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nds & Artketing series_5 공간의 예술화 열풍
4년 전쯤 파리 몽파르나스에서 기업의 후원으로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독립 큐레이터를 만난 적이 있다. “지난 10여 년에 걸쳐 프라이빗 섹터의 미술 후원이 눈에 띄게 많아졌어요. 자금 지원은 공공 영역으로 여겨졌는데….” 20세기 초 러시아 출신의 큐비즘 화가가 작업을 하면서 가난한 이웃과 동료 예술가에게 따듯한 먹거리를 제공했던 유서 깊은 명소였는데, 건물 자체는 파리시에 속하지만 후원은 기업, 단체 등이 맡고, 수혜 대상은 다국적 예술가나 연구자라고 했다. 이처럼 민관이 협업하거나 아예 기업에서 문화 예술 플랫폼을 꾸리는 풍경은 파리나 서울이나 마찬가지로 심심찮게 눈에 띈다.
아니, ‘다이내믹 코리아’답게 요즘 우리나라에서 이런 움직임은 더 활발한 듯도 하다.더구나 일찍이 예술의 지위를 갈구해온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에 한정된 행보도 아니다. 도시 곳곳을 수놓고 있는 ‘공간의 예술화’ 붐을 들여다본다.
전형적인 오피스 타운에 작은 공원 터가 나오면서 청신한 녹음을 배경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지상 2층짜리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지면 위로 살짝 둥글게 솟은 잔디밭과 궤를 같이하듯 낮고 우아한 아치를 품은, 그래서 빌딩 숲 사이에서 숨을 터주는 듯한 이 건축물의 정체는 지난해 가을 문을 연 ‘스페이스K 서울’이라는 코오롱그룹의 문화 예술 공간. 이 동네에 처음 가본 이들이라면 마곡산업단지에 대한 인상에 호감 지수를 보탤 만한 공간이다.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조민석(매스스터디스 대표) 건축가가 설계를 맡아 지역민들이 자연스럽게 드나들고 야외 공원에서도 소통하는 데 초점을 맞췄는데, 실제로 ‘핫플’로 소문이 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시를 보러 오는 인파로 꽤 북적거린다. 현재 쿠바계 미국 아티스트로 강렬한 색감에 불안과 긴장이 흐르는 구성으로 독특한 회화 세계를 표현해온 헤르난 바스(Herman Bas)의 개인전 <모험, 나의 선택(Choose Your Own Adventure)>이 열리고 있는데, 신작을 포함해 작가의 면면을 시기별로 살펴볼 수 있다. 오는 7월께 막을 올릴 다음 전시 역시 세계적인 아티스트 라이언 갠더(Ryan Gander)의 개인전으로, 전시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아도 ‘라인업’이 탄탄해 보인다. 코오롱그룹은 이미 1998년부터 문화 예술 분야의 후원 활동을 다각도로 펼쳐왔는데, 스페이스K 서울의 경우에는 시민을 위한 ‘선물’ 형태로 기획됐다. 상대적으로 문화 인프라가 부족한 서울 서남부 지역을 위해 시에 기부 채납하지만 앞으로 20년 동안은 코오롱그룹에서 운영을 맡는 식이다. 2014년 파리 서쪽 끝자락 불로뉴 숲에 들어선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도 50년 뒤에는 파리 시민에게 선사한다는 공약과 함께 ‘메세나’적인 의지를 강조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지구촌에 무법자처럼 찾아온 코로나19 탓에 대대적인 오픈 파티를 하지 못했던 스페이스K 서울처럼 지난해 조용히 문을 연 또 다른 문화 예술 공간이 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이수그룹 본사 사옥에 자리 잡은 ‘스페이스 이수’. 광주비엔날레 김선정 대표가 남편인 이수그룹 김상범 회장과 뜻을 맞춰 약 495m2(1백50여 평)의 1층 로비를 누구에게나 개방된 전시 플랫폼으로 탈바꿈시켰다. 김 대표가 운영하는 비영리 성격의 예술 기획 단체 ‘사무소’에서 기획을 맡는데, 현대미술만이 아니라 공예, 인테리어처럼 일상과 맞닿는 다채로운 콘텐츠를 소개한다는 방향성을 세워뒀다.
