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부산비엔날레 현장 스케치_갈대숲, 항구, 골목길을 거니는 예술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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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1, 2020

글 고성연

‘격년제’라는 뜻을 지닌 이탈리아어에서 따온 ‘비엔날레’. 흔히 2년마다 열리는 국제 미술전을 일컫는, 세계 각지에서 마주칠 수 있는 행사지만 코로나19라는 돌발 변수가 터진 올해는 사정이 다르다. 해마다 건축, 미술전을 번갈아 펼치는 베니스비엔날레를 비롯해 대부분 연기나 취소를 결정했다. 우리나라 ‘최장’ 역사를 품은 부산비엔날레는 ‘불확실성 속 해법 찾기’를 외치며 감행을 결단했지만, 방역이 삼엄했던 지난 9월 초 아쉽게도 온라인으로 개막했다. 그렇지만 다행히 ‘오프라인 관람’으로 전환한 추석 연휴를 기점으로 ‘오감’으로 즐길 수 있게 됐다. 문학을 토대로 음악과 시각예술을 엮은 이색적인 구성과 매혹적인 다국적 콘텐츠가 돋보이는 2020 부산비엔날레. ‘발품’ 아깝지 않은 그 현장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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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거니는 ‘산책’은 아마도 비엔날레가 선사하는 가장 살뜰한 매력이 아닐까 싶다. 아예 생경한 지역의 도시도 그러하겠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르는 구석이 더 많은 도시도 그렇다. 당대 사회의 거울 역할을 하는 예술이라는 렌즈로 들여다보면 복잡다단한 도시의 면면을 새삼 느끼고, 새롭게 발견하는 희열도 알게 되지 않는가. 어디든 각자의 매력은 있겠지만 부산은 예술 산책의 묘미를 따지자면 ‘장소의 미학’이 꽤 출중한 곳이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도시 디자인’ 탐사를 한 김민수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얘기했듯 부산이라는 도시는 천혜의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복잡한 내력을 쌓아왔기에 ‘주름’이 겹겹이 새겨져 있지만, 그 주름에 고단한 흔적만 묻어나는 게 아니라 신나는 놀이동산이나 멀티플렉스 영화관처럼 다양한 재미가 잔뜩 배어 있기 때문일 터다.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라는 주제를 내걸고 2020 부산비엔날레를 이끈 야콥 파브리시우스(Jacob Fabricius) 전시 감독은 이 도시가 지닌 다채롭고 경쾌한 매력을 잘 포착해낸 듯하다. 부산, 혹은 도시를 소재로 다국적 저자 11명이 쓴 탐정·공상과학 소설 등의 문학이 ‘뼈대’가 되고(동명의 문집도 출간), 시각예술이 ‘장기와 뇌’, 음악이 ‘조직과 근육’ 역할을 맡도록 한 구성도 흥미롭지만, 자칫 산만해질 수 있는 구조의 다층적인 콘텐츠를 각각의 결과 잘 어우러지는 장소로 묶어 선보인 안목도 인상적이다. 소탈한 항구 전망을 품은 영도, 골목과 거리마다 사연이 녹아 있는 원도심 일대, 낙동강 하구의 갈대숲으로 유명한 을숙도의 부산현대미술관(MoCA), 이렇게 크게 세 곳이다. 간만에 문학의 감성에 영감 받은 채 지도를 들고 유유자적 ‘예술 산책’을 하노라면 탐정 놀이나 보물찾기 하듯 도시를 즐겨보라는 전시 감독의 애정 어린 제안에 ‘원격’이나마 환한 미소로 화답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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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 1_영도
이야기_김언수 <물개여관>

