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스페이스의 미학
21세기에는 소프트 파워가 주도할 것이고, 그 핵심 축으로 문화가 꼽힌다는 요지의 주장은 이제 지겹게 들리기도 하지만, 요즘 문화 콘텐츠의 힘이 새삼 피부로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단지 BTS, 블랙핑크 같은 글로벌 스타 그룹이나 <기생충>, <미나리>, <오징어게임> 같은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세계만의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 도시 산책자들이 우리나라 주요 도시를 ‘체험’할 때면 십중팔구 역동적 매력에 놀란다. 제품이든 서비스든 공간이든 ‘문화화’의 내공이 빼어나고, 그 실력을 반영한 공간과 콘텐츠가 도시를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은 단연 그 선봉에 있다. 팬데믹 시대 이전에 아시아 도시들이 문화 예술 주도권을 겨냥해 바쁜 행보를 펼치고 있었는데, 지난 2년 새 창조적인 문화 도시로서 서울의 경쟁력은 급상승했다. 거의 ‘나 홀로 상승세’ 분위기를 타면서 말이다. 도시의 문화적 역량을 보여주는 미술관을 둘러싼 풍경도 일취월장하고 있다. 다채로움과 깊이를 더해주는 공간들이 샘솟아나고 있는 서울의 아트 신을 살펴본다.
SONGEUN
‘공간의 문화화’가 문화적 흐름이 되어버린 만큼 미술관(museum)이나 이에 준하는 아트 센터가 받는 압박감은 상당할 것 같다. 국가나 도시별로 펼치는 헤게모니 쟁탈전 정도는 아니어도 자존심 걸린 내공과 자본의 승부랄까. 이미 글로벌 미술계는 기업이나 재단에서 막대한 자본과 마케팅 역량으로 꾸리는 미술관이 커다란 존재감을 발휘하는 풍경에 익숙해진 지 오래됐지만, 메세나든 긴 안목에서의 브랜딩 투자든 ‘랜드마크’가 되는 미술관은 도시에 굉장한 부가가치를 더해줄 수 있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사실 대중 입장에서는 공공이냐 사립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공간’과 ‘콘텐츠’ 자체가 더 크게 와 닿게 마련이다. 질적인 수준이나 규모, 물리적, 심리적 접근성 같은 요소도 중요하고 말이다. 이런 배경에서 송은문화재단 신사옥(ST송은빌딩)의 순조로운 낙성은 자못 기대되고 궁금해왔던 소식이었다. 오늘날 가장 각광받는 건축계 브랜드로 꼽히는 HdM(헤어초크 & 드 뫼롱)의 국내 첫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송은문화재단을 운영하는 ST인터내셔널(舊 삼탄)이라는 존재 자체가 굳이 브랜드를 내세우는 마케팅 수요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순수한 미술계 후원자로서 존속해온 이력이 있어서다.
넘치지도 덜하지도 않는 정제미를 품은 공간
이렇듯 첫인상은 ‘절제된 품격’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데, 내부로 발을 들이면 또 다른 분위기의 풍경이 펼쳐진다. 경건함은 여전히 묻어 있지만 보다 해사하고 융통성이 느껴진다. 특히 개관전 1부(오는 11월 20일까지)를 진행 중인 여러 층에 걸친 전시 공간은 전반적으로 고요하면서도 군데군데에서 낭만이 묻어난다. ‘콘텐츠’ 자체를 편안하게 살려주는 평온한 그릇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상 도입부의 소박한 야외 정원을 낀 1층을 비롯해 1층 로비에서 2층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의 완만한 곡선미, 그리고 지하 2층 전시장에서 1층 천장까지 둥근 모양으로 시원하게 뚫려 빛을 통과시키는 구조가 무게감을 자아내면서도 멋스럽게 숨을 터주는 듯하다. “1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지하 전시장을 볼 수 있으며, 나선형 계단을 따라 걷다 보면 새로운 공간을 마주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전시장으로 이어집니다.” 피에르 드 뫼롱은 이처럼 새롭게 발견하는 ‘파운드 스페이스’가 그들의 대표작 중 하나인 테이트 모던의 터빈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발견의 미학, 그리고 공간의 다양성을 원했던 클라이언트의 의도가 확실하고 일관성이 있어 좋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저희는 편견 없이 순수한 아이처럼 새로운 걸 찾고 세상을 알아가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중략). 송은은 어떤 공간, 기능이 필요한지 명확히 알고 있었기에 저희가 즐거운 여정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LEEUM MUSEUM OF ART
