 주로 예술가들을 돕고 책을 출판했다). 그런데 주지할 만한 사실은 울리 지그의 수집 목적은 처음부터 “기증하는 데 있었다”는 점이다. 원래는 국가 단위의 미술 기관이 해야 할 일이지만 빠져 있던 퍼즐을 개인인 그가 맡아 채워 넣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된 수집 여정이었다는 얘기다. “저는 중국 현대미술의 (발전) 시기를 아우르는 다양한 매체로 구성된 컬렉션을 구축해야겠다고 마음먹었기에 취향을 반영하기보다는 백과사전처럼 모든 걸 포괄하는 수집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그는 중화권에 거주하는 중국 작가들을 위한 중국현대미술상(CCAA)까지 제정했다. 그리고 2010년대 중국에서 미술관 설립 열기가 달아올랐을 때 큐레이터의 자율권을 최대한 존중해주겠다는 홍콩의 M+에 자신의 컬렉션 3분의 2에 해당하는 1천4백63점의 작품을 기증했다. 마침 그와 같은 스위스 출신의 걸출한 ‘스타키텍트’ 듀오가 이끄는 HdM이 설계를 맡은 M+의 중요한 자산이 된 그의 소장품은 ‘M+ 지그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현재도 전시되고 있다(송은 신사옥 역시 HdM이 설계했다). 그동안 중국 현대미술의 가치도 고공 행진했기에 울리 지그의 기증 작품 가치가 1억7천만 달러에 이른다는 추정치도 있다(M+에서 추가로 47점을 구매했기에 그도 거금을 받았다고는 한다). 송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홍콩의 미래에 대해 우려가 된다”고는 했지만 열흘쯤 뒤에 홍콩 아트 주간에 열린 M+ 행사에서 만나니 꽤 고무돼 보였다. 그의 이름을 딴 예술상 ‘지그 프라이즈’ 행사가 열린 자리였으니 컬렉터로서의 보람은 바로 이런 데서 오는 게 아니겠는가. M+의 방향성은 앞으로 더 주의 깊게 지켜봐야겠지만 쩡판즈, 팡예준, 장샤오강 같은 중국 현대미술 스타 작가들이 포함된 그의 소장품을 전시한 공간에는 당초 ‘출품 목록’에 포함되어 있던 아이웨이웨이의 두 작품도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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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소중한 문화 예술 자산에 대한 연구와 기록, 수집을 아우르는 반세기에 걸친 소신 있는 여정은 ‘통 큰’ 기증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컬렉팅 인생의 2막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백과사전식 수집이 아니라 개인의 취향을 반영했다”는 새로운 컬렉션(600점 이상)의 일부가 현재 송은에서 전시되고 있기도 하다(오는 5월 20일까지)). 또 그는 북한 작가들뿐 아니라 이수경, 전소정 등 우리나라 현대미술가의 작품도 꾸준히 모아왔는데, 2021년 봄 베른 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 전시에서 아마 세상 어떤 수집가도 소장하고 있지 않을 독특한 구성의 컬렉션이 공개되기도 했다. 추후 한국에서도 지그 컬렉션 여정의 2막을 더 폭넓게 접할 기회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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