“바다는 무언가를 계속 그리워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고, 실제의 세상을 만나는 것은 때때로 너무나 무섭고 위험한 일이니까….” 부산 출신 김언수가 쓴 소설 <물개여관>은 낡은 건물이 즐비한 영도 남항동 골목을 배경으로 한다. 필자는 영도에 처음 가봤는데, 부산과 영도를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인 영도다리를 건너면 고즈넉한 영도항의 모습이 소탈하게 펼쳐진다. 오른쪽 턱에 손을 괸 소녀의 얼굴이 그려진 창고 건물이 목적지인 전시장. 소설에 묘사된 배의 녹슨 철판을 때리는 깡깡이 망치질을 하는 아줌마와 기약 없는 출장길을 떠나는 선원들 대신 9명의 아티스트가 각자의 방식으로 작업한 설치 작품과 영상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우선 입구에서 맞이하는 커다란 구조물은 이요나의 ‘Enroute home’이라는 작품으로 스테인리스 파이프를 소재로 미로를 헤치며 나아가면 곳곳에 맥주 캔, 두루말이 휴지 같은 일상용품이 놓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에 살짝 놀랄 수도 있는데, 방수포, 스티로폼 등 역시 부두에서 쉬이 볼 법한 물품으로 만든 권용주의 작품 ‘폭포’다. 가상과 실재의 경계에서 유동하는 자아를 연상시키는 김희천의 영상 작품 ‘탱크’를 감상하노라니 바다와 육지 사이에서 부단히 표류하는 삶을 사는 소설 주인공 ‘수레’가 설핏 연상되는 건 아마도 뱃고동이 나지막이 울릴 것만 같은 ‘공간’의 힘일까, 아니면 ‘텍스트’의 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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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 2_원도심 일대
이야기_박솔뫼 <매일 산책 연습>

부산 중앙역 11번 출구에서 몇 걸음 가면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애환을 품고 있다는 그 유명한 40계단이 있는 원도심이다. 주인공이 부산에 머물 곳을 찾다가 1982년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의 목격자인 중년 여성과 알아가는 얘기를 담은 박솔뫼의 소설 제목처럼 매일 산책해도 지루하지 않을 듯한, 정감 가고 볼거리 많은 동네. 아기자기한 건물에 들어선 작은 전시 공간이 도처에 있으므로 ‘아트 맵’이 실린 소책자가 필수다(busanbiennale.org). 이불이 대롱대롱 걸려 있는 세탁소 건물 옆 전시장이 눈에 가장 잘 띈다. ‘LGBTQ’를 주제로 한 만화를 통해 소수자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프란체스크 루이즈의 ‘자기만의 방 백합독립출판’. 서점 공간 자체가 작품인데, 원하면 안에 비치된 얇은 책자를 가져갈 수 있다. 원도심 산책에서는 소설에 묘사된 용두산 아파트 등의 장소를 발견하거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작품 구경’하는 맛이 쏠쏠하다. 부산의 신진 작가 허찬미의 회화도,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노원희의 회화도 애잔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이야기_안드레스 솔라노<결국엔 우리 모두 호수에 던져진 돌이 되리라>

빨강과 주황의 외벽이 인상적인 BNK 부산은행 아트시네마 건물은 원도심 산책의 화룡점정이라고 할 만하다. 콜롬비아 태생의 문필가 안드레스 솔라노의 단편 추리소설과 ‘매칭’되는 작품이 모여 있다. 일단 가는 길에 옛 한국은행 건물을 캔버스 삼아 설치한 핑크빛 토끼, 달팽이 등을 담은 작품부터 심상치 않다(람한 작가의 톡톡 튀는 디지털 페인팅 작품 시리즈). 거리에서의 묘한 시각적 즐거움은 아트시네마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살짝 충격(?)으로 바뀔 공산이 크다. 미지의 기원을 지닌 잘린 신체를 형상화한 나다니엘 멜로스의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물론 미소 띤 검은 머리 여인을 담은 람한의 작품도 있긴 하다). 가장 집중해서 감상해야 할 대상은 김아영 작가의 영상 시리즈다. 특히 17분 길이의 최신작 ‘수리솔 수중연구소에서’는 예멘 난민 출신 배우가 등장 하는 영상의 미학도 빼어난 데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연상케 하는 내용을 담은, SF 영화 같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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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 3_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MoCA)
이야기_편혜영 <냉장고>

갈대의 물결이 아름다운 을숙도 생태공원에 자리 잡은 부산현대미술관은 출범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동시대 미술의 첨예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그릇 역할을 톡톡히 하는 공간이다. 외벽에 ‘수직정원’이라는 작품을 둘러 초록빛 옷차림을 한 미술관 건물은 이번 비엔날레를 맞이해 ‘자이언츠’ 야구복을 입은 오리를 유리벽에 등장시켰다. 살며시 미소를 머금게 할지도 모르는 스테판 딜레무스의 설치 작품 ‘무제 스킨’. 실내로 들어가면 공간을 압도하는 ‘몬도 카네’가 입구부터 떡하니 버티고 있다. 철창 감옥에 갇힌 기계 인형들이 눈길을 절로 사로잡는다. 부조리한 세상을 풍자한 벨기에 작가 요스 드 그뤼터 & 해럴드 타이스의 설치 작품으로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선보였다. 으스스한 결말을 선사하는 편혜영의 단편소설 <냉장고>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 5인의 작품은 이렇듯 야외, 1층을 비롯해 지하 1층 공간에도 흩어져 있다.



