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미술관, 그들이 공감을 이끄는 방법_MOCA Taip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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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05, 2019

글 고성연(타이베이 현지 취재)



16세기 초 포르투갈 항해자들이 부른 것을 계기로 ‘포모사(Formosa,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라는 별칭을 지닌 대만. 역사 궤적을 볼 때 우리와 여러모로 닮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성을 품은 이 나라를 찾은 한국 방문객 수가 지난 2년 연속 1백만 명을 넘었다. 이 같은 관심의 중심에는 언뜻 수수해 보이는 도시 풍경 속에 자리한 풍성한 다채로움이 인상적인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가 있다. 당대 사회의 흐름을 반영하는 현대미술의 플랫폼인 타이베이 현대미술관(MOCA Taipei)은 은근한 매력이 넘쳐나는 이 도시에 간다면 꼭 들러볼 만한 작은 ‘소통’과 ‘채움’의 공간이다. 흔히 난해하다고 여겨지는 현대미술을 ‘즐길 만한’ 것으로 소통해온 이 미술관의 비결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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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살짝 내리고 난 뒤의 미풍 섞인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지는 어느 날 오후, 타이베이 번화가인 중산역 근처에 조용하게 자리한 붉은색 벽돌 건물 앞에 서 있노라니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오라가 뿜어져 나온다. 실제로 1921년에 지은 이 건물은 대만의 역사를 반추하게 하는 문화유산이다. 일제 식민 지배를 받던 시절 초등학교로 쓰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뒤에는 타이베이 시 정부의 집무실 건물로 오랫동안 사용되어왔고, 2001년 5월 민관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재단이 운영하는 현대미술관으로 거듭났다. 미술관 자체의 역사가 오래되지는 않았고 규모가 방대하지도 않지만, 이 나라에서 대중과 평단에서 동시에 높은 평가를 받는 ‘현대미술의 허브’로 자리매김해왔다. 특히 콘텐츠의 다양성이 뒷받침되는 데다 전시를 담아내는 방식이 진지하되 마냥 무겁지 않아 젊은 층이 부담 없이 즐겨 찾고 사랑하는, 그리고 해외 방문객들이 선호하는 플랫폼이기도 하다. 그 이유를 파악하는 데는 콘텐츠를 몸소 체감하는 것만 한 게 없을 터. 2014년 K-팝을 다룬 전시를 진행하기도 하고, 2017년 아시아 지역의 주요 미술관으로는 최초로 대대적인 퀴어 아트 전시 <Spectrosynthesis–Asian LGBTQ Issues and Art Now>를 개최하기도 한 MOCA 타이베이의 존재를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현재진행형’인 전시를 직접 감상하게 된 건 처음이었다.