올해 국내 미술계는 ‘이건희’와 ‘삼성’을 빼고 얘기하기 힘든 한 해로 기억될 듯싶다. 상반기부터 가치를 매기기 힘든 규모의 미술품 기증으로 온 나라를 들썩이며 서울, 대구, 광주 등지에서 ‘이건희 컬렉션’ 전시가 성황리에 펼쳐지는 데 이어 올가을에는 겨울잠을 오래 잤던 리움미술관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리움 자체가 설립자의 성 ‘Lee’와 미술관을 뜻하는 ‘museum’을 합한 명칭이다). 지난 2017년 이후 기획전을 열지 않았고, 팬데믹 이후로는 상설전도 막을 내렸던 터라 고미술과 근현대미술을 막론하고 국보급 소장품은 물론 동시대를 상징하는 뛰어난 작가들을 마음껏 모으는 기획을 할 수 있는 블록버스터 미술관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해외 주요 도시에서 ‘스타키텍트’가 설계한 거대한 공간에 잘 어울리는 초대형 작품을 들여놓는 ‘규모의 미학’이 인기를 끌면서 ‘건축이 미술관의 아이콘이 되는 현상’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불거져 나오지만, 사실 관람객 입장에서는 송은의 아트 스페이스처럼 산책하듯 거닐 수 있는 크지 않은 공간도, 리움처럼 많은 걸 품을 수 있는 압도적인 공간도 모두 매력적일 수 있다.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는 기획전
간만에 ‘정상 가동’ 상태로 돌아온 만큼 리움미술관은 여러모로 준비에 성의를 보였다. 정구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주도로 미술관 로고를 7년 만에 바꾸는 등 뮤지엄 아이덴티티(MI)에 변화를 꾀했다. 리움의 명물인 로툰다홀의 단순화한 이미지를 모티브로 삼아 나선형으로 회전하는 모양새를 띤다. 로비도 로툰다를 중심으로 재편해 김수자와 이배 등의 작품을 새롭게 설치했다. 안내 데스크에 설치된 2백40여 개의 숯을 세워놓은 작품은 이배의 ‘불로부터’(2021)인데, 관람객 모두가 근심, 염려에서 벗어나 순수한 마음을 고양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로툰다 천장에 설치된 김수자 작가의 ‘호흡’(2021)은 특수 필름을 활용해 날씨 변화에 따라 오색찬란한 빛의 스펙트럼을 체감할 수 있다. 또 로비 한쪽 벽면을 감싼 미디어 월도 주목할 만하다. 현존하는 디스플레이 중 가장 우수한 화질인 5천만 화소 이상의 해상도를 지원하는 이 월에는 현재 3D 애니메이션 분야의 선구자인 미국 작가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아름다운 자연을 상상하게 하는 디지털 영상 작품 3점이 흘러나오고 있다. 앞으로도 국내외 작가의 다양한 디지털 미술 프로젝트를 소개할 예정이다. 로비를 중심으로 한국의 고미술과 근현대미술 소장품 공간이 나뉘어 펼쳐지는데, 이번 재개관을 계기로 과거 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소장품을 다수 선보였다. 상설관은 앞으로 무료로 운영한다는 방침인데, 사전 예약이 필수라 당분간 경쟁이 꽤 치열할 듯싶다.
미술 애호가라면 아무래도 4년 반 만에 열린 리움의 기획전에 대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리움의 첫 카드는 팬데믹 시대를 맞아 인간 존재를 성찰하고 그 다양한 면면을 다룬 <인간, 일곱 개의 질문>이란 전시다. 국내외 작가 51팀의 1백30여 점을 소장품 중심으로 구성했는데, ‘리움’의 명성에 걸맞은 20세기를 풍미한 거장들의 작품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주제별로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일단 전시장으로 내려가는 도입부의 경사로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대표적인 조각 작품 ‘거대한 여인 III’(1960)이 앙상하고 긴 자태를 뽐내고 있고, 영국의 조각 거장 앤터니 곰리의 기하학적 추상 조각 ‘표현’(2014), 그리고 허무한 표정을 짓는 도시인들의 군상을 등신대 크기로 묘사한 조지 시걸의 ‘러시 아워’(1983) 등이 관람객을 반긴다. 이어 7개 영역으로 나누어진 전시 공간에는 이브 클랭, 앤디 워홀, 신디 셔먼, 론 뮤익, 브루스 나우먼 등 현대미술계 블루칩 작가들은 물론 이불, 최우람, 니키 리, 김인숙 등 국내 작가들의 작품들이 각각의 소주제에 맞게 어우러져 있다. 인간의 ‘몸’이나 ‘퀴어성’, ‘혼종성’ 등의 소주제를 다루다 보니 다소 파격적인 사진이나 영상 작품도 있어 ‘하드코어 애호가’라면 두 팔 벌려 반길 수도 있다(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 리움은 기획전도 올해 말까지는 입장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이제 첫 단추를 다시 꿰었는데, 다른 면모를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만큼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동시대의 진정한 거울이 될 수 있을지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