이야기_아말리에 스미스 <전기(電氣)가 말하다>

“곧 부산이 잠에서 깨어나 저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것입니다…. 당신은 인간이 도시의 발전을 이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곳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저, ‘전기’입니다….” 문필가이자 시각예술가이기도 한 아말리에 스미스의 단편은 거대한 도시가 돌아가게끔 에너지를 공급하는 전기가 꽤나 냉소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해 엄마(전자기), 아빠(태양광), 전남편(전화) 등과 대화를 나누는 극본 형식의 이야기다. 실소를 유발하는 대화에 ‘매칭되는’ 작품군에는 8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빛과 색채, 기하학의 조화를 플렉시글라스 등의 재료 위에서 영상으로 펼쳐내는 바바라 카스텐의 ‘크로스오버’,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을 그린 리우 와의 가상현실(VR) 에세이 작품 ‘Devil’s Ivy’,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의 양가성이나 권력 구조 등을 다뤄온 카미유 앙로의 회화와 설치 작품 등 여성 작가들의 빼어난 작품 세계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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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_ 김혜순_ ‘오션 뷰’, ‘고니’, ‘자갈치 하늘’,‘해운대 텍사스 퀸콩’, ‘피난’
지난해 봄 캐나다 그리핀 문학상을 받은 김혜순은 2020 부산비엔날레에서 유일하게 시를 선보인 문필가다. 그녀의 시 다섯 편과 맥락을 같이 하는 작가군은 8명. 이 중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는 비앙카 봉디는 2주간의 자가 격리를 감수하고 부산에 다녀갔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닥을 온통 하얀 소금으로 덮고 나무와 풀을 심은 쓸쓸한 방 안에 침대와 화장대가 덩그라니 놓여 있는 공간이다. 김혜순 시인의 시 ‘고니’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대기실’이라는 작품으로, 침대는 삶과 죽음을 상징한다고. 격리 기간 중 홀로 고독을 견디면서 작품 주제에 더 몰두할 수 있었다는 비앙카 봉디의 방을 지나면 구정아 작가의 작품 ‘7개의 별’이 설치된 공간이 나온다. 어둠 속에서 초록빛으로 반짝이지만 불이 켜져 방이 밝아지면 그저 존재감 없는 캔버스만 걸려 있다. 어두울수록 빛을 더 발하는 세상을 시적 조형 언어로 담아낸 이 작품은 익숙함과 새로움, 현실과 허구 등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산책길 4_망미동 국제갤러리, 해운대 조현화랑 등 ‘장외’ 공간
‘예술 산책’을 위해 일부러 부산을 찾는다면 비엔날레 기간에 선보이는 다른 전시들도 주목할 만하다.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는 현대 사진계 거장 칸디다 회퍼(Candida Ho ··fer)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부산에서는 처음 개인전을 가지는 칸디다 회퍼는 세계 각지에 있는 문화적 장소들을 선정해 ‘사람’을 등장시키지 않은 채 내부를 담아내는 작품 세계로 잘 알려져 있다. 장소에 원래 설치돼 있는 인공 조명과 자연광을 제외하면 인위적인 장비를 쓰거나 보정을 하지 않는데, 그만큼 치밀하고 정교한 계산과 완성도 있는 기교가 뒷 받침된다. 이번 전시는 규모 자체는 크지 않지만 함부르크의 문화 예술 명소인 엘프 필하모니 콘서트홀의 축척 모형을 찍은 작품을 비롯해 모스크바의 개러지 현대미술관, 리스본의 민족지학 뮤지엄(Ethnogra phisches Museum Lissabon) 등 70대 노장의 긴 창조 여정을 다양하게 아우른다. “부산에 가본 적이 없고 갤러리 공간도 직접 보지 못했음에도 전시 공간에 알맞게 정돈되어 있는 제 작품들을 보고 나니 설렘이 한결 커진다”면서 코로나19 여파로 방한하지 못한 아쉬움을 영상 편지로 전한 그녀가 거주하는 쾰른은 역동적인 항구도시로 부산을 닮은 구석이 있다. 해운대 달맞이언덕에 자리한 조현화랑에서는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정광호 작가의 개인전이 10년 만에 열리고 있다. 두 전시 모두 부산비엔날레가 막을 내리는 11월 8일까지 계속된다. 이 밖에 해운대의 또 다른 명소 고은사진미술관에서는 이명호 작가의 개인전 <드러내다>가 11월 25일까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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