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과 설경 사이에서의 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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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04, 2024

글 고성연

호시노야 가루이자와(HOSHINOYA Karuizawa)

여행기라고 해서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는 건 아니지만 머릿속에서 텍스트가 절로 춤을 추는 경우도 있다. 충만한 영감에 그 흐름도 마치 인공지능(AI)을 장착한 듯 알아서 돌아가지만 단지 게으른 손에 비해 이 춤사위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게 흠이랄까. 가슴이 움직이고 뇌도 작동하는데, 몸이 못 따라가서 그저 키워드 몇 자만 적어두기도 한다. 가을 날씨가 유난히 청아하게 아름다웠던 주말을 틈타 찾은 가루이자와는 바로 그런 흔하지 않은 설렘을 안겨준 여행지였다. 그런 여행의 안식처가 1백10년 전 료칸을 모태로 한 리조트인 호시노야 가루이자와(Hoshinoya Karuizawa)이고, 여기에 단풍의 절정까지 맞닥뜨렸다면 그 주말은 그저 ‘축복’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도리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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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쯤 만난 도쿄의 한 호텔리어는 ‘가루이자와’에 꼭 가보라고 했다. 돌이켜 보면 일본을 여러 차례 다녀왔지만, 도쿄 아니면 교토, 오사카 같은 간사이 지방의 도시만 주로 찾은 듯하다. 일본의 행정구역은 흔히 ‘도도부현’으로 정렬되고, 그중 현(県)만 해도 43개나 있는데도 말이다. 가루이자와는 나가노현에 속한 도시다. 마침 아트 페어가 열린 교토에서 원래는 대도시 출신인데 수년째 나가노현에서 살고 있다는 젊은 여성을 만났다. 우연히 접한 지역 축제의 열기와 그곳 주민들의 노랫소리, 식재료가 풍부한 자연환경에 반했다는 그녀의 설명에 시골 살이를 통한 느림의 미학을 담아낸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떠올랐다(실제 배경은 다르지만). 그리고 지난달 초 빽빽하고 정신없는 도쿄에서의 일정을 버텨내다 주말에 드디어 가루이자와행 신칸센을 탔다. 일단 기차에 빈자리가 보이지 않아 놀랐고, 1시간 남짓 걸려 역에 도착했는데 행복해 보이는 여행객들의 표정에 긴장이 풀렸다. 택시를 타고 호시노야 가루이자와 입구에 도착하자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해사한 햇살 속에서 차분한 분위기를 띠는 공간을 둘러싸고 곱디고운 단풍이 압도적인 스펙트럼을 뽐내고 있어서였다.
‘단풍’은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기후온난화 탓인지 올해는 단풍이 늦은 편이라 교토와 도쿄에서는 구경도 못한 터라, 나가노현이 훨씬 더 춥다는 점을 잊고 있었다. 필자를 안내해준 호텔 직원은 “일본에 온 이래 무척 바쁘셨다더니 (단풍) 운은 참 좋으시다”면서 “지금이 절정인 것 같다”고 배시시 웃었다. 계단식 논을 모티브로 한 정원을 걸으며 오묘한 색색의 단풍과 배경음을 깔아주는 새들에게 환영 인사를 받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둑해졌다.

자연의 숨결 속 미식과 온천, 그리고 탐험
그래도 즐길 거리는 넘친다. 창이 나 있는 스파에서 곱게 물든 단풍이 노을에 가라앉는 모습을 보며 ‘손맛’ 야무진 마시지를 즐겨도 되고, ‘산의 가이세키’라고 불리는 나가노현의 신선한 미식을 탐해도 된다. 또 1990년대 초반부터 에코 투어리즘의 선봉에 선 가루이자와의 명성 높은 날다람쥐의 야간 비행을 지켜보는 ‘피키오’ 투어에 참여해도 된다. 그런데 사실 둥지에 설치해둔 초소형 카메라 덕에 화면으로 보이는 어미 날다람쥐가 나오기만 야외에서 기다리다 기온이 뚝 떨어지자, 한 차례 멋진 비행을 목도하고는 냅다 근처 ‘톤보노유’ 온천으로 뛰어가야 했다. 원천수로 채운 실내탕, 노천탕, 사우나 시설을 둔 이 온천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마침 실내탕에는 지역 특산품으로 유명한 사과가 한가득 떠다니고 있고 꼬마들은 사과 잡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호시노야 고객 전용인 ‘명상 배스(meditation bath)’로 향했다. 극명한 어둠과 빛의 공간을 오가며 스스로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색다른 온천탕! 과연 여행업계에서 차별된 경쟁력을 갖춘 호시노 그룹의 최상위 럭셔리 리조트답다.
그런데 호시노야 가루이자와는 단순히 ‘럭셔리 리조트’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호시노 가스케가 1914년 처음 개업한 료칸을 계승해 4대 상속자인 호시노 요시하루(호시노 리조트 대표이사)가 2005년 호시노야 1호점으로 문을 연 ‘원조’라서일까. 당시 그는 호시노야 가루이자와의 설계를 아즈마 리에(Rie Azuma)라는 여성 건축가에게 맡겼는데, 분명 현대식 럭셔리를 품고 있지만 대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담백한 디자인에 단지 전체가 료칸을 품은 커다란 집처럼 편안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독특한 정서의 리조트가 탄생했다. 이는 호시노야 전반의 ‘토대’로 느껴지기도 한다(아즈마는 그 뒤로도 모든 호시노야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계곡의 마을’이라는 콘셉트를 지닌 호시노야 가루이자와의 매력은 단지 옆에 있는 ‘호시노 에어리어’에서 더 커진다. 톤보노유 온천을 비롯해 레스토랑, 상점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19세기 말 가루이자와의 순수한 자연에 끌려 정착해서 지역사회의 단초가 됐다는 선교사의 자취를 볼 수도 있다. 아이스링크를 낀 아기자기한 카페 풍경을 보니 추위를 뚫고 설경을 보러 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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