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트와 비스포크가 위기를 맞고 있다. 다가올 사회는 더 이상 패션에서 장인 정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듯 보인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런던 새빌 로 양복점들의 몰락을 바라보며 새로운 시대에 맞춰 변화해야 할 패션과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아름다운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트렌드의 측면에서도 전통적인 양복의 대중적인 인기는 시들해졌다. 시대가 갈수록 우리는 단순함을 좇는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남성 아우터의 경향은 넉넉한 실루엣과 복잡하지 않은 디테일이었다. 코트나 재킷의 원단에 들어가는 심지를 가볍게 하거나 생략한 옷도 많았다. 경량화와 단순화로 향하는 패션의 흐름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스포크 수트를 벗게 했다. 1880년부터 이어진 유명한 양복점인 킬고어(Kilgour)의 폐점,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스타일리스트이자 전속 디자이너 하디 에이미스(Hardy Amies)의 몰락은 시대가 더 이상 그런 옷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전통을 고수해온 다른 양복점들도 쇼윈도에서 갑옷 같은 수트를 잠시 치우고 사파리 재킷이나 일명 샤켓이라 불리는 셔츠의 형태로 출시된 캐주얼한 재킷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양복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오랜 습관을 고민 없이 답습하거나 새로운 영감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 많은 테일러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그러나 래글런 백작이 불편한 팔을 넣기 쉽도록 만든 것이 래글런 코트의 원조였고,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참호에 숨기 위해 고안된 것이 트렌치코트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옷을 디자인한다면 비스포크는 위기를 넘어 미래에도 유지될 것 같다는 희망이 보이기도 한다.
인간의 손길을 극도로 최소화한 옷을 생산하는 것도 미래의 특성 중 하나다. 사람이 하나의 옷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한 가지 디자인의 수많은 옷을 컨트롤한다. 대량으로 빠르게 생산되고 쉽게 소비되어 버려지는 SPA의 흐름은 미래 패션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브랜드에서 감성을 충족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비스포크는 이러한 부분을 파고든다. 일례로 나는 최근에 중동 국가의 왕자를 위해 옷을 만들었다. 그는 체형상 허리가 곧은 편이었지만 목이 심하게 앞으로 굽어 기존 수트의 목 부분이 가지런하게 놓이지 않았다. 주름 없이 매끈한 양복이 입고 싶어 양복점을 찾아왔을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고민 끝에 칼라에 덧대는 심지를 여러 겹 손으로 누벼 목 부분에 넣어 재킷을 만들었다. 비스포크에는 주문자를 위해 양복을 꿰매는 기술뿐 아니라 고객을 위해 골똘히 고민하는 시간도 포함된다. 무인화로 대표되는 미래의 옷은 예민한 착용자에게 만족감을 주기 어려울 것이다. 다양한 체형이 존재하는 만큼 각기 다른 감성과 그에 맞는 기술이 존재한다. 이것은 아직 미래의 옷이 충족하지 못하는 비스포크만의 장점이다.
‘Classic Does Not Stay Long’이란 말이 있다. 이 표현이 비스포크가 나아갈 방향을 잘 설명해주는 말이 아닐까 한다. 비스포크는 최고의 품질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항상 변화를 거듭하며 과거에 안주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4백 년 전 런던 전역이 잿더미가 되고 국가 위기 상태에 놓였을 때 수트라는 의복이 탄생했고,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던 오트 쿠튀르는 혁명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았다. 비스포크는 미래의 유행에 항상 열려 있고 그것을 수용하며 현재에 맞게 가공되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묵묵하게 지켜온 전통의 힘으로 미래를 선도해나갈 추진력을 얻은 것이다. 지금 비스포크가 위기를 맞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그 의미를 제한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비스포크가 지닌 상상력과 예술적 영감은 미래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화유산이자 패션 산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