우리 삶 속의 ‘소리 풍경’에 귀 기울이게 하다
MOCA 타이베이는 일단 건물의 구성부터 독특하다. 정문을 바라봤을 때 일자로 뻗은 전면부가 미술관으로 쓰이고, 측면부는 고등학교로 사용된다(학교로 들어가는 입구가 따로 있다). 지난달 초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 미술관 1층에서는 개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전시 <Living Sound-Expanding the Extra-musical>이 펼쳐지고 있었다(오는 7월 7일까지). 대만 미술계에서 촉망받는 큐레이터 라이 이신 니콜(Lai Yi-Hsin Nicole)이 맡은 이 전시의 기획 의도는 소리가 지니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함의를 탐색하면서 우리 삶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소리의 파편을 발견하고 다시 이해하고자 하는 데 있다고 되어 있다. ‘어떤 것도 경계 바깥에 있지 않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곁들여서. ‘무슨 소리야’라고 속으로 불만스럽게 중얼거릴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둘러보노라면 각각의 전시 콘텐츠가 꽤나 경쾌하고 흥미롭게 다가온다. 예컨대 전시장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지안정룬(Chiang Chun-Lun)의 영상 작품 ‘Nobody Band #MOCA Taipei’. 미술관 직원들이 참여해 그들의 생각과 느낌을 담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작품이다. 학교에는 ‘교가’가 있고 나라에도 ‘국가’가 있는데, ‘그렇다면 미술관이라는 기관은?’이라는 발상에서 비롯됐다고. 영상을 보면 필자를 안내해준 마케팅 담당자가 자신이 직접 쓴 가사에 아티스트가 붙인 곡을 노래하고 거기 맞춰 춤추는 모습이 나온다(심지어 미술관 관장도 등장한다). 아이작 충 와이(Isaac Chong Wai) 작가의 3채널 영상 작품 ‘One Sound of the Futures’(2016)는 각각 홍콩, 광주(한국), 우한, 이렇게 세 도시 주민들이 나와 저마다 그리는 미래의 비전을 목청껏 외치는 모습이 담겨 있는데, 도시마다 다른 참가자들의 얼굴 표정이 흥미롭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타이베이 자유 광장에서 진행한 촬영분도 추가됐다. 미술관의 이전 전시에서 쓰인 도구와 재료를 바탕으로 소리를 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도구들을 선보인 카롤리나 브레굴라(Karolina Bregula)의 작품 ‘Instruments for Making Noise’ 역시 미소를 유발한다. 관람객이 원하면 이 ‘깜찍한’ 악기들을 빌려 ‘정치적 항의’를 위해 사용하고 돌려줄 수 있다.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생각을 유도하는 참여형 전시
대중음악을 소재로 펼쳐지는 또 하나의 전시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These Flowers>가 동일한 기간에 걸쳐 펼쳐지고 있는데, 2015년 처음 시작된 연작 프로젝트다. 음악을 매개체로 ‘시간’과 ‘기억’에 대해 생각하고, 우리네 삶을 곱씹어보게 하는 이 전시에는 유명 디자이너 조 팡(Joe Fang)을 비롯해 인기 록 밴드 메이데이가 뮤직 디렉터 역할을 했고, 대만 안팎에서 11명의 싱어송라이터와 10명의 현대미술 작가가 참여했다. 모두가 흥얼거릴 수 있는 음악을 공통분모로 사진, 영상, 설치 등 다양한 형식의 콘텐츠가 마련돼 있는 이 전시는 확실히 관객 몰입도가 높다. 특히 관객들로 하여금 천장이 높은 전시 공간의 한 벽면에 설치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온갖 표정을 짓게 하는 에그플랜트에그 X 코퍼 왕(EggPlantEgg X Cowper Wang)의 작품 ‘XiaoDingDang in My Dreams’는 인기 만점이다. 마치 차츰 희미해져가는 인간의 기억처럼 이리저리 휘고 찌그러지는 자신의 그래픽 이미지를 보는 매력에 푹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지고 구부러진 자화상을 연신 담아내는 ‘셀카 삼매경’으로 이끄는 건 물론이고 말이다. 그런가 하면 바로 옆에는 역시 시선을 좀처럼 뗄 수 없게 하는 커다란 스크린이 걸려 있는데, 조 팡의 외조부를 등장시킨 ‘Dear’라는 멀티미디어 작품.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노인의 미묘한 표정을 지켜보노라면 무심하기 짝이 없는 시간의 변화와 소멸 등에 대한 단상을 떠올리게 되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흥에 들뜨게도 하고 애잔함에 빠지게도 하는 대중음악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전시의 콘텐츠를 담은 음악 앨범도 발매됐다.