얼마 전 시작한 세 번째 전시의 주인공도 한지를 재해석하는 현대적인 작업으로 알려진 조명 작가 권중모다.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이수 에디션’을 비롯해 간결하면서도 서정성이 엿보이는 그의 작품 20여 점을 선보인 <라이트 하우스(Light House)> 전시 말고도 스페이스 이수에 가면 ‘빛의 예술가’로 꼽히는 현대미술 거장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영구 설치 작품과 메리 코스(Mary Corse)의 회화 작품 등도 만날 수 있음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독일’이라는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현대미술 화랑을 플래그십 매장에 들여놓은 MCM의 사례도 흥미롭다. 1976년 독일 뮌헨에서 탄생했지만 한국 기업이 인수해 키운 글로벌 패션 브랜드 MCM은 베를린을 주 무대로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쾨닉(Ko··nig)과 손잡고 청담동 플래그십 매장에 서울 지점을 개관했다. 로열층인 5층과 ‘조각 정원’이 있는 옥상까지 섭렵한 쾨닉 서울에 가려면 MCM 매장을 통과해야 한다. 예술 후원이라는 취지도 잡고, 모객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지만 나름 ‘통 큰’ 행보가 아닐 수 없다. MCM 하우스 바로 옆에 자리한 명품 브랜드 헨리 베글린도 최근 매장 건물에 미 스페이스(ME space)라는 갤러리를 열어 <세 개의 시선>이라는 개관전을 펼쳤고, 로데오 거리에 위치한 다른 건물에도 L. 993이라는 전시 공간을 열었다.
사실 ‘브랜드’를 거느린 기업 차원에서 문화 예술을 주 무기로 한 마케팅 전략인 ‘아케팅(artketing)’에 나서는 움직임은 이미 유행 수준이 아니라 ‘뉴노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내로라하는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에는 절대 명제나 다름없다. 동시대의 혁신적인 감성을 덧입히는 동시에 영원성과 차별성을 추구하기에 예술만큼 탁월한 키워드가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경영학계에서는 럭셔리 기업들의 ‘예술화(artification)’ 수준을 단계별로 나누어 평가하기도 한다. 반면 미학적 경험이나 취향이 특정 계층의 소유임을 용인할 수 없는 대중도 예술을 갈구한다. 이에 발맞추듯 고급 문화든 하위 문화든 ‘위계’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다양한 콘텐츠가 등장하고 있고 말이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같은 비평가는 “옛 산업 세계가 거친 말투로 군림했다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진화해서 ‘문화적 얼굴’로 바뀌었다’고 꼬집으며 ‘다양성’, ‘창조성’, ‘포용성’ 같은 단어로 대중을 현혹해 물질적 불평등이라는 진실을 가린다고 일갈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미 예술이 일상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소비되는 ‘예술의 상품화’, 그리고 상품을 예술적인 희소가치와 창의성으로 무장시키고 차별화하는 ‘상품의 예술화’ 현상은 점점 더 깊이 우리 생태계에 스며들고 있다. 나아가 체험 경제가 키워드인 21세기에는 ‘공간의 예술화, 예술의 공간화’로도 설명할 수 있겠다. 그것이 그 자체로 유기적인 예술 작품 같은 아트 스페이스든 갤러리인지 상점인지 모를 융합적 매장이든 아니면 현대자동차가 디자인을 주 콘셉트로 삼아 부산에 연 모터스튜디오 같은 브랜드 체험관이든 말이다.
