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Two Skiers in Bear Outfits’(1998). 독일 신표현주의 화가 페터 앙거만의 예술 여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소재인 테디 베어가 등장한다.
3 앙거만이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재직 시절 결성한 예술가 그룹 Yiup을 위해 그린 포스터 ‘Yiup in Aachen’(1970).
4 ‘사회적 미술’을 부르짖었던 앙거만의 스승 요제프 보이스가 등장하는 풍경화 ‘Landscape with Blind Spot’(1999).
커다란 이젤들이 놓인 1층 작업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수려하게 펼쳐진 마을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보노라니 큰 욕심 없이 ‘작업’에 집중하면서 살아가는 노장 예술가의 마음가짐과 순수한 열정이 왠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에게는 약간의 반전 스토리가 있다. 독일 현대미술계는 물론 20세기 세계 문화 예술계에서 가장 많은 논쟁을 일으킨 인물이자 이른바 ‘사회적 미술’을 주도한 영웅으로 손꼽히는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의 제자라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요제프 보이스는 백남준과 함께 기존 가치의 해체를 추구하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데 초점을 맞춘 전위예술 운동인 ‘플럭서스(Fluxus)’ 그룹을 이끈 핵심 인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경쾌한 동심과 잔잔한 애수를 동시에 품은 앙거만의 아름다운 풍경화와 ‘혁명가’나 ‘구원자’의 이미지를 지닌 보이스의 난해한 퍼포먼스와 설치 작품이라니…. 언뜻 보기에는 도무지 연결 고리가 없을 듯한 사제(師弟) 간 아닌가?
6, 8 앙거만의 작업실 1층 외관과 내부. 프랑코니언 지방의 상징적인 색채라는 노란색 벽이 따스한 느낌을 준다.
7 앙거만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풍자적 작품도 선보이지만, 전원생활을 하면서 거의 매일같이 야외에서 자연을 그리는 외광파 방식의 작업을 즐겨 한다.
당연한 얘기일 수 있지만 앙거만은 학창 시절 요제프 보이스의 추종자였다. 그는 뉘른베르크에서 수학하던 시절 독일 표현주의와 팝아트 등에 심취하기는 했지만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부르짖으면서 업악과 권위에 반대하던 보이스를 지지하게 됐고, 그 소용돌이의 핵심에 있던 뒤셀도르프(Du··sseldorf)로 학교를 옮기기까지 했다. ‘68혁명’이라고 불리는 학생운동이 일종의 촉발제로 작용했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대학가와 노동계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사회변혁 운동은 유럽 각지로 급속히 번졌는데, 독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보이스는 이미 급진적인 성향으로 유명했고, 펠트와 기름 덩어리를 모티브로 한 전위적인 조형 작품을 발표하고 피아노를 부수는 해프닝을 벌이는 등, 당시로는(요즘 기준으로도) 몹시 파격적인 행보를 많이 보였다.
전후 독일인들이 겪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과 위기,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갈등 속에서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건 앙거만 같은 ‘젊은 피’로서는 당연했다. “그(보이스)의 카리스마는 정말이지 대단했어요. 그런 강력한 존재감에 반했고, 그를 찾아가 나를 제자로 받아달라고 했지요.” 앙거만은 회상했다. 그렇게 보이스의 제자가 됐고, 지방, 펠트, 천, 밀랍 등 비정통적인 재료를 사용하는 ‘플럭서스식’ 작품을 했다. 그는 스승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저 영예를 쌓아나간다는 희망찬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보이스는 개념미술, 행위예술, 환경예술, 독일 신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친 입지전적인 인물이고, 앙거만 역시 그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스스로는 명확한 ‘개념’이 서 있지 않은데도 대중을 자극하고 선동하는 법을 잘 알았던 스승의 주관적인 기호에 맞춰 작업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짓눌렀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마음을 지닌 동창생들과 함께 ‘Yiup’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스승의 방식을 ‘편협하다’라고 비판하는 작업을 펼쳤기에, 반기 아닌 반기를 든 셈이다.
이렇듯 자연스럽게 스승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앙거만은 ‘회화’로 자신의 노선을 확고히 정했다. 회화의 정신성에 대해 모색하던 그는 1970년대 말에는 밀란 쿤(Milan Kunc), 얀 크납(Jan Knap)과 함께 또 다른 그룹인 ‘노말(Normal)’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일상과 맞닿은 소재를 활용하되 재치 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무질서적’인 충동을 버무린 자신들만의 조형 언어를 만들어내고자 함께 고민했고, 공동 작품을 내놓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인 이슈를 날카롭고 해학적으로 버무리지만 대담하고 열정적인 색감과 터치 덕분인지 뭔가 따듯하고 솔직한 정서가 묻어나는 앙거만표 예술 세계가 점차 구축돼갔다. 귀여운 테디 베어가 등장하는 ‘베어 시리즈’는 신비주의나 난해함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걷는 앙거만의 회화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그의 ‘베어 시리즈’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60점이 넘는다). 한 평론가가 말했듯이 지금이라면 ‘키치’ 예술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주류에 속한 현대미술가들이 시도하지 않는 소재였기 때문이다.
그가 야외에서 그리는 풍경화에 빠져든 건 우연이었다. 앙거만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1987년 어느 날, 화가인 친구와 시간을 보내다가 새로운 걸 시도해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날씨도 좋은데 와인 한 병 꺼내 들고 야외에 나가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활동한 인상주의를 신봉한 유파 중 햇빛에 비친 자연의 색채를 묘사하고자 옥외에서 작업을 하는 외광파(外光派, plein-air)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들은 기대 이상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특히 앙거만은 전율마저 느꼈다. “마치 그림을 다시 배우는 듯한, 내가 속한 세상이 다시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은 신선함을 느꼈다”고. 결국 그는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평온하면서도 활기찬 정원을 매일보기를 원했고, 지금의 보금자리인 투른도르프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앙거만은 매일같이 밖으로 나가(물론 위치는 바뀌지만) 특유의 감성으로 풍경을 담아내지만 여전히 코믹물이나 일러 같은 느낌을 주는, 시사 메시지를 담은 작품도 꾸준히 내놓고 있다. 자연이든 사회문제든 그에게는 여전히 관찰 대상이며 탐험과 사색의 대상이니까 말이다. 요제프 보이스의 제자였고 지금도 신표현주의라는 커다란 틀에 속하는 회화 작가라 불리기는 하지만, 사실 앙거만은 그저 자신의 탐험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누구와도 거리를 두려 하지 않고, 또 누구의 속박도 받지 않은 채 말이다. 일례로, 그의 풍경화 중 ‘Landscape with Blind Spot’(1999)을 보면 그림자처럼 어둡게 표현된 보이스의 존재도 눈에 띄는데, 스승과의 추억을 긍정적으로 기억하면서도 독자 노선을 걸어온 그의 창조적 여정을 엿볼 수 있다. 의도된 과장이나 신비로움을 추구하지 않아서일까. 그의 풍자적 작품이든, 풍경화든 풍부한 색채로 인해 시각적으로 명료하면서도 결코 부담스럽지 않고 은근히 따스한 인간미가 묻어난다는 공통분모가 느껴진다. 그리고 수십 년 세월을 겪으며 무르익어온 이 70대 노장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부디 그 여정을 되도록 오래도록 이어가기를 응원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