한숨과 슬픔을 승화시키는 치유의 예술
지금은 막을 내렸지만 필자가 방문할 당시 1층 한쪽 공간에서 열린 작은 전시가 또 있었다. 전시 포스터부터 적잖이 심상찮은 느낌을 자아내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전시였다. 채도 높은 노란색 벽을 배경으로 걸려 있는 전시장 내 사진들은 망령이 울부짖는 모습을 담은 듯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복도 쪽 창문에는 시가 적힌 하얀 종이들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바닥 곳곳에는 초록빛 잎이 담긴 화분, 그리고 둥글게 둘둘 말린 쪽지가 들어 있는 조그마한 유리병들도 놓여 있었다.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는 배치일까’ 싶은 이 묘한 기운의 전시명은 <Atemschaukel>. 우크라이나의 강제노동 수용소에 수용된 17세 소년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삶을 그려낸 소설가 헤르타 뮐러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한국에서는 ‘숨그네(Breath Swing)’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있다)과 같은 제목이다. 지난 3월 말부터 5월 26일까지 열린 이 전시는 2명의 여성 아티스트들이 참가한 2인전이다. 창문에 걸린 시와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느낌의 흑백사진 26점은 류샤(Liu Xia), 화분과 유리병을 비롯해 복도 끝 정중앙에 딱 한 점 걸려 있는 그림은 차이하이루(Tsai Hai-Ru)의 작품. 이들은 자신의 가족 중 정치 죄수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작은 유리병 속에는 그런 아픔을 지닌 다른 여러 가족의 사연이 들어 있었다). 화분이 있는 방에는 중간중간 낮은 의자들이 놓여 있어 관람객으로 하여금 차분히 앉아 사연이 담긴 쪽지를 읽게 했다.
그런데 이 두 작가는 협업을 했음에도 정작 서로 만나지는 못했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류사는 중국의 인권 운동가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2년 전 수감 중 세상을 뜬 류샤오보(Liu Xiabo)의 아내로, 개막식에도 오지 못했다. 프랑스 비평가 기 소르망(Guy Sorman)의 제안으로 기획됐다는 이 전시는 MOCA 타이베이의 관장 유키판(Yuki Pan)이 직접 큐레이팅을 맡았다. “처음에는 기 소르망이 프랑스 작가와의 협업을 제안했는데, 아시아 작가가 더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비슷한 트라우마를 지닌 작가 차이하이루를 떠올렸지요.” 유키판의 설명이다. 차이하이루는 계엄령이 무려 38년(1949~1987)이나 지속됐던 대만의 아픈 시절에 부친이 민주화 운동으로 장기간 투옥된 사연을 갖고 있는 작가. 부친이 부재한 긴 세월 동안 나머지 가족이 고통스럽게 지내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는 그녀는 사실 이 전시에 참여할 결심을 하는 데도 적잖이 고심했다고 털어놓았다. 떠날 때는 ‘청춘’이었던 부친이 완전히 민간인으로 돌아왔을 때 나이가 거의 예순이었다고 하니 그럴 법도 하다. 그래도 그녀의 작품에는 희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파릇파릇한 생명력을 머금은 듯한 화분도 그러하거니와 검은색 바탕에 고개를 무릎에 파묻은 채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담은 한 점의 그림에 대해 “나비를 뜻해요”라고 말하면서 작가는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라는 맥락에서 그렸다는 설명이다. 당시 사건을 잘 알지도 못하는 ‘어린’ 관람객들이 시를 읽고 유리병 속에 담긴 사연을 읽으면서 공감할 때도 마치 뭔가 달래는 듯, 기운을 북돋워주는 화분에 둘러싸여 있도록 한 것도 그녀의 배려 섞인 연출이다.


MOCA 타이베이를 찾는 주 연령층은 10대 후반에서 30대의 젊은 층이다. 아마도 주된 원동력은 관람객이 때로는 즐겁게 구경하거나 참여하고, 때로는 진지한 아픔을 나누면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의 다채로운 콘텐츠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디지털 세대에 익숙한 영상이나 소셜미디어 등을 활용한 소통에도 일찍감치(2008년) 적극적으로 나서 꽤 탄탄한 팬층을 구축하는 데도 성공했다(페이스북 팔로어가 30만 명이 넘는다). 지난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디지털 시대 문화 기관의 소셜미디어 연대기’를 주제로 한 ‘ACC 라운드 테이블’에서도 소통 창구로 소셜미디어와 예술 교육을 활용한 MOCA 타이베이 사례를 발표하기도 했다. 진부하게 들릴 수 있지만 다양성을 토대로 대중이 새로운 관점과 사고를 추구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게 동시대 미술의 덕목이고, 유키판 관장의 말처럼 “예술은 ‘진실’을 미학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화려한 위용이나 규모를 자랑하지는 않지만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는 솔직하고 활기찬 소통이 눈에 띄는 MOCA 타이베이의 사례는 생각할 거리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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