작품 한 점에 수백억 원 한다는 자코메티나 게르하르트 리히터 작품을 전시하는 ‘아트 스페이스’를 값비싼 플래그십 매장의 공간에 기꺼이 들이는 청담동의 루이 비통 메종이나 요즘 트렌드세터들 사이에서 인기 높은 ‘핫플’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젠틀몬스터의 하우스 도산은 ‘매장’이라는 공간의 예술화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다. 하우스 도산 같은 경우는 지하까지 포함해 5층짜리 매장에 이 회사의 선글라스나 안경은 물론 향과 크림 등을 아우르는 뷰티 브랜드 탬버린즈와 디저트 브랜드 누데이크가 다 같이 입점해 있는데, 정작 안으로 들어가면 1층 라운지에는 그 어떤 상품도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설치 작품이 마치 거친 공사 현장과도 같은 공간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을 뿐이다. 프레데리크 헤이만(Frederik Heyman)이라는 아티스트의 3D 작업물을 실물로 구현한 작품이란다. 지하로 내려가면 ‘디저트 아트’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마치 예술품처럼 생긴 케이크나 빵을 전시품으로 진열해놓고 파는데, 오후에 가면 바게트 정도만 주문 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소진된다. 남산의 명소로 자리 잡은 복합 문화 공간 피크닉(Piknic)과 손잡고 매장 1층을 전시 공간으로 꾸며 감각을 일깨우는 체험 위주의 아트를 선보이는 코오롱스포츠의 한남동 플래그십 매장도 비슷한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재미난 점은 명품이나 B2C 위주의 사업을 하는 소비재 기업이 아니라 상당수 B2B 기업들도 아케팅에 몹시 열심이라는 사실이다. 코오롱그룹의 사업 분야를 보면 패션 부문이 있기는 하지만 소재, 건설, 환경, 부품, 제약 등 여러 업종 중 하나일 뿐이며, 이수그룹 역시 화학을 모태로 바이오, IT, 건설 등으로 사업 다각화를 꾀해온 기업이다. 건설로 잘 알려진 대림그룹 역시 트렌드의 최전선에 나설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마치 문화 예술 기관을 방불케 하는 행보를 다각도로 펼쳐 왔다. 대림문화재단을 앞세워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 전문 미술관을 시작으로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 한남동 디뮤지엄(올해 성수동에서 새롭게 문을 열 예정이다)과 프로젝트 스페이스 등을 운영하는 등 아케팅에 누구 못지않게 꾸준히 매진해왔다. 고려제강은 지난 2016년 부산 수영구에 자사 폐공장을 복합문화공간 F1963으로 탈바꿈시켰는데, 갤러리(국제갤러리 부산점), 까페(테라로사), 서점(Yes24 중고서점), 예술 도서관(F1963 도서관) 등 다채롭고 매력적인 구성으로 동네의 분위기 자체를 확연히 바꿔놓고 있는 이 곳에는 얼마 전 현대모터스튜디오와 금난새뮤직센터를 품은 새 건물까지 들어섰다.
이들 기업의 열정적인 행보를 가리켜 장기적으로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기업 이미지에 보탬이 되는 ‘사회 공헌’이나 ‘메세나’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실 메세나의 역사를 훑어보노라면 예술과 후원의 공생 관계가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조언자이자 문화 애호가이던 가이우스 마이케나스(Gaius Maecenas, BC 70~8)에서 따온 ‘메세나’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으로 꽃을 피웠다. 분명 예술에 대한 사랑도 있었지만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의도 역시 뚜렷했다. 권력과 취향을 뽐내고 선전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시대가 바뀌면서 그 주체가 교회와 군주에서 귀족이나 부르주아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지금은 공공 영역에서, 그리고 이 글에서 다뤘듯 기업 차원에서의 메세나와 아케팅, 혹은 두 요소가 합쳐진 움직임이 점점 더 활발히 벌어지고 있고 말이다. 물론 오늘날의 후원은 주종 관계가 아니고, 역량과 브랜드 파워가 있는 예술가에게 외려 주도권이 주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리고, 언뜻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그 기저에는 역학 관계가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부디 가치 있는 공생으로 가는 사례가 